소설리스트

이세계 왕실의 가정교사-42화 (42/215)

〈 42화 〉 2­6. 전야제 무도회 (2)

* * *

2­6. 전야제 무도회 (2)

시하와 아네모네 라리사는 파티장이 된 홀의 중앙에 도달했다.

그곳에는 이미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빈 자리가 한 가운데 말고는 별달리 없었다.

멀리 외곽에는 알렉산더의 모습도 보였다.

한쌍의 남녀마다 거리는 단 2미터.

무도회의 2부는 여러 사람들이 중앙 홀에 모이게 되는데, 서로간의 거리가 좁기에 정적인 춤을 추게 된다.

파트너와 서로 마주본 상태에서, 시하는 동의를 구하듯 손을 뻗으며 말한다.

"지금부터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허락해주셔서 감사해요."

아네모네의 감사는 겉치레가 아니다.

사실, 그녀는 허영심 많은 오라버니에게 떠밀려 나온 것이나 마찬가지다. 시하에게 춤 상대를 부탁한 것도 아네모네의 의지는 아니었다.

아무리 임시 공작위라 하더라도 국왕이 직접 공인한 인간. 자작가의 차녀일 뿐인 아네모네는 오히려 거절을 각오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예상과 다르게 시원하게 춤 상대를 허락받은 상황. 오히려 감사인사를 먼저 했어야 하나 후회하는 중인 아네모네였다.

남성들은 한 손을 파트너의 허리 뒤에, 여성들은 한 손으로 파트너의 어깨를 감쌌다.

그리고 남은 손은 마주잡은 채, 측면으로 쭉 뻗는 수많은 남녀들.

홀에 울려퍼지는 장엄하고도 잔잔한 춤곡.

그 춤곡과 함께 댄스가 시작되었다.

여성과의 보폭 차이를 의식한 작은 걸음.

그 걸음에 호응하듯이 따라오는 아네모네.

음악에 맞춰 몸을 돌리기도 하며, 관객들을 적당히 쳐다보면서도 파트너를 바라보아야 한다.

"예상은 했는데, 심하네요."

"네?"

아무리 국왕이 시하를 에우데미아의 일원으로 인정하였어도, 귀족들 사이에서 그를 아니꼽게 보는 시선은 존재했다.

에코니아의 역사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면, 감히 표류자라는 존재를 우습게 생각할 수 없다.

하지만 귀족들 중에는 몰상식한 사람들도 있기 마련. 그런 자들에게 이시하라는 존재는…

운좋게 벼락출세한 이세계의 평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별 건 아닙니다. 따라와주세요."

"아… 네, 알겠습니다."

너무나 순조로운 둘의 춤을 방해하려는 듯, 옆에 있던 귀족 커플들이 고의로 진로를 틀어온다.

하지만 그때마다 시하는 겉으로 교양을 유지하며, 작은 보폭으로, 아네모네를 리드하며. 빈 곳을 찾아 미묘하게 자리를 옮겨갔다.

* * *

그를 향하는 여러 시선 중 하나.

"저 분, 춤을 열흘도 안배운 게 맞아?"

요나는 감탄하면서도 의문을 느끼는 중이다.

"이젠 놀랍지도 않아요…."

"그냥 이해를 포기하면 편해져."

이시하가 처음 알현의 홀에서 탄원을 당한 날, 사법부장 아론 미모스는 그의 손자인 요나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어린 나이에 자신만의 정의를 가졌더구나.'

지금까지 요나는 듣지 못했던 극찬, 그렇기에 그는 이시하를 끊임없이 관찰해왔다.

타인의 앞에서는 희미하게 웃고 있으며,

무덤덤하게 일반 폭력배들을 정리하던 실력에,

암기가 자신을 향하는데도 놀라지 않는 담력.

하지만 그런 모습이 정의를 말해주진 못했다.

'조부께서는 왜 저 사람이 정의롭다 한거지.'

요나에게 정의란 원칙을 지키는 것이다.

미모스에 이어져 내려온 가훈처럼, 중간자로서 양 면을 보기 위해서는 원칙이 필수적이니까.

하지만 슬럼가 보스의 방에서 이시하의 모습은…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타인을 전부 파악한 듯한 오만함.

피고의 죄를 유도하는 듯한 대화.

죄인을 인간 미만으로 취급하는 발언.

과연 저 사람은 정의로운 인간일까.

분명 슬럼가의 보스는 죄인이 맞다. 이것은 절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하지만 그 과정은 올바른 것이었을까, 이는 지금의 요나의 마음 속을 차지하는 큰 고민이다.

이시하는 지금도 평소의 그 얼굴 그대로 다른 귀족들의 견제를 피하며 춤을 추고 있다.

그 모습을 보니… 요나는 더 막막해진다.

이 답답한 기분의 원인은 모른다.

속이 꽉 막힌 채로 토해낼 수 없을 뿐이다.

'조금 더 지켜보아야 겠지…'

요나의 고민은 끊이지 않는다.

* * *

무도회 2부의 첫번째 시간이 끝났다.

이제 홀 위의 남녀들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고, 새로운 남녀들이 중앙의 홀을 채울 것이다.

시하는 아네모네 라리사와 함께, 헤르만 일행 근처에 있는 벽난로로 왔다.

그런 그들을 맞이하는 한나.

"선생님, 잘 하시네요."

"스승이 훌륭해서 그렇지."

"말은 잘하셔요."

예법 스승인 한나와 짧은 대화를 나눈 시하는 아네모네를 향해 말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몸을 움직인 직후이더라도, 여기서 조금 쉬다가 가세요."

"아, 호의 감사합니다."

아네모네는 내심, '공작이 여성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구나' 라고 생각했다.

곧 겨울이 시작되는 11월 말.

방금까지 몸을 움직였기에 덥기는 해도, 드레스 차림의 여성들은 오히려 곧 추워질 것이다.

이런 날씨에 백작가 이상의 유력 귀족들이 벽난로의 좋은 자리는 전부 선점해둔 상황.

자작가의 여식인 아네모네 입장에서 시하의 배려는 충분히 고마운 것이다.

"공작님. 음료, 드시겠습니까?"

"네, 하나 부탁드립니다. 라리사 영애께도 한 잔 부탁드려요."

시하가 시종이 건넨 음료를 마시며 한숨 돌리는 도중, 다른 사람이 찾아왔다.

"안녕하세요 공작님, 셀레네 파트라스라고 합니다. 다음 춤 상대를 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음, 알겠습니다."

건국제의 의의는 작위가 낮은 귀족들이 상대적으로 높은 귀족들에게 어필하는 데 있다.

"라리사 영애, 저는 다시 가보겠습니다."

"아, 네."

그렇기에 2부의 무도회는 남녀 여부에 관계없이, 작위가 동등하거나 더 낮은 사람들이 파트너 요청을 하게 된다.

신청을 받은 입장에서는 거절할 수도 있지만, 시하는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흐름은 끊어지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 이후에도 이시하는 오는 사람을 막지 않고, 계속해서 중앙으로 향했다.

* * *

시하를 향하는 또다른 시선.

아셰리아 역시 시하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

"후우."

자신도 모르게 쏟아진 한숨.

그 한숨에 왕비, 루시아가 걱정스레 쳐다본다.

"리아, 왜 그러니?"

"약간… 답답해서요."

예전에는 느껴본 적 없는 답답함이다.

사실 지금껏 전야제에 꾸준히 참석은 해왔어도, 무도회에는 별 관심이 가지 않던 아셰리아였다.

애시당초,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아셰리아로서는 자신이 존경하는 선생님과 모든 것을 함께 경험해보고픈 마음이 강한 상황이다.

"아샤와 함께 바람이라도 쐬고 오겠니?"

"아뇨, 괜찮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못했다.

아셰리아는 지금으로서 11세.

그에 반해 건국제 전야제의 무도회는 엄연히 12세의 생일이 지난 자들만이 참여할 수 있다.

올해 13세인 자신의 오라버니, 알렉산더와는 다르게 댄스에 참여할 수 없는 나이인 것이다.

"힘들면 말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어머니."

그녀는 그저 멍하니 보고 있을 수밖에 없다.

선생님의 상대는 이미 세 번이나 바뀌었다.

파트너는 전부 자작가.

고위 귀족들은 아직 간을 보고 있다.

스승이 연달아 중앙에 오르는 이유는 알고 있다.

자신의 스승님은… 에우데미아 귀족사회에 충분히 적응했음을 모두에게 보여야 한다.

허나 그 자각은 아셰리아를 더 답답하게 만든다.

선생님은 저곳에 있어야만 하는 것이고…

자신은 왕녀로서 이곳에 있어야만 하니까.

선생님의 근처에는 본인이 서있을 수 없다.

어느새 춤곡이 끝나고.

선생님은 다시 중앙에서 멀어지셨다.

또다시 중앙으로 가시게 될까.

이번엔 변경백의 영애가 시하의 근처로 다가가고 있다.

'나름 고위 귀족이니, 다시금 춤추시겠지…'

아셰리아는 당연한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시하는 파트너 요청을 이번만큼은 거절했다.

그 모습을 보고 아셰리아는…

'다행이다…'

왜인지는 모를 안도감을 느꼈다.

물론 본인이 왜 그런 감정을 느끼는지, 그 부자연스러움은 눈치채지 못했다.

왕비, 루시아 역시 이시하를 지켜보다 말했다.

"리아, 먼저 동관에 가서 쉬겠니?"

"네?"

"영 불편해보여서 말이다. 선생님도 꽤나 지치신 것 같으니, 함께가서 먼저들 쉬고 있으렴."

원칙적으로 왕족은 무도회가 끝나는 그 순간까지 회장을 지켜야 하지만… 둘 다 무리를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셰리아는 어머니의 제안에 잠시 생각하다…

결정을 내렸다.

"감사합니다. 먼저 들어가서 쉬겠습니다."

"그래, 선생님과 함께 가렴."

"알겠습니다."

아셰리아는 종종걸음으로 선생님을 향해갔다.

* * *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은 지쳐서요.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뵙겠습니다."

"… 아쉽게 되었군요. 실례했습니다."

변경백의 영애는 나에게 간단히 인사하고 물러났다.

지금에서야 파트너 신청을 해온 것은 뻔하다.

쉽게 탈락하지는 않을 놈이라는, 계산을 마치고서 온 거겠지.

지금은 이 파트너 신청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된다.

정확히는, 거절하는 것이 더 이득이 된다.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별별 의미를 부여해대며 떠드는 '귀찮은 족속들', 그걸 줄여서 귀족이다.

만약 파트너 신청을 받아들였다면 여자를 밝힌다느니, 지위를 밝힌다느니하는, 별별 이야기가 돌아다닐 게 뻔하다.

그에 반해 신청을 거절하는 것으로, 나는 사람을 대하는 데 지위를 가리지 않고 주관있게 대한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

고위층에게 흔들리지 않는다는 인식과 동시에, 하위 귀족에게는 지위를 따지지 않고 사람을 대한다는 인식을 주는 것이다.

"선생님."

"네?"

약간의 피로감을 느끼며 쉬고 있는데, 어느새 다가온 아셰리아 공주가 나에게 말을 걸어 왔다.

"어마마마께서 먼저 돌아가 쉬라 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 배웅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슬쩍 옥좌를 보니, 왕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나도 가서 쉬라는 걸까.

나는 4번이나 연달아 귀족들의 견제를 피해가며 춤을 춰야했고, 그때마다 파트너를 배려한답시고 신경을 썼다. 육체적인 피로보다 정신적인 피로가 더 심한 상황.

거절할 이유가 없다.

"그럼 저희 먼저 가볼까요?"

"네."

나는 헤르만 일행과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아네모네 라리사에게 간단히 인사를 전한 후, 아셰리아 공주와 함께 알현의 홀에서 나왔다.

.

공주와 함게 걷는 왕궁의 길.

작은 공주는 나보다 약간 앞에서 걷고 있다.

가을 밤하늘은 맑았고, 바람 역시 춥다.

"공주님, 춥지는 않으세요?"

"땀도 흘리지 않아서, 괜찮습니다."

말은 저렇게 해도 공주는 추울 것이다.

에우데미아에서 유행하는 드레스는 얼핏 보기에는 가릴 곳은 다 가리고, 밑단 역시 발목을 가릴 정도까지 내려오는 듯 하다.

하지만 그 옷감은 바람이 다 통하는 재질이라, 이런 날씨에는 추울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고위 귀족들은 벽난로를 끼고 있는 거고.

나는 내가 입고 있던 테일 코트를 적당히 접어 공주에게 둘러 주었다.

다행히 땀은 나지 않았었다.

춤을 추는 동안에도 조금씩 땀이 나지 않도록 주변에 마법을 둘렀으니까.

"저는 괜찮은데…"

"감기 들리시면 안됩니다."

"… 감사합니다."

오늘 내가 보였던 배려들은 전부 나름의 계산이 있었다. 국왕에게 최대한 천천히 인사한다던가, 함께 춤을 춘 여성들에게 배려를 보인다던가.

미혼의 젊은 남성 귀족들에게는 꽤나 미움을 받겠지만, 이미 기혼인 남성들에게는 오히려 차츰 좋은 인상이 심어질 것이다.

첫 파티임에도 지킬 예법은 지키면서, 소란 일으키지 않고, 배려할 줄 아는 동시에, 자기 주관이 확실한 남자. 그것이 내 인식이길 바란다.

"선생님, 오늘은 많이 고단하셨죠?"

"그렇죠. 약간 피곤하긴 하네요."

"정말 여러 여성분들과 춤을 추셨죠."

"하하, 원하던 일은 아니었지만요. 확실히 적응했다는 건 보여야겠죠."

아셰리아는 땅을 보면서 말하고 있다.

음, 무언가 기분이 안좋은 것 같은데.

어느새 우리는 중앙정원에서 동관으로 넘어가는 지점. 별내리던 밤의 티테이블에 도착했다.

내 앞에서 걷던 공주가 잠시 멈춰섰다.

"그… 선생님."

"왜그러시나요?"

"저… 저와…"

머뭇머뭇하는 아셰리아 공주. 티테이블 근처의 마력등이 발갛게 물든 공주의 양 볼을 비춘다.

"저와도 춤을 추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런거였구만.

요즘들어 가끔 아셰리아 공주가 원하는 것을 표현하는데, 아이다운 귀여운 모습을 보인다.

다른 사람들은 춤을 추는데, 자신은 입장상 추지 못하고 있었기에 호기심이 발동한 것 아닐까.

"그럼 테이블 뒤편의 공간에서, 어떤가요?"

내 대답에 아셰리아 공주는 나와 눈을 맞추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좋습니다."

기대감에 찬 눈빛이다.

점점 밝아지는 모습을 볼 수 있어 다행이다.

그렇게.

우리는 테이블 뒤편에서 자세를 잡는데…

'저쪽 세상의 11살이면 더 컸을건데 말이지.'

매체의 발달은 아이의 조숙에도 영향을 끼치는 법. 새삼 세계간 문화 차이가 느껴진다.

공주의 키는 내 명치정도밖에 오지 않는다.

내가 반쯤 무릎을 굽혀준 상태에서야,공주는겨우 내 어깨에 손을 얹을 수 있었다.

"그럼 시작해볼까요?"

"네…"

손을 맞잡자 공주는 부끄러운 듯이 시선을 떨구었다.

조금씩 조금씩.

좌우로 스텝을 밟아가는데…

방금 알현의 홀에서 내 보폭을 여성에게 맞춰 절반 정도로 줄였다면… 지금은 삼분의 일 정도.

누군가 우릴 본다면 우스꽝스럽다 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셰리아 공주는 시선을 아래를 향하고 있으니… 역시나 스텝 서너번만에 부자연스러움을 알아차려 버렸다.

잡았던 포즈를 풀고… 어느새 풀이 죽은 공주.

"공주님."

"네에…"

보여준 것 중 제일 심하게 풀이 죽어버렸다.

약간의 침묵.

뭐라해야하지.

나는 무릎을 낮추어 공주와 시선을 맞추었다.

"음. 공주님이 조금 더 커서 키가 맞게 되면… 그때 다시 한번, 여기서 춤을 출까요?"

나와 눈이 맞은 공주는 시선을 피했다.

지금 못추게 된 게 내심 마음에 안드나 보다.

그렇게 잠시 생각하던 공주는…

"네… 약속하셨습니다."

풀죽은 모습도 참 귀여운 공주님이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