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 27. 축제와 은방울꽃
* * *
건국제 당일. 4시.
동관 앞에서 아셰리아 공주를 기다리는 중이다.
점점 밖에서 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느낌이라, 오늘은 나도 색있는 안경과 모자를 써서 약간의 변조를 주었다.
오늘은 박물관 외출과는 다르게 헤르만은 없다.
당일 파티 참석이 면제된 나와는 다르게, 4대 가문의 성인으로서 출석해야 했기 때문이다. 가기 싫어하던 녀석의 모습이 훤히 떠오른다.
혹시 모르니 호신용으로 엔크라테아를 답답할 정도로 긴 코트 속에 차고 오긴 했는데, 쓸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오늘도, 왕자가 공주보다 일찍 나왔다.
"안녕하십니까, 스승님! 외출하십니까?"
"네, 알렉산더도 외출하시는 건가요?"
"바깥 거리에 선약이 있어서요."
평소와 다른 평민들의 의복과 모자, 눈을 숨기는 안경이 돋보이는 알렉산더 왕자.
음, 그래도 호위 정도는 붙이고 가는 걸까.
거기다 사람을 돈으로죽이지 않는 법은 아직 가르치지 못했는데, 은화는 들고 있을까?
"호위와 환전은 미리 준비해두셨나요?"
"네! 호위는 기사단의 두 분께 멀리서 지켜달라 부탁드렸고, 금화는 은화로 미리 바꾸어두었습니다."
오오… 우리 알렉산더가 철이 들었어요.
내가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정말 다행이다.
"그럼 잘 다녀오세요."
"선생님도 잘 다녀오세요."
알렉산더는 정문 방향으로 멀어졌다.
그리고 그런 알렉산더와 교대를 하듯, 아셰리아 공주가 동관에서 나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제가 일찍 기다린거에요. 괜찮아요."
공주는 평민 소녀처럼 하늘색 면소재 원피스를 입었고, 트레이드 마크인 은발은 땋아서 모자에 숨긴 상태다.
"그런데 오늘은 아샤가 없네요?"
"아… 아샤가 오늘은 따로 일이 있다고 해서요"
헤르만이 따라오지 못해서 아샤를 믿고 있었는데… 아셰리아 공주와 단 둘이서만 나가는 건 약간 위험하지 않을까.
"음… 고민되네요."
"둘이서만 나가는 건 안될까요...?"
아셰리아 공주는 나가지 못하게 될까 염려되는지, 끝말을 흐렸다.
요즘따라 내 앞에서 약한 모습을 자주 보이네.
나도 내 몸 하나 정도는 지킬 수 있고, 치안대원들도 사복차림으로 거리를 순찰한다고 들었다.
저번처럼 슬럼가나 박물관처럼 사람이 적은 곳에 간다면야 위험할 수 있겠지만… 내가 공주를 잃어버리지만 않는다면 괜찮지 않을까.
"가보죠. 저도 무기는 챙겨두었으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왕성 정문을 향했다.
.
그런데…
어디로 가지.
나도 게임이 아닌 실제 축제는 처음이다.
내가 아는 건…
거리가 휘황찬란한 등불들로 꾸며지고,
상점이 몇 개 추가로 개방되면서 할인도 하고,
밤에는 마법사들이 불꽃을 쏘아올린다는 정도.
공주가 축제 구경을 제안했으니까, 어딘가 가고 싶은 곳이나 하고 싶은 건 없을까?
"공주님, 특별히 가고 싶은 곳은 있으신가요?"
"그게…"
음.
곡선을 이루며 올라간 눈썹.
평소보다 커진 눈꺼풀.
약간 올라간 양 볼에 피어오르는 홍조.
손가락 놀이를 시작한 두 손.
놀람. 부끄러움. 약간의 당혹, 동시에 기대.
"은방울꽃 장식을 사러 가고 싶습니다."
은방울꽃 장식이라…
게임에서도 축제 기간에 많이 보였었다.
그래도 파는 곳은 내가 모르는데.
"어디서 파는 지는 아시나요?"
"네, 왕도 중앙거리를 내려가다가 아카데미 상점가로 가면 있다고 합니다."
"약간 멀기는 한데… 축제라 마차는 타지 못하겠네요. 그럼 가볼까요?"
"네."
우리는 목적지를 향해 걸으며 대화를 나눴다.
거리는 흰색 등불들로 꾸며져 있었다.
"공주님, 거리 축제에 나온 건 처음이신가요?"
"네. 거기에 평소 다른 곳에 방문할 때는 마차로 이동을 하는 편이니까요. 거리를 걸어본 건 저번 박물관이 처음이였어요."
공주님이다 보니 당연한거겠구나.
하긴 툭하면 변장하고 거리를 쏘다니는 알렉산더가 이상한 것 아닐까. 야외 수업 이후로 철이 들어서 본인이 주의는 하고 있지만 말이다.
"선생님."
"네?"
"모처럼 바깥에 나왔으니, 공주라는 작위는 빼고 불러주세요."
"아. 그렇네요."
저번처럼 인적이 드문 곳에 가는 것도 아니니까, 본명이나 작위로 부르면 이상할 것이다.
"그런데 말이죠. 밖에서 이름으로 부르는 것도 위험하지 않을까요?"
"음… 그럼 제 이름을 줄여서 불러주세요."
"저도 국왕 폐하나 왕비 전하처럼 리아라고 부르면 될까요?"
"……. 그건 싫습니다."
"허어…"
싫다니.
부모와는 약간 구분을 하고 싶다. 그런 걸까.
거기다 공주가 저런 말을 하는 건 처음 듣는다.
…….
어떻게 부르지?
"음, 정하기 어렵네요."
옆을 슬쩍 쳐다보니, 내가 고민하는 모습을 유심히 살피고 있는 공주가 있었다.
나름 기대하는 것 같은데…
"아셰라는 어떤가요. 조금 티가 나려나."
나는 결국 아셰리아라는 이름에서 i 하나를 뺀 단어를 말하고, 슬쩍슬쩍 공주의 눈치를 보았다.
"그 정도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다행이네요, 아셰라."
아셰리아 공주는 나름대로 만족한 눈치다.
다행이구만.
.
그 후로 한 시간.
우리는 아카데미 거리에 도착했다.
오래 걸리긴 했다.
그래도 공주님과 함께 거리의 여러 모습을 구경하며 와서, 크게 힘들거나 지루하진 않았다.
그나저나, 거리가 달라지니 차이점이 보인다.
중앙 거리는 흰색 등불이 위주였다면, 아카데미 거리에서는 형형색색의 등불들이 우리를 맞이해주었다.
거기에 사람 수도 여기가 훨씬 더 많은 것 같다.
이대로 다니면 공주님과 갈려버릴 것 같은데.
"사람이 많으니까 손이라도 잡을까요?"
"소, 손이요?"
"네. 그냥 다니면 잃어버릴 수 있으니까요."
손잡는건 너무 불경한가, 라는 생각을 하는데.
아셰리아 공주가 쭈뼛거리면서 손을 내밀었다.
그런 아셰리아 공주의 모습을 보면서 지금까지 그녀의 삶을 생각해보니… 손 잡는 행위 자체가 어색할 수 있겠구나 싶다.
"이제는 서로 안 잃어버리겠네요."
새삼 아셰리아 공주는 손도 작은 게 느껴졌다.
손을 맞잡기는 했는데, 맞잡은 손 밖으로 내 새끼 손가락이 삐죽하고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이 거리에서 악세사리를 파는 곳이… 저기려나. 일단 같이 가봅시다."
"네."
남들이 보기에 삼촌과 조카. 그 정도가 아닐까.
삼촌이라 하면 내 나이가 너무 많아 보이는데.
그냥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오누이라고 하자.
손을 맞잡은 우리가 찾아온 악세사리 숍.
가게 앞 유리장에는 작은 인형들과 함께 여러 모양의 악세사리들이 대량으로 진열되어 있었다.
그나저나.
"이거 난처하게 되었네요."
"……."
위치가 거리 초입이었던 것은 좋은데…
점내는 사람들로 가득해 발디딜 틈도 없다.
손님도 정말 여자밖에 없어서, 남자인 내가 들어가는 순간 분위기가 싸해지면서 성추행범으로 몰릴 것이다.
"아셰라, 다음에 오는 게 나은 거 같은데요?"
아셰리아 공주는 대답도 하지 않고 점내를 멍하니 보고 있더니, 나와 잡은 손을 풀고 들어가려 했다.
"저렇게 사람이 많은데, 작은 몸으로 들어갔다가 밀쳐지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요."
말씀 드리는 순간, 애써 끼어들어 상품을 고르려던 손님 하나가 다른 손님에게 가격당해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이 보인다.
무슨 전쟁터인가…
아니, 전쟁터가 맞다.
점내에는 10대 후반에서 20대의 여성들이 많았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키가 아셰리아 공주와는 머리 하나 반 정도는 차이나는 상황. 들어가면 안좋은 꼴이 날 게 분명하다.
"그래도…"
"안 됩니다. 조금 기다렸다가 사도록 해요."
내 말에 나를 올려다보는 아셰리아 공주.
그 눈에는 습기가 조금씩 차고 있다.
은방울꽃 장식이 그렇게 중요할까.
원래대로라면 이렇게 무턱대고 행동하지는 않을 아셰리아 공주다.
난처하네.
"아니면 다른 곳이라도 찾아볼까요? 여기가 거리 초입이라서 붐비는 걸수도 있잖아요."
공주는 내 말에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아카데미에 젊은 학생들이 많이 다니니까, 악세사리 상점도 더 있을거에요."
"네…"
왕궁에서 막 나왔을 때에 비해 공주님의 발걸음은 눈에 보일 정도로 힘이 빠졌다.
게임에서 악세사리 상점이라도 들릴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그런 기능은 없었다.
내가 아는 정보 중에 에코니아에 와서 써먹은 게 무엇이 있는가. 그런 생각을 해보니…
… 별로 없는 것 같다.
정말 도움이 안되는 게임이다.
* * *
이후 시하와 아셰리아는 손을 맞잡은 채, 아카데미 거리의 악세사리 숍을 찾아 돌아다녔다.
하지만…
"죄송합니다. 어제 전부 매진되었습니다."
"저희는 은방울꽃 장식은 취급을 안해요."
"거리 입구에 있는 가게에 가보셨나요?"
아셰리아가 찾는 장식은 전부 매진된 상황.
그렇게 결국 아카데미 거리 입구로 돌아왔지만, 이번에는 가게 문이 닫혀 있었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셰리아 공주와 시하가 거리에 도착했던 시간은 5시. 반면 대부분의 커플들이 은방울꽃 장식을 선물하는 시간은 7시부터이다.
충동적으로 결심을 한 사람이나,
바로 직전까지 고민하던 사람이나,
한번 찔러나 보자는 심산인 사람이나,
축제란 포장지에 마음을 감추려는 사람까지.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급하게 악세사리를 사기 위해서 모여든 시간이 5시일 뿐이다.
물론 아셰리아 공주는 며칠 전부터 고민해왔던 일이지만, 다른 이들은 이를 신경쓰지 않는다.
"아셰라. 원하시는 형태를 말씀해주시면, 제가 다음에 여기 와서 사다 드릴게요."
이시하는 아세리아를 달래보려고 말을 해보았지만, 여전히 그녀의 기분은 좋아지지 않았다.
건국제 당일 저녁이 아니면, 은방울꽃 장식을 전해주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들었으니까.
거기에 선생님을 하루종일 고생시키는 것만 같아, 마음속으론 또다시 죄책감이 올라온다.
어느새 시간은 6시.
늦가을의 해는 이미 사라진 시간.
아셰리아 공주는 자신도 모르게 말을 흘렸다.
"선생님과 장식을 나눠가지고 싶었는데…"
"아…"
이제야 은방울꽃 장식의 의미를 알아버린 시하.
'내가 억지로라도 들어가서 사야했나…'
뒤늦게 후회하지만, 이미 상점은 닫혀있다.
아셰리아는 자신이 흘린 말에 당황하는 선생님을 보고 마음이 더 옥죄어 오고 있고.
이시하는 어떻게 해야 아셰리아 공주의 마음을 풀어줄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되었다.
그렇게 잠시간의 공백이 생겼다.
"죄송해요, 선생님."
자신의 직위로 인해 다른 이들처럼 은방울꽃 장식을 미리 사두지 못했다. 하지만 다른 이들에게 부탁하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이 직접 고르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런 욕심을 가졌다는 사실이, 자신의 선생님께 너무나 죄송스러웠다.
"선생님도 축제 때 가고 싶으셨던 곳이 있었을텐데… 저 때문에 시간만 낭비하게 되어서…"
"아셰라가 사과할 일이 아닌걸요."
시하는 자연스레 생각하게 되었다.
가고 싶었던 곳이라.
가고 싶었던 곳은 없었다.
그래도 자주 가던 곳은 있었다.
게임 속에서, 일지라도 말이다.
"그럼, 제가 자주 가던 곳에 함께 가실래요? 지금 가면 시간은 딱 맞을 거에요."
"네?"
"조금 서둘러야 해요. 곧 시작하거든요."
"네…"
시하에게 있어, 에코니아 아포칼립스의 배경이 되는 이 세상은, 정말이지 부조리한 것이었다.
이상할정도로 순수하고 착한 게임 속 인간들,
그들을 불행에 빠뜨리려 존재하는 듯한 전개,
선택받은 자들을 제외하면 불행해지는 운명,
선택을 받을 경우의 수마저 없던 자신이 동경.
세상에 지는듯한 기분이 들어왔기에, 자신은 포기하지 않았었다. 그래도 답답할 때는 있었다.
그럴때마다 그는 세이브 파일을 켰었다.
왕도 중앙 거리와 아카데미 거리.
그 사이에 위치하는 사분면.
그 위에 위치하는 언덕.
그 언덕 위에 해방자의 저택.
그 저택 앞에는 작은 벤치가 있다.
시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아셰리아를 데리고, 자신이 생각해낸 그곳에 향했다.
"와아…"
아셰리아는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자아냈다.
"참 경치가 좋죠?"
"네에…"
아파트로 치면 5층도 안되는 언덕의 고도.
그 위에서 내려다보는 왕도는 거리마다 다른 느낌으로 빛나는 등불이 걸려 있었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왕궁에서 시작하여 중앙 거리를 통해, 남문까지 향하는 새하얀 등.
아카데미에서 출발하여 왕도의 동서를 가르는 거리를 통해, 서문까지 향하는 형형색색의 등.
이 경치를 보여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시하는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 경치가 전부는 아니었다.
이윽고 7시가 되어,
왕도 중앙에서 하늘로 불꽃이 쏘아진다.
왕도의 옆에서 에우데미아를 수호한다는 황룡.
황룡 이외에도 존재하는 여러 신수들.
이시하의 왼팔에 존재하는 불꽃 늑대의 문양.
불꽃은 시시각각 모습을 바꾸었다.
"올해 축제는 이걸로 마무리하죠."
아셰리아는 시하의 옆 얼굴을 보게 되었다.
"내년에는 은방울꽃 장식을 나누어 갖고."
"공주님께서 자라나면 정원에서 춤도 추고."
"앞으로도 할 건 많네요."
이시하의 말에 아셰리아는, 자신이 장식을 선물하려고 했던 본래의 이유를 다시금 떠올렸다.
오랫동안 함께.
"선생님, 내년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저도 잘 부탁드려요."
두 사람이 말을 주고 받는 순간에.
불꽃은 마지막 형태로 변했다.
옛날, 아레트가 성녀에게 선물했다던 은방울꽃.
아셰리아가 오늘 선물하려던 그 꽃이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