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 29. 아일라.
* * *
29. 아일라.
나는 또다시 공중에 떠 있었다.
나는 또다시 나를 보고 있다.
하지만 이번 꿈은 시장이 아니다.
굳게 닫힌 방문 뒤에 웅크린 소년.
무표정한 얼굴로 바닥을 멍하니 보고있다.
방문 너머로는 어김없이 그 소리가 들려온다.
욕이 섞인 고함소리.
유리가 깨지는 소리.
무언가 던지는 소리.
그 소리들이 섞인채 귓가에 메아리친다.
소년은…
귀를 틀어막고 무릎사이에 고개를 떨군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그 소리들은 끊임없이 그를 괴롭힌다.
잠시간의 시간이 지나고…
소년은 평소와는 다르게 문을 열고 나갔다.
거실을 보니…
의자의 나무 파편이 부서진 채 비산하며.
초록색 유리병이 깨진 조각들이 흩어져있다.
그리고 두 명의 인영이 보인다.
여자는 벽에 몰린 채 앉아있고.
서있는 남자는 여자를 몰아붙인다.
나는...
이런 흔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자라났다.
그렇다. 흔한 일이다.
하지만 그만보고 싶다.
어느 순간부터 꾸지 않던 꿈이다.
나는 왜 또 이 모습을 봐야하는 걸까.
마찬가지로 나와 같은 광경을 보던 소년은…
결심을 한 듯,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어딘가로 향하기 시작했다.
… 더는 보기 싫다.
이걸 더 보면 안된다.
내게 좋을 게 없다.
이 꿈에서 깨어날 방법은 없을까
……
순간.
맑고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 * *
"허억… 허억…"
있는 힘껏 전신을 일으키고 숨을 몰아쉬었다.
"후우… 하아… 후우…"
나는 온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진짜… 족같은 꿈이네…."
나는 침대에 앉은채로 고개를 숙였다.
정말이지 기억하기 싫은 꿈이었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 깨어난거지.
그 생각에 주변을 두리번거리게 되었다.
"아…"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방 입구에 놓아뒀던 엔크라테아가 내 침대 왼편에 와있었다.
저택 지하에 박혀있던 검이 뽑혀져 나왔을 때를 제외하면, 제 멋대로 움직인 건 처음이다.
땀에 젖은 손을 이불에 슥슥 닦고, 엔크라테아의 검집을 잡고 들어올렸다.
다른 손으로 검 손잡이를 잡으니, 방금 느꼈던 시원한 느낌이 올라온다.
"너 덕분에 깼다…"
자아가 있는 검, 그런 걸까.
약간 무섭긴 하다.
창작물 속에서 그런 검들은 마검이 많고, 대부분 사용자가 먹히는 엔딩이 대부분이지 않은가.
생각해보면, 어제 감옥에서 나도 모르게 엔크라테아를 뽑아 휘둘렀었다. 그때도 그 더러운 쓰레기들을 보고 열이 받아있었는데, 엔크라테아를 휘두른 뒤로는 평정심을 되찾았다.
정말 무의식적으로 휘두른 결과였다. 나도 모르게 엔크라테아를 뽑고, 거기에 마력을 주입한 뒤 휘둘렀었다. 내가 검을 휘둘렀다는 사실도 한참 뒤에야 깨달았다.
…
나는 점점 이 검에 조련이라도 당하는 걸까.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보면…
게임 속 엔크라테아는 기본 스탯으로 이성 수치가 적지 않게 붙은데다, 부가 옵션으로는 착용자의 이성 수치를 두 배로 곱해주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전에 분수 앞 사전조사를 갔을 때 헤르만이 했었던 말이 있다. 일반적으로 자연 마력 적성과 심상 마력 잠재력은 반비례한다고 했었지.
자연 마력은 게임 속에서도 이성수치와 관련이 깊었고… 심상 마력은 문자의 의미대로 마음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 그렇다면 내 마음 속이 답답해질 때마다 엔크라테아의 이성 수치 버프가 마음을 억눌러 주기라도 했다는 것일까.
이렇게 생각하면 엔크라테아에게 고맙다.
덕분에 개같은 꿈에서 깨어난 거니까.
"여러모로 찝찝하네…"
엔크라테아로 인해 내 머릿속도 찝찝한 와중에, 악몽 탓으로 전신에 흐른 땀이 끈적끈적하게 옷에 달라붙었다.
다시 자기는 그른 것 같다.
지금은 몇 시 일까.
침대 옆 창문을 통해 밖을 보니…
아직 고요한 새벽이었다.
그리고 새삼 해방자의 저택임을 깨달았다.
창문 밖 풍경이 꽤나 괜찮았기 때문이다.
"그러고보니 손님들도 있지…"
아래층에는 아모스와 아일라, 위층에는 헤르만과 요나가 각자 방 하나씩 차지하고 있다.
아일라는 어제 출소시킨 빛바랜 금발 여자다. 게임의 빈민가 루트 에필로그에서 아모스가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 아모스에게 있어서는 꽤나 중요한 인물이다.
둘은 저번에 비실이 놈과 같이 수금을 다니고 있었으니… 시간대 상으로 의심되는 일이 있다. 오늘은 여러 곳에 들려야겠구만.
그나저나 프로네시스 가문의 덕분에 손님맞을 준비는 되어있던 게 다행이었다. 프로네시스 가문의 시종들이 내가 이사오기 전에 가구를 전부 채워주고 청소까지 끝마쳐 줬었기 때문이다.
사실 해방자의 저택을 처음 방문한 날, 가구를 고르려고 상점가에 갔었는데…
'형님, 공작이라는 자각은 있으시죠? 가구 고르는 센스가 귀족 기준으로는 파멸적이신데요.'
'프로네시스에서 침대같은 생활가구는 다 들여놓을게요. 비용으로 금화나 몇 장 주세요…'
헤르만과 한나의 이중 폭격을 맞아버리고, 가구들은 대리 구매를 부탁했었다.
나는 나름 집에 어울릴만한 디자인으로 골랐는데, 귀족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결재를 거절당하다니… 나는 아직 귀족은 아닌가 보다.
손님들의 아침 식사는 준비되어 있지 않으니… 가볍게 장이나 봐올까.
어차피 자기는 글렀다.
최대한 조심조심 나갔다가 들어오자.
.
1층으로 살금살금 내려와 욕실으로 가고 있는데… 아모스의 방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괜찮으니까. 아모스 너라도 도망쳐… 저 사람이 우리에게 뭘 할 지 모르잖아."
"……. 함께가 아니면 안 가요, 누님."
"하아… 내가 너랑 같이 가보았자, 네 발목만 붙잡을 거라는 건 잘 알고 있잖아."
"그럼 내가 남을테니, 누님이 도망치쇼. 내가 잠시라도 시간은 벌 수 있겠지."
… 티오리아 가문의 장남께서 이 집에서 머무르고 계신데, 저렇게 목소리를 낮춰 도주 계획을 짜도 다 들키지 않을까. 아마 헤르만 녀석은 내가 일어난 것도 알 것이다.
거기다 내가 알기로, 지금은 아모스 녀석이 강해지기로 마음먹은 시간대가 아니다.
저 녀석은 나중가서 자신만의 마력을 개화하게 되는데, 그건 2년 뒤 일어나야 했던 사건이 계기다.
물론 나때문에 그럴 일은 없게 되었지만.
"누님. 거기다 저 사람들, 꽤나 높은 귀족 같았어요. 죽일거면 우릴 꺼내지도 않았겠지."
"그래도 목적을 모르잖아."
역시나 아일라는… 아모스 하나만 걱정하는군. 저 사람은 저런 여자일거라 생각했었다. 그래서 아모스와 함께 빼온 거고.
"더 길어봐야 들킬거야. 내 방으로 돌아갈게."
"예."
아.
문이 열리고.
숨지 못한 나와
아일라의 눈이 마주쳤다.
아일라는 그 자리에서 굳은 상황.
"쉬잇"
나는 검지를 입에 대며 제스쳐를 취하니…
다행히도 아일라는 문을 닫고 조용히 나왔다.
그런데…
어떡하냐….
* * *
"주인장. 살라미 햄과 달걀, 지금 있나?"
"예, 오늘은 싱싱합니다."
"5인분, 들고가게 포장도 좀 해줘."
"예, 나으리.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요즘은 평민 상대로 말을 낮춰하는 걸 연습하는 중이다.
내가 말을 낮추지 않고 존대를 해버리면, 자신들이 무언가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줄 알고 위축되어 버렸기에 어쩔 수 없다.
무언가 이 사람은 귀족이다, 하는 촉이라도 있는 걸까. 지금도 역시 가벼운 옷차림인데도 재질만 보고 나으리라는 소리를 듣고 있으니…
"그래서, 저희를 어떻게 하실건가요?"
옆에서 아일라가 물었다.
결국, 그녀를 데리고 장을 보게 되었다.
그대로 방에 보내봐야 좋을 게 없었다.
대화라도 해둬야 할 것 같았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
"아모스는 살려주세요. 착한 아이에요."
거리에서 살리네 뭐네 하는 소리를…
이러면 악덕 귀족으로 오해받는다고.
"죽일 생각 없어. 말했잖아. 너희에게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다고."
"… 나쁜 일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거에요."
역시나 나에 대한 인식이 나쁘다.
귀족에 대한 인식일수도 있겠지.
그런데 말이지, 아일라.
너는 아모스에게 충분히 나쁜 짓을 했잖아.
"너. 아모스에게 숨기는 게 있지."
"… 무슨 말씀이시죠."
"아모스 그 녀석이 사실을 알면 어떻게 될까."
"……."
"너가 한 짓은 배신이나 마찬가지야."
"다 아는 척 입을 놀리지 마요…"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가게 주인이 내가 주문한 물건들을 종이 봉투에 넣어서 건내주었다.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마워."
"또 찾아주십쇼."
주인장은 꾸벅, 하고 인사를 했다.
다음은 빵집이다.
다섯 명 분이라 종이 봉투가 꽤 크네.
여러모로 아일라를 데리고 나오기를 잘했다.
"너에게 선택지가 없었다는 건 인정할게. 너도 나쁜 뜻은 없었을 거고, 아모스 녀석을 어떻게 해서든지 살리고 싶었겠지."
"……."
"하지만, 결말은 좋지 않았을거야."
"그걸 어떻게 아는건데요."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아일라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그 루트대로라면, 너가 원하는 것 하나는 이루어진다. 아모스는 삶의 의지를 갖게 돼. 하지만 그 방향성만큼은 너가 바라는 모습이 아니야."
"뜬구름 잡는 소리 하지마요."
아일라는 내 눈을 피했다.
"아일라, 너는 분명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해서 벌인 일이겠지. 곧장 죽어가려는 그 녀석을 조금이라도 살수 있도록 하는 유일한 선택지. 그것이 너가 선택한 길이야."
내 말에 아일라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크게 벌어진 눈꺼풀.
흰자위가 크게 보이는 눈동자.
약간 긴장이 풀어진 턱.
긴장된 눈꺼풀.
이내 내려가는 눈썹.
큰 놀라옴, 약간의 두려움. 그리고 화.
"너의 선택은 이해한다. 하지만 공감은 못해."
미안하지만, 내가 원래 공감능력이 없다.
… 사실 있었어도 아일라의 선택만큼은 공감하지 못했을 것이다.
"……."
"분명 아모스는 착한 녀석이야. 하지만 그 녀석이 네 생각만큼 순진한 녀석은 아니야. 거기다 사람은… 착할수록 물들기도 쉬워."
"본 것도 아니면서 어떻게 알아요…"
"충분히 봤어."
"…?"
5년.
5년을 봐왔다.
수만번 깨져가면서 봤다.
그렇기에 알고 있는 것이다.
특히나 아모스 녀석은… 나와 일정 부분은 닮은 부분이 있다. 그 작은 부분을 빼고 보면 전혀 닮지 않은 사람이지만 말이다.
나는 빵집을 향해 걸으며 말했다.
"너가 살아야, 아모스는 올바른 삶의 의지를 가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널 감옥에서 꺼낸거야. 나는 너가 잘나서 꺼낸 게 아니라고."
아일라는 그런 나를 뒤따라오면서 잠자코 듣고만 있다.
"이왕 이렇게 된거, 최대한 오래 살아. 너희는 가족이나 마찬가지잖아."
이들은 정말이지 올바른 가족이다.
너무나 눈부셔서 볼 수 없을 정도로.
"그 착해빠진 놈이 꿈을 꾸게 하는 역할은 내 역할이야. 그 이후로는 너가 옆에서 직접 도와."
아모스가 꿈을 꾸게 되는 계기.
그것은 정말이지 나와 비슷하다.
"넌 절대로 그녀석보다 먼저 죽을 생각 하지마. 거기에, 절대로 너 자신을 그딴식으로 쓰지마. 너는 이미 그 녀석에게 죄를 한번 지은거야."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