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 〉 214. 원칙을 어겨야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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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 원칙을 어겨야 할 때.
시하의 수업 마지막 날.
며칠간 보이지 않던 헤르만도 참가했다.
그래도 오전까지는 평소와 같은 수업이었다.
하지만 오후가 되었고…
아모스는 이 상황이 너무나 원망스럽다.
여봐라, 네 놈들의 후원인이 되어주실 올리버 테오도시아 님이시다.
자신은 달려나갈 수 없는 지금.
저런 말을 듣고만 있어야한다니.
"아모스, 집중."
은인이 저 사람들을 도와주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상황이 이상하다.
지금 저 소리를 자신만이 듣고 있는 듯한 느낌은 그저 기분 탓일까. 그저 모르는 척을 한다기엔… 나머지 사람들의 반응이 너무 없었다.
너희는 일정 기간마다 상납을 바치면 된다.
그 와중에.
밖에 있는 귀족놈은 슬럼가 폭력조직의 인간들이나 말할 것을 당당하게 말하고 있다.
점주는 저항할 기색조차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외면할 수밖에 없다.
최대한 '수업'에 집중하는 게 최선이었다.
집중하지 않으면 아일라가 죽으니까.
그저 읽으라는 것을 읽을 수밖에 없다.
여기저기 단어들에 밑줄이 쳐져 있는 교재.
「에퀼리아의 최고 가치는 자유와 평등.자유는 곧 해방이며, 다른 사람이나 환경에억압받지 않을 권리이다.평등은 곧 존엄이며, 누구나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권리를 뜻한다.」
지난 사흘간 읽고 있는 것은 똑같다.
그 의미는 모른다.
자신이 이해한 수준에서 생각해볼 뿐이다.
「허나, 이 둘은 서로 상반된 가치이다. 자신 사람다운 삶을 위해, 타인을억압하는 상황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억압받지 않기 위해, 타인의 사람다운 삶을 빼앗을 수도 있다.」
억압.
무식한 자신은 정확한 뜻은 모른다.
하지만 두 가지는 알 수 있다.
내가 슬럼가에서 당해온 것이며,
저 귀족은 점주를 억압하고 있다.
「그렇기에 에퀼리아 연방국의 초대 수상은.다른 사람의 자유와 평등 역시 존중하는 것을 모든 연방 참여국의 미덕으로 권했다.」
다른 사람. 존중.
저 귀족은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있는가.
그런 것 같지 않았다.
「허나 미덕에는 강제력이 없었다. 그렇기에 초대 수상은 에퀼리아 연방국을 구성하는 모든 종족이준수할 원칙을 만들고…」
원칙.
자신을 얽메이고 있는 것이다.
수업 중에 멋대로 행동하지 않는 것.
「모든 이들과 며칠 밤낮을 토의해가며, 이를 어긴 자에게 내릴벌을 정했다.」
벌.
자신에게 오는 벌은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일라 누님에게 그 벌이 간다면…
「원칙을 지키기만 한다면, 에퀼리아는 국민의 종족과 상관 없이최소한의 삶을 보장한다.」
삶.
지금의 그와 아일라는 편히 자고, 걱정없이 먹고, 입을 것이 있는 과분한 삶을 살고 있다.
간단한 원칙을 한 달만 지키면…
지금의 생활을 끝까지 유지할 수 있다.
「허나 원칙을 어긴 범법자는 형벌을 받게 된다.원칙을 어긴 당사자는 '자유로울 권리'와 '인간적인 삶을 살 권리'를 빼앗기게 된다.」
….
잠시동안 그는 생각에 잠겼다.
자리를 일어난 아모스는 시하 앞에 섰다.
이내 그는 머리를 숙였다.
"… 뭐하는 거야."
"원칙을 어기겠소."
"……."
"원칙을 어기는 당사자는 나요, 누님께 해가 없도록 해주시오. 벌은 받겠소. 다녀오게 해주시오."
지금까지 읽고 있던 것은 에퀼리아 연방국의 건국 이념. 에우데미아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아모스는 그런 복잡한 것은 모른다.
자신이 본 단어 몇 가지를 생각했을 뿐이다.
이시하는 그런 아모스를 유심히 지켜보다…
"왜 허락을 받는거야."
"하지만 원칙이…"
"원칙을 깨야할 때도 있는 법이야. 너가 원칙을 깨는 이유가 합당하다면, 나는 허용할 수 있어."
이렇게 쉽게 허락해준다니.
"넌 노예가 아냐."
아모스는 순간 망연해졌다.
"어서 다녀와."
이내 상황이 긴박함을 떠올리고,
밖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아모스."
"예?"
"옷 튼튼한거다. 저건 가짜 귀족이고."
소매자락을 톡톡 치면서 말하는 시하.
"예…"
아모스는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을 응원하는 듯한 착각은 들었다.
* * *
"헤르만, 이제 소리는 그만 차단시켜도 돼."
"후우…"
"일 아직 안 끝났어. 근처에서 구경하다가 아모스가 다칠 것 같으면 바로 끼어들어 줘."
"에휴…"
예상대로 그 쓰레기는 미끼를 물었다.
내가 이 카페와 계약한 기한은 일주일. 오늘로서 계약 마지막 날이다. 헤르만에게 준 기한도 어제까지였으니, 오늘이면 올 것이라 생각했다.
올리버 테오도시아.
헤르만의 정보를 받아보고 감탄이 나왔다.
자신을 공경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영지민에게 검을 휘두른 자작가의 차남. 그로 인해 가주 후보에서 탈락. 쫓기듯 왕도로 도망친 쓰레기.
영지에서의 만행은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운 수준. 고작 이 정도로 설명이 되지 않을 정도다.
귀족으로서 썩어빠진 허영심만 넘치고, 능력은 쥐뿔에도 없는. 에우데미아 왕국의 암덩어리.
그 쓰레기의 자금 사정… 그의 아버지인 테오도시아 영주가 관계를 끊으며 내던져준 대금화 한 장이 전재산일 것이다. 그것마저 없어진다면 왕도에서 살 수 조차 없겠지.
그런 놈은, 제과점 앞에서 행패를 부리고 있다.
후원. 원래라면 귀족이 자신의 마음에 든 가게를 일방적으로 돕는 게 정상이다. 업주는 그에 보답으로, 자신들의 신상품을 후원자에게 가장 먼저 선사하는 것이 관례라면 관례이다.
르네상스 시기, 돈 많은 부자가 돈 없는 예술가를 지원하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 볼 수 있다.
조금이라도 귀족의 의무를 지키려고 노력하던 자라면, 저런 간단한 내용쯤은 숙지했을 터.
그런 후원을 상납이란 형식으로 포장하여 알려주니, 자신 편한대로 믿는 게 쓰레기다웠다.
"교사님, 이게 무슨 일입니까!"
요나는 나에게 다급히 물었다.
창가가 아니었던 요나는 몰랐던 게 당연하다.
"제과점에 쓰레기 한 마리가 꼬였네요. 아모스는 그저 점주와 그의 딸을 구하러 간거고요."
"……."
요나는 상황을 유심히 지켜본다.
점주 앞에 선 아모스.
몇 마디 실랑이 끝에 올리버는 검을 뽑았다.
그래도 헤르만이 근처에 있으니 괜찮겠지…
아모스의 대처는 빨랐다.
왼 소매로 검을 흘리고, 한 손으로 클린 히트.
올리버는 땅바닥에 추하게 쓰러진 채로…
"가… 감히 귀족인 나를!"
검을 휘두른 것도 모자라,
아직도 착각을…
왜 이렇게 에코니아에는 쓰레기가 많을까.
… 답답하다.
왼손을 엔크라테아에 걸치니…
마음 속은 다시금 시원해졌다.
"올리버 테오도시아."
나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쓰레기는 테라스를 올려보고 굳어버렸다.
자신을 엿먹인 가정교사와 차기 사법부장으로 조명되고 있는 요나스트롱 아모스가 있으니까.
당연한 일이다.
"태만을 저지른 죄로 가문에 의절당해놓고도… 귀족이라니. 거기다 왕도민을 무력으로 겁박한 죄, 왕국법에 따라 죽어도 모자라다."
멀리서 신고를 받은 왕도 치안본부 대원들이 근육질 몸매를 뽐내면서 달려오고 있었다.
"정말이지… 나태하고, 교만해. 태어난 뒤로 귀족의 의무를 하나라도 지킨 적은 있나? 네 놈이 만약 처벌받고도 멀쩡하게 나온다면… 각오해."
아셰리아 공주를 이용하던 쓰레기 자식.
이 세상의 저런 요소 하나하나가 아셰리아 공주의 미래를 하나씩 지워나갔을 것이다.
앞으로도 저런 쓰레기는 쳐내야한다.
나는 용납할 수 없다.
내 말이 끝나자 치안대가 도착했다.
망연자실한 올리버가 연행되어 떠나자…
점주의 딸이 아모스에게 달려갔다.
"교사님, 그의 행동이… 틀렸다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 인정하겠습니다. 그는 선합니다."
그 모습을 보던 요나가 말했다.
"하지만 이게… 당신이 보여주려던 것입니까? 고작 이 정도로 제 신념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래, 피상적으로는 이해되지 않겠지.
요나에게 아모스는, 고작 수업동안 지키도록 정한 작은 원칙을 어긴 것만으로 보일 거다.
저들을 구해낸 것도 당연한 일 중 하나겠지.
원칙에 갇혀 살기에, 크게 보지 못하는 것이다.
"요나, 아모스의 각오를 겨우 그 정도로 보신다면 큰 착각입니다. 그는 방금 무엇을 걸었을까요. 그는 나가기 전에 무슨 말을 했었죠?"
"……."
"천장 달린 집과 아늑한 침대, 평범하게 보일 수 있는 의복, 풍족한 먹을 것, 약속된 거금."
요나는 방금 전 상황을 떠올리는 듯 하다.
"그에게 있어서는 전혀 경험해보지 못했던 일주일이였어요. 거기다 하나를 더 걸었죠."
결국 아모스의 마지막 말을 떠올리게 되겠지…
"그 하나가 무엇일까요."
이내 요나는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아일라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정작 그 아일라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시선만 돌리고 있다.
"설마…"
"자신의 하나뿐인 가족의 안위."
선한 사람들이 원칙을 어기는 이유.
그걸 알려준다고 했었지.
"제가 선한 사람들이 원칙을 어기는 순간을 가르쳐드린다고 했었죠? 당신마저 아모스를 선하다고 했고, 녀석은 삶이 걸린 원칙을 넘었어요."
요나는 아모스를 망연히 쳐다보고 있다.
"요나, 당신 눈앞의 이 상황이네요."
아모스의 다리에는 점주의 딸이 매달려 울고 있고, 점주 역시 감사함을 표하고 있었다.
"교사님, 원칙을 어겨야 할 때는 무엇입니까?"
나를 향해 돌아본 요나의얼굴에는 긴장과 다짐이 깃들어있다.
음…
"선한 사람이 원칙을 넘을 때…"
약간 짖궂은 생각이 들었다.
"그건 말이죠…"
사람을 열받게 하는 방법 중 하나.
"말 안할래요."
그것은 말을 하다 끊는 것이다.
"예?"
긴장감 넘치던 요나의 표정은 망가져버렸다.
"방금 상황. 요나가 감을 못 잡고 있으시길래 가르쳐 드렸잖아요? 그걸로 대신하죠."
"아니… 말씀이 다르지 않습니까?"
내가 웃는 얼굴로 말하자, 요나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다.
하지만 이게 맞다고 생각한다.
본인이 스스로 사유해보는 것.
그건 정말이지 소중한 경험이다.
그걸 빼앗을 수는 없는 법이다.
"사법부장님께서도 이걸 바라셨을거에요."
"… 조부님께서요?"
내가 대답없이 거리를 바라보자, 요나는 착잡한 얼굴을 한 채로 거리를 바라보았다.
거리에는 멋들어지는 슈트를 빼입고, 간지나는 선글라스를 낀 듬직한 영웅이 있었다. 그는 주변 구경꾼들의 선물 세례를 받고 있었다.
그나저나 정말이지 아이러니하구만.
원래라면 아모스를 죽이게 될 요나가…
아모스를 통해 생각할 계기를 얻게 된다니.
정말 사람 일은 아무도 모른다.
* * *
조금의 시간이 지나고,
아모스와 헤르만이 돌아왔다.
아모스는 종이봉투를 잔뜩 들고 있다.
녀석은 카페 한 켠에 들고온 것을 전부 내려놓은 뒤, 우리가 앉아 있던 테라스석 근처로 와 쭈뼛쭈뼛 서있게 되었다.
"아모스, 잘했어."
"예?"
"언제나 사람들이 두려워하던 너가, 다른 사람들을 구하게 되었구나. 지금 기분은 어때?"
아모스가 한 일은 작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마음 속의 더 큰 선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이다.
역사 속의 위인들이나 할 일이다.
"그게… 모르겠소. 이게 무슨 느낌인지…"
원래 역사에서도 아이들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온갖 더러운 짓을 해가며 간부직에 오르는 아모스다. 그 와중에도 사람을 죽이진 않았지.
… 올릴 수 있는 모든 것을 저울에 올리려하던 나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던 사람이었다.
"만족은 하고 있어?"
선글라스에 가려져 눈을 볼 수는 없다.
안면 근육의 수축과 경련.
곧, 애써 억누르고 있는 감정.
내 물음에 아모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저울질하고 있다.
아모스는 분명 서서히 중독될 것이다.
소녀의 순수한 미소.
다른 사람들의 환호.
사람을 구해냈다는 성취감이라는 것에.
"아모스, 너에게 부탁할 일이 있었다고 했지?"
"… 그렇소."
아니, 지금도 이미 중독되기 시작했을 거다.
그렇기에 지금 말해야만 한다.
지금 말하는 것이 제일 합리적이다.
"그걸 말하기 전에, 사과해야할 것이 있어."
"사과…라니?"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 않는다해도 괜찮다.
이미 녀석은 평생, 남을 위해 살아갈 운명이다.
"너에게 거짓말을 여러가지 했거든."
나를 도와준다면 좋겠지만, 만족할 수 있다.
애초에 시키려던 일이 그것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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