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 218. 부정맥이 아닐까요?
* * *
알렉산더의 첫 만남 이야기가 끝나고.
"나는 평소에 백성들을 위한다면서 그들의 삶을 전혀 몰랐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그녀와의 약속을 지킬 겸, 매일 외출을 나가 거리를 돌아다녔지. 여기까진 괜찮았어."
여기까지.
그 단어에 아셰리아가 물었다.
"그 후로 무슨 문제라도 생기신 건가요?"
"음. 이게 문제라고 해야할지는 모르겠다만..."
알렉산더는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어느 순간부터 나도 모르게. 내가 그녀의 표정을 신경쓰게 되었어. 나와 얼굴을 마주하고 있거나, 대화를 한다거나 할 때는 항상 웃는 얼굴이었지. 저번 주까지는 문제가 없었어."
"그런데 건국제 이후로... 어두운 표정을 가끔 짓는다. 나는 그녀가 그런 표정을 짓는 이유를 잘 모르겠어서 말이다. 거기에..."
알렉산더의 표정은 급격히 어두워졌다.
"이제는 외출하는 빈도를 줄이는 게 낫지 않냐는 통보까지 받아버렸어…"
"음…"
자신의 오라버니가 무의식중에 실례라도 저지른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는 아셰리아였다.
하지만 12살의 생일을 지난지 2년이 되어가는 알렉산더였다. 지금까지 아셰리아가 들은 바로, 사교계에서 자신의 오라버니는 꽤나 매너가 좋기로 유명한 편이었다. 적어도 타인에게 실례가 되는 일은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왕족으로서 사교계 데뷔를 위한 교육을 어린 시절부터 받아온 알렉산더였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겠지.
"들은 것만 가지고는 저도 잘 모르겠네요. 혹시 슬럼가에 있는데 귀족과 함께 다닌다는 이유로 해코지를 당하셨다거나…"
"내가 그 일을 염려하여 경비병들에게 그녀의 집을 살펴보아달라고 부탁했어. 그렇기에 너가 염려하는 일은 없었을거야."
그 부탁은 알렉산더가 왕궁으로 돌아온 직후 한 일이었다. 당번이 아닌 경비병들에게 보상으로 인당 은화 한 장씩을 보수로 약속하고, 혜윤의 집을 멀찍이서 지켜달라는 부탁을 했었다.
경비병들의 입장에서 이런 간단한 일을 하는 대가로 일당보다 더 큰 돈을 받는 일이었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 일도 아니라면…. 저희가 왕족이기에 모르는 부분이 있는 건 아닐까요?"
그렇게 말하는 아셰리아는 자연스럽게 시녀, 세라와 리사를 바라보게 되었다. 알렉산더의 시선 역시 아셰리아를 따라 그들에게 도착했다.
"혹시 평민 출신의 시녀분들이신가?"
"그렇습니다, 오라버니. 저도 이따금씩 이분들께 거리의 풍습이나 상식을 전해듣고 있어요."
"그럼 그대들에게 의견을 구해도 되겠는가?"
왕자의 풋풋한 연애담을 듣다 이런 봉변을 당한다니. 갑작스러운 알렉산더의 요청에 세라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말했다.
"감히 저희가 말씀을 드려도 되는건가요…"
"내가 그대에게 부탁해야하는 상황이다. 가감없이 말해도 된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어떤 상황에서 그런 표정을 짓는지 저희는 모르니까요."
"아. 그럼 그 상황을 말해주겠네."
내심 듣기만 하고 싶었던 시녀들이었지만... 더 깊은 곳까지 끌려들어가게 생겼다.
* * *
첫 날처럼 식사를 함께 하기도 하고.
귀족의 드레스까지는 아니더라도. 만듬새는 좋은 원피스를 선물하러 가기도 하고.
친해진 경비병들에게 들은 소식을 토대로, 거리에 유행하는 공연을 함께 보러가기도 하고.
알렉산더와 혜윤은 첫 대면 이후 한 달간 거리를 함께 돌아다니게 되었다.
그 동안 감히 말로는 정의하지 못할 감정이 서로에게 쌓였음은 당연한 일이다.
시간은 흘러 건국제 당일.
알렉산더는 17세의 성인은 아니기에, 축제 당일 연회에는 참여하지 않아도 되는 나이. 그는 오늘도 혜윤을 만나기 위해 거리로 나왔다.
"안녕. 내가 좀 늦었네."
"내가 일찍와서 기다린거야. 그럼 갈까?"
머리색과는 대조적인 하얀색 원피스. 일전 알렉산더에게 선물받은 옷을 입은 혜윤이었다.
"알렉스. 오늘은 뭐 할거야?"
알렉스는 알렉산더가 거리에서 쓰는 이름. 혜윤은 아직도 알렉산더의 본명은 모르고 있다. 굳이 자신이 왕족이라는 사실을 알려 그녀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던 알렉산더였다. 그리고 이 선택은 지극히 올바른 것이었다.
"음... 저번에 너가 거리마다 다른 등불을 보고 싶다고 했었지."
"내 집 근처의 거리는 왕도의 중앙 도로인데... 아직 아카데미 근처의 등은 본 적이 없어."
"왕도에서 산 지 꽤 되었다고 하지 않았었나? 그동안 가본 적은 없었어?"
물음에 곤란하다는 듯이 말하는 혜윤.
"음... 축제날에는 집에서 나오기 싫었거든."
누구나 말 못할 사정은 있는 법. 알렉산더 역시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을 수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 사실을 잘 알기에 알렉산더는 이유를 굳이 묻지는 않았다.
"그럼 여기서는... 아카데미에서 왕도 서문 방향으로 내려가며 구경하자."
거리를 걷기 시작한 두 사람.
알렉산더는 축제에 서민들이 어떻게 지내는가 눈에 담기 위해 이곳저곳을 보기 바빴고, 혜윤 역시 자신만의 이유로 눈을 바쁘게 움직였다.
고향인 혜세국의 전통 복장을 입은 남녀. 에우데미아에 정착해 살고 있는 혜세국 교민이 축제를 맞이해 입은 듯 하다.
코트에 검을 숨긴 검은 머리의 남자. 혜국의 스타일은 아니다. 그의 옆에는 은발을 모자에 애써 숨긴, 하늘색 원피스를 입은 소녀.
환도(??)를 지닌 남자를 필두로. 활, 창, 편곤과 같은 무구를 다양하게 가지고 있는 용병들…
"알렉스."
"왜 그래?"
"저기 골목에 있는 음식점. 가봐도 될까?"
두 사람이 처음 만난 날 이후로는 최대한 알렉산더의 의향을 존중해주던 혜윤이었다.
그랬던 혜윤이 자신에게 이런 부탁을 한다니. 흔치 않은 일이라는 생각을 하며 알렉산더는 답했다.
"음. 수인국의 전통 방식으로 요리한 닭요리라. 한번도 먹어본 적 없는 요리네. 가보자."
"... 고마워."
"고맙기는…. 우와, 저것도 맛있어 보이는데? 빨리 가서 우리도 먹어보자."
"그래."
그렇게 둘은 예정에 없던 식사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수인국의 닭요리는 좋게 말해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린 요리. 나쁘게 말해서 간이나 향신료가 너무나 적기에 밍밍한 요리였다.
"맛이 좀 신기하긴 하네…"
알렉산더와 혜윤처럼 어린 아이들이 먹기에는 맛이 없다고 느껴질만한 것이었다. 혜윤은 풀이 죽은 채로 알렉산더에게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 내가 쓸데없이 와보자고 해서…"
언제나 똑부러지던 혜윤이 사과까지 한다니. 알렉산더는 오늘따라 평소 못보던 혜윤의 모습을 자주 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 맛이 없다는 건 아니야. 이런 음식이 있구나 싶어서 한 말이었어. 먹다보니 맛있는데?"
알렉산더는 애써 맛있는 척을 하며 음식을 먹기 시작하고, 혜윤은 그런 그를 약간 슬픈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을 알렉산더는 알 리가 없었다.
그렇게 배를 채우기만 하는 식사가 끝났지만, 아직도 혜윤은 어딘가 가라앉은 분위기였다.
알렉산더는 그런 혜윤을 보고 아직도 음식점의 일로 침울해져 있는건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꺼림칙한 대화 주제는 넘기는 게 낫다. 황급히 다른 화제를 생각하는 알렉산더.
… 그러고보니.
아침에 경비병들에게 들은 것이 있었다.
시간. 지참해온 시계를 보니, 시침은 이미 6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혜윤아. 지금 시간에 중앙 광장에서 큰 행사를 한다고 했는데. 같이 가볼까?"
알렉산더는 넌지시 물었다. 멍하니 있던 혜윤그런 알렉산더의 물음에 기운을 내며 대답했다.
"그래…"
알렉산더와 혜윤은 중앙 광장 근처의 한적한 곳에 자리 잡았다. 광장 중앙이나 근처의 건물에는 이미 손님들로 가득찼기 때문이다.
들었어? 서쪽 첫번째 무기점 아들 녀석이 남문 붉은 새 주점의 딸한테 고백한대!
무기점 아들이라고? 그 자식은 완전 쑥맥처럼 보였는데. 그거 가망은 있는거야?
그 둘 진즉에 분위기 좋았다던데?
얌전한 것들이 더 한다더니…
주변 사람들의 대화.
그런 대화를 들으며 중앙 광장을 바라보자, 그곳에는 높은 단상과 확성용 마도구가 있다.
이내 어떤 남성이 연단에 올라섰다.
연단의 남성은 연인의 이름과 말한 뒤, 사랑합니다! 라는 말을 외친다. 그의 외침은 확성 마도구를 통해서 거리로 널리널리 퍼졌다.
알렉산더는 그 모습을 보며 혜윤에게 말했다.
"귀족들은 전야제에 하는 걸 평민들은 축제 당일에 하는구나…"
"귀족과 평민은 구별되어야 하니까. 그래도 평민들은 귀족들의 풍습을 따라하기 마련이야."
"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혜윤은 광장 중앙을 바라보고 있는 알렉산더의 옆모습을 보며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옛 에퀼리아에 존재하던 엘프 귀족들은 계급차이를 나타내려기 위해 복색을 제한했대. 이런 악습은 마족 해방운동 이후에야 없어졌구."
"수업에서 배운 것 같아. 이런 실생활을 보면서 역사를 떠올리니... 감회가 새롭네."
연단의 남자는 부끄러움에 볼이 새빨갛게 익어버렸고, 아래로 도망쳐버렸다. 그 모습을 보던 관중들은 한바탕 웃음을 자아냈다.
"나는 저 삶을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겠지."
자신의 다짐을 되새기는 알렉산더.
그는 혜윤이 자신을 한참 전부터 보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저기 있는 사람들은 행복해보여."
중앙 광장에 설치된 확성 마도구 근처.
그곳에는 새로운 인물이 올라서는 중이다.
혜윤은 이내 알렉산더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정확히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는 자신의 입장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이지 얄궂게도...
알렉산더는 한 마디 말을 덧붙이며 혜윤을 곁눈질로 보았다. 한동안 말이 없는 게 신경쓰였기 때문이다.
"너를 만난 뒤로 정말 많은 걸 보는 것 같아."
언제나 환하게 웃는 그녀의 얼굴이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중앙을 함께 바라볼 줄 알았던 소녀는 어느새 자신의 발끝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저 해가 숨은 저녁시간대라 혜윤의 얼굴이 어두워보이는 것일까. 하지만 다른 날에는 늦은 시간에도 활짝 웃던 그녀였다.
오늘은 왜 저렇게 슬픈 표정을 하고 있는걸까.
소년은 망연히 그 모습을 볼 수밖에 없었다.
* * *
"내가 무언가 잘못 한걸까…"
알렉산더는 이야기를 마치며 축 늘어졌다.
"오라버니. 혹시라도 그 날 나누었던 대화 중에 잊으신 건 없나요?"
"지금 말한 게 다야…"
"딱히 문제될 대화는 없는 것 같은데…"
아셰리아는 혜윤이라는 소녀가 어떤 심정으로,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듣고만 있던 시녀들도 말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런 표정을 지은 이유가 대화 자체와는 관계가 없는 것 같은데요. 이것 외에는 모르겠어요."
이렇게 말하고는 있지만... 풋풋한 소년 소녀의 교제. 하지만 보이지 않는 장애물이 서로를 가로막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시녀들이었다.
"하아... 역시 그런건가."
하지만 시녀들의 대답에도 답을 얻지 못한 알렉산더. 그는 축 늘어지다 못해 이마를 티테이블에 박은 채 땅만을 쳐다보게 되었다.
"그 때 생각만 하면 가슴이 답답해지고…"
앉은 자세 그대로. 알렉산더는 가슴팍을 힘없이 두드리며 말을 이어 나갔다.
"온 몸에 힘이 빠지는데다…"
시녀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정말 좋은 때구나. 왕자님도 풋풋한 사랑을
"머리도 지끈지끈거려... 왜 이러는 걸까?"
알렉산더의 물음을 끝으로.
티테이블에는 잠깐의 침묵이 감돌았다.
"오라버니."
침묵을 깬 아셰리아.
그 부름에 알렉산더는 고개를 들었다.
"그건 아마도..."
시녀들은 내심 공주를 응원했다.
공주님, 그거에요!
공주님의 오라버니께서는...!
공주는 약간의 뜸을 들이고,
왕자는 그런 공주에게 집중하고 있다.
그렇게 공주의 판단은...
"부정맥이 아닐까요?"
…….
판단이 아니었다.
이것은 너무나 어이없는 진단.
"그런가? 리아 너가 명민하다보니, 그게 맞을 수도 있겠구나. 검사를 받아봐야 하나."
너무나 감정에 무지하고 순수한 둘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시녀들...
세라는 무릎을 꿇고 한숨을 내쉬었으며,
리사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마에 손을 얹었다.
"아닐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막히는 일이 있을 때는 그럴수도 있지요. 조금 진정해보세요."
"음. 이럴 때야말로 상황을 냉철히 분석해야할 때. 고맙다. 내 자랑스러운 여동생이여.
멀찍이서 조용히 지켜보는 아샤는...
그런 시녀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