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 223. 불행과 행복
* * *
풀죽은 공주님을 겨우 설득한 끝에, 우리는 왕궁 정문을 통해 바깥 거리로 나오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 중에는 상태가 좋지 못한 사람이 여럿 있었다.
아일라가 내게 말을 걸었다.
"공작님."
"무슨 일이야?"
"... 아모스가 지금 이 상태라면, 공주님 앞에서 추한 꼴을 보일 것 같아서요. 저와 아모스는 저택에 돌아가서 식사를 해결할게요."
말을 하는 아일라도 영 부담스러운 눈치였다. 하긴 오늘 아침이 되서야 내가 가르치는 사람들의 신분을 명확히 깨닫게 된 두 사람이다. 충분히 이런 반응일만 하지.
거기다 아모스는... 내가 심했나? 저 덩치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휘청거리는 중이다.
그래도 이 세상은 검에 마력을 싣거나 마법을 펑펑 날리는 게 흔한 곳이다. 지금 입고 있는 고급 보호 수트도 만능이 아니라는 거지. 이 정도는 버텨야 훗날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럼 두 명은 그렇게 해. 내가 어제 두 사람 비상금으로 준 돈은 챙겨 왔지? 그걸로 저택가는 길에 먹을거리를 좀 사서 가던가, 아니면 적당한 가게에서 식사하고 들어가."
"알겠습니다."
아일라는 자신보다 두 배는 건장해보이는 아모스를 끌고 먼저 저택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우리 중에는 아직도 상태가 안좋은 사람이 한 명 더 있었으니...
"헤르만, 네 동생은 왜 이러냐..."
아샤는... 고장난 인형처럼 축 늘어져 있다. 다크서클이 눈 밑으로 축 늘어져 있는데다, 두 팔은 걸을 때마다 앞뒤로 흔들리는 수준.
아모스와 한참 대련 중일 때 엄청난 고성이 들려서 바라보았더니 아샤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매번 조곤조곤 말하던 아샤의 폭발이라니. 원인은 모르지만 한 번도 본 적 없는 일이다.
그렇게 큰 소리를 지른 건 그렇다치고... 아샤가 이렇게 된 건 아무래도 타이밍 때문이겠지.
아샤가 소리지른 그 순간이 하필이면 에우데미아의 사대 귀족에 국왕 부부까지 전부 모였을 때라니. 훈련장에는 모습을 안 비추었지만, 엄격한 분위기의 기사단장마저 단장실 창문을 열고 두리번거리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 아샤의 상태가 약간은 이해가 된다.
"... 모르겠어, 형님. 집에 데려다 주고 갈까. 지금 가려는 식당은 어디 방향인데?"
"티오리아 백작가는 왕도 서문 근처였지?"
"그렇지."
"내가 가려는 곳은 북서쪽이야. 조금 돌아가긴 하는데... 너희 집안을 먼저 들려서 아샤는 쉬게 해주고 가자."
* * *
티오리아 백작저에 도착하니, 호리아 백작부인이 우리를 맞이해주었다. 그녀는 카일 왕궁부장을 통해 아샤의 소식을 들은 듯 했다.
"음. 그럼 헤르만은 당분간 가정교사님 댁에서 머무는 거고... 도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니?"
"모르겠어... 어머니."
"여하튼, 제가 아샤를 돌볼테니. 더 늦기 전에 식사들 하셔요. 공주님도 계신데 어서 일들 보고 왕궁에 바래다 주셔야죠."
"알겠습니다. 배려 감사합니다, 부인."
"오히려 아샤를 데려다주셔서 고마운걸요."
단한 인사를 나눈 우리는 다시 거리 밖으로 나왔다. 처음 왕궁 정문을 나설 때는 6명이었는데... 지금은 단 세 명만이 남았다.
나, 아셰리아 공주, 헤르만.
그나저나 대화에서 아샤가 언급될 때마다 아셰리아 공주는 시선을 슬쩍 피하는데, 그저 단순히 내 기분탓이겠지...
헤르만이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어디로 가야해?"
"이제 여기서 북쪽 골목으로 쭉 들어가면 내가 가려는 곳이 있어."
"음... 거기 귀족들의 거주구잖아. 집값만 비싸고 죄다 자기 집에 요리사 한둘은 두고 있어서 식당은 없을건데."
"거주구 안에 숨어있는 맛집이야."
"... 그런 건 어떻게 아는 거야..."
에코니아 아포칼립스는 소모품에도 전부 스탯이 붙어있었다. 그래서 긴박한 전투에서는, 소지품의 등급이 얼마나 높은가에 따라 클리어 난이도가 달라졌다.
그 중 제일 중요한 취급을 받은 스텟은 역시나 체력회복이나 버프. 이런 종류는 여타 게임들과 마찬가지여서,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포션이나 약재로 해결했다.
반면에 음식이라는 소모품은 사람들에게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맛과 건강이라는, 아무리봐도 게임에 스탯으로 표시되지 않는 효과만 잔뜩 붙어있었으니까.
나는 저 효과들이 혹시나 분기에 영향을 주는 게 아닌가 의심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왕도의 음식들을 스탯별로 분류해서 먹어본 적이 있는데... 결과는 꽝. 특별한 음식은 없는지 식당이라는 식당은 전부 찾아냈었다.
지금 가려는 식당은 당시 찾았던 곳이다. 맛이나 건강 스텟이 최상인데다 비쥬얼마저 특출난 음식을 파는 곳. 간판마저 없는 식당이다.
...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이상하네. 어떻게 맛이랑 건강이 둘 다 최상일 수 있는거야.
"벌써 밤이네... 서두르지 않으면 문 닫겠다."
"그럼 빨리 가야겠구만."
"그렇지. 가볼까요, 공주님?"
"... 네."
우리는 티오리아 백작가에서 북쪽 골목을 따라 걸었다. 나와 공주님이 앞에서 나란히 걷고, 뒤에는 헤르만이 따라오는 형태. 귀족들이 많이 사는 곳이라 거리는 꽤나 깔끔하다.
나는 옆에 걷고 있는 공주를 계속해서 곁눈질로 보고 있는데... 거리로 나온 뒤로 나와 눈을 마주치는 걸 애써 피하는 느낌이 든다. 그녀는 지금도 땅만 보고 걷는 중이다.
... 나는 걷다말고 공주의 팔을 당겼다.
"잠깐만요."
"아."
아셰리아 공주가 맞은 편에서 걸어오던 사람과 부딪힐뻔 했기 때문이다.
"공주님. 앞을 보고 걸으셔야죠."
"... 네."
응접실에서 하려던 질문이 뭐였던거지. 그게 아니면 오늘 큰 문제는 없었는데...
요즘들어 꽤나 밝아진 공주다. 갑자기 이런 모습을 보이니 씁쓸한 느낌이 든다.
"안되겠네요. 식당까지 이렇게 가죠."
"……."
이대로 걸으면 또 방금전처럼 누군가와 부딪힐 것 같아서, 나는 공주의 손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아셰리아는 아무 말도 없었다.
키 차이가 어느정도 나다보니, 내가 최대한 팔을 내려도 공주는 약간 팔을 들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만약 행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나보다 어린 조카나 사촌이 있었다면 이런 느낌일까.
…….
있어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
"후우."
자연스레 한 숨이 나온다.
나에게 아이라는 존재는... 참 어렵다.
나는 분명 어린 시절, 다른 아이들이 나와 같은 삶을 살도록 하지 말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떠올려 교사의 길을 선택했다.
나와 같은 삶. 그것을 일반적이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따지고 본다면, 아이로서 불행한 삶이자 행복하지 못했던 삶을 말하는 것이겠지.
불행한 삶을 살지 않도록 돕는 방법은 어느 정도 알고 있다. 그저 아이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요인을 찾아 해소하거나 제거하면 된다.
애초에 나부터가 집안의 온갖 인간 말종들에게 별 다양한 방법으로 시달렸고, 어떻게든 그 속에서 살아남았다. 나에게 불행한 삶의 이유를 추론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다.
지금은 아마 아셰리아 공주를 가장 불행하게 만들던 요인만큼은 지워냈다고 생각한다. 이제부터는 그 불행이 남긴 슬픔들을 지울 수 있을 정도로, 행복한 삶을 조성해줘야겠지.
하지만... 아이가 행복한 삶을 살게 해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행복이란 감정을 갖도록 하려면 어떤 환경을 조성해주어야 할까. 이것들을 추론하는 일은 나에게 너무나 버거운 일이다.
지금 내가 공주를 식당에 데려 가는 것은 단순한 임시방편일 뿐이다.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런 행위는 잠시동안의 기분전환에 불과할 뿐, 근본적인 행복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마치 만화 속 히어로처럼. 타인의 불행을 지울 정도의 큰 행복을 안겨주는 방법이 세상에 존재하긴 하는걸까.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이건 교사의 길을 걷기로 다짐한 순간부터... 항상 내 마음속에 존재하는 한 가지 고민이다.
…….
나는 과연 해낼 수 있을까. 지금 내 근처의 사람들이행복할 수 있도록... 아니, 그 이전에 살게 해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내 마음속에서 꿈틀댄다.
'이런 생각하면 안되는데...'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밤하늘은 그 날처럼 맑았고,
별들은 언제나 있는 그 자리에 있었다.
* * *
걷고 걸어 왕도 북서쪽 구획의 끝까지 걸어왔다. 거의 성벽 바로 앞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
"형님, 너무 여기 구석진 곳에 있는데."
"좀 입지가 안좋긴 하지."
"... 여기 음식은 괜찮은 거 맞아?"
식당이 너무 구석진 곳에 있긴 하다.
이러니까 게임에서 아무도 못 찾았지...
식당의 외관은 정말이지 깔끔하다. 작은 정원이 있는 새하얀 집. 건물 전면 테라스 너머로 큰 통유리가 있어 훤히 보인는 내부 구조.
게임에서는 없었던 간판이, 지금은 새 것처럼 번쩍이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그곳에는 나 역시 몰랐던 식당의 이름이 적혀 있다.
[ Cafeteria Go Bling ]
... 거 참.
식당 생긴 게, 이름처럼 블링블링하네.
건축 방식은 아마 에퀼리아 방식인가. DLC를 플레이해보진 않았지만, 에퀼리아편의 표지정도는 본 적이 있다. 인간들의 도시로 보이는 거리에 이런 집이 많이 그려져 있었다.
"아직 닫지는 않은 것 같네. 들어가 봅시다."
내가 키차이가 나는 아셰리아 공주를 내려다 보며 말하자, 내 손을 잡고있는 그녀는 말없이 끄덕였다.
하지만 헤르만은 무언가 불편한 모양이다.
"나 진짜 불안한데."
"그렇다고 지금 다른 곳을 갈 수도 없잖아."
"그건 그래... 음. 먹고 죽기야 하겠어."
"식사하러 와서 죽네 마네라니. 각오가 참..."
"내가 먼저 들어가볼게."
헤르만 녀석은 불안하다고 빼던 주제에, 큰 결심이라도 한 사람마냥 점내로 걸어 들어갔다.
그런 헤르만을 따라서 아셰리아 공주와 함께 들어가자...
"형님, 지금이라도 나가자... 여기 무언가 이상해. 어떻게 귀족 거주구에 이런 식당이 있어."
"……."
헤르만 녀석은 입구에 들어선 채로 불평을 늘어놓고 있다.
이 녀석만 이러면 모르겠는데, 아셰리아 공주 역시 충격이 꽤나 큰 듯 하다. 그녀는 아직 잡고 있는 내 손을 더 꼭 잡고 있다. 사실 그래봐야 어린 아이가 손아귀에 힘이 있어봐야 얼마나 되겠나. 약간의 압력이 더해진 정도다.
평소 냉정한 공주가 이렇게까지 긴장하다니... 그 정도로 이 식당의 내부는 파격적이다.
이곳에 오자고 제안했던 나조차 예상하지 못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하긴 게임에서는 이렇게까지 디테일하지 않았으니까...
지금 내 감상은... 귀족들이 지천에 까린 골목에 왜 이런 식당을 개점한 건지, 주인에게 생각이란 건 있나 물어보고 싶다. 이 곳의 주인장은 요리를 취미로 하는 사람이라도 되는걸까.
이런 방식이라면 귀족들은 곧장 발을 돌리거나, 식당 주인에게 행패를 부릴 것이다.
[ 주문은 종이표에 적어 전달해주세요. ]
[ 대금은 식사 후 테이블에 두시면 됩니다.]
배식구와 퇴식구, 키오스크 노릇을 하는 주문표. 거기에 돈은 외국 여행을 갔을 때 팁을 주듯이 테이블에 두고 나가야 한다.
너무 시대를 앞서나가는 게 아닐까.
... 식당 이름을 보고 알아챘어야 했나?
카페테리아라니. 고속도로의 휴게소 식당이나 학식같은 형태를 카페테리아라 부르지 않는가.
이 식당이 돌아가는 운영 방식는... 아직 직위에 따른 신분제를 유지하고 있는 에우데미아에서 절대로 환영받지 못할 것이다.
물론 현대인인 나로서는 대학교를 다닐 때 학식도 자주 이용했으니 별 거부감이 없다. 아니, 오히려 시중드는 사람들이 불편한 나였기에, 약간은 반갑다는 느낌도 들긴 한다.
헤르만이 어딘가를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다른 건 둘째치고, 저게 말이나 되는 거야?"
"... 내 고향에는 흔하긴 했는데..."
"뭐?"
헤르만이 손가락으로 가르킨 그곳에는...
나에게 너무나 익숙한 문구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 보는 건 좀 어이가 없긴 하다.
[ 물은 셀프입니다. ]
"... 골 때리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