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왕실의 가정교사-60화 (60/215)

〈 60화 〉 2­24. 임시방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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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 임시방편

상당히 어이없는 식당이긴 하지만... 시계는 이미 8시를 가리키는 상황. 거기다 왕도의 구석진 곳까지 찾아와버려서, 다른 곳을 찾아가기엔 시간이 맞질 않는다. 우리는 결국 이 수상한 곳에서 저녁을 해결하기로 했다.

"이 가게. 왜 자리는 이렇게 고급이냐..."

"형님, 여기 너무 이상해..."

"... 일단 편하니까 괜찮은 거 아닐까?"

고급 원목을 소재로 깔끔하게 짜인 식탁. 적당한 쿠션감을 가졌음에도 튼튼하게 몸을 받쳐주는 의자. 왕도의 일반 식당에서는 쉽게 보기 힘든 냅킨이나 향신료 통까지.

막상 자리에 앉고 보니, 왠만한 귀족 저택의 식탁이라고 해도 좋을만한 수준이었다.

"어디보자... 여기 주문표가 있네."

일단 내가 두 사람을 데려온 격이니까, 주문은 내가 하려고 주문표를 읽어나가는데...

파스타, 계절 야채 샐러드, 각종 스프, 살치살 스테이크... 카페테리아 치고는 메뉴들이 하나같이 고급스럽다. 메뉴의 수식어들도 고급 레스토랑 메뉴판에 붙어있는 그 느낌...

거기에...

셰프 특선 코스?

카페테리아 주제에 왜 이런 고급스러운 항목이 있는 걸까. 손님이 직접 물을 떠다 먹어야하고, 주문도 직접하고, 음식도 가져와서 다 먹은 다음에는 퇴식구에 반납해야 하는 식당이다.

이런 곳에 은화 한 장짜리 코스 요리... 그것도 셰프 특선이라는 게 주문서에 적혀있다니, 사장에게 따지고 싶은 마음이 점점 커지고 있다.

거기다 특선 코스 밑에 적힌 단품 요리들도 너무 고급스럽다. 나도 나름대로 왕궁에서 한 달 정도는 살다가 나온 몸이기에, 이 세계의 고급 식단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고 있다. 이 식당의 요리들은 충분히 고급진 것이다.

나는 공주에게 주문표를 밀며 물었다.

"... 아셰라. 좋아하시는 메뉴가 따로 있나요?"

일단 바깥으로 나온거니, 저번 건국제에 정한 가명으로 그녀를 불렀다. 비록 실명과 큰 차이는 없지만 말이다.

아셰리아 공주는 메뉴판 위 이곳저곳에 손가락을 움직이며 고민한 끝에 말했다.

"선생님께서 드시는 걸로..."

다른 사람의 선택권은 보장해주는 동시에, 머리는 더 복잡하게 만드는 선택지를 고르다니. 역시나 내 제자는 보통 아이가 아니다.

"그럼 이왕에 식사하기로 했으니까, 셰프 특선으로 주문해보죠. 헤르만도 이거면 괜찮지?"

"이젠 포기했다..."

"그럼 주문 넣고 올게."

이제 아무래도 좋다는 듯한 헤르만.

우리 중에 셀프에 가장 익숙한 것은 아무래도 나인 듯 하니, 나는 주문을 넣고 물을 가져오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리고 자리에서 반쯤 일어난 순간, 내 옆에 앉아있던 아셰리아 공주가 내 옷을 잡아당겼다.

"시하 선생님... 차라리 제가..."

우물쭈물거리면서 내게 말하는 아셰리아.

... 그 모습은 마치, 잘못한 것을 숨기는 어린 아이처럼 느껴진다. 그녀가 나한테 사과해야할 일은 전혀 없는데 말이다.

이런 모습이 공주의 고민과 연관이 있는걸까.

나는 다시 앉아 공주에게 말했다.

"같이 오자고 한 건 저잖아요? 거기다 제 고향에 이런 식당이 많았거든요. 제가 이런 곳에는 익숙하니까... 오늘은 제가 움직일게요."

고향.

고향이라는 단어를 말한 그 짧은 순간에, 아셰리아 공주는 시선을 옆으로 돌리며, 몸을 조금 움찔거렸다.

... 왜 고향이라는 단어에 이럴까.

"다음에 외출을 함께 나오게 되면, 그때 아셰라가 무언가 해주시면 되죠. 알았죠?"

내가 한 마디를 덧붙이자, 공주는 조심스럽게 시선을 내 방향으로 향했다.

공주가 가끔 이런 식으로 나를 바라볼 때가 있다. 처음 공주와 만난 침실이라던가, 발람에게 결투를 신청한 그 날이라던가...

"알겠습니다..."

"이해해줘서 고마워요. 그럼 얼른 다녀올게요."

"네."

공주의 허락이 떨어지고, 나는 주문서를 제출하기 위해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은 내부를 가리고 싶은 듯이 하얀색 벽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그 벽에 주문서를 제출하는 작은 창구, 음식 접시가 오가는 배식구와 퇴식구가 뚫려있는 모양새. 창구 너머로 보이는 주방은 너무 깨끗해 빛이 나는 수준이다.

창구에 주문서를 올려두자... 하얀 조리모가 창구 너머로 다가오더니, 초록색 손으로 창구를 더듬어 종이를 가져갔다.

잠깐만.

초록색... 손?

음...

"뭐... 판타지 세계니까."

그럴 수 있지.

충분히 그럴 수 있지.

먼 옛날 에코니아는 오크 · 고블린 · 서큐버스 · 마인... 이런 수많은 종족이 마족이라는 범주에 묶여, 세상 사람들의 차별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어느 날, 초대 마왕이라 불리우는 마인이 나타나서는... 종족을 가리지 않고 약자들을 지키고, 악인들의 대가리는 부숴버렸다.

... 단어 선택이 이상하긴 한데, 역사서에도 정말 대가리를 부숴버렸다고 적혀 있다. 이후 마왕의 공적은 결국 인정받아 전 세계의 차별은 '공식적으로는' 철폐되었다.

이런 역사를 가진 세계다보니, 초록색 피부의 소인족이 요리를 하는 것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약간 걸리는 점이 있다면... 그들이 주로 종사하는 직종은 요식업이 아니라는 점.

그래도 얼핏 본 주방은 깨끗했고, 음식의 맛을 보기 이전에 함부로 요리사를 평가할 수 없는 법이지. 이것이 바로 편견 없는 자세, 정치적 올바름, 진정한 평등, 탈 고정관념이란 것이다.

주문이 접수되는 것을 확인한 나는 포크와 나이프, 세 잔의 차를 쟁반에 챙겨 돌아갔다.

* * *

꽤나 시간이 지나고, 주방의 종이 울렸다. 나는 그 소리를 듣고 배식구로 가 음식을 받아 왔다.

음식들은 전채 요리로, 얇은 햄이 올려진 카나페와 식전 수프, 식전빵 그리고 샐러드다.

내가 음식을 하나하나 내려놓자, 헤르만 녀석은 딴에 독이 있는지 검사를 한다며 은침의 끝에 마법진 하나를 둘러 이리저리 찔러댔다.

밥맛 떨어지게...

확인을 끝낸 헤르만이 말했다.

"검사 끝. 전채 요리는 대강 봐줄만 하네."

"헤르만... 여기 왕도야."

"형님, 우리 둘만 있는 것도 아닌데 당연히 이 정도는 해야 안전하지."

귀차니스트가 왠일로 올바른 말을 하긴 했다. 공주님께서도 계시니 당연히 검사해야지. 그런데 나는 이 녀석 이러는 거 처음 보는데...

"... 나만 있었을 때는 귀찮았다는 거네?"

"……."

"왕궁에서 계속 살라던 이유가 혹시...?"

"하하... 먼저 드시죠, 아셰라 영애."

아셰리아 공주에게 먼저 먹으라는 말로 자연스럽게 빠져나가는 헤르만이었다. 말 돌리는 게 정말 수준급이다.

헤르만의 권유를 받은 공주는 수프를 한 술 떠서 입에 머금었다. 그리고 맛을 음미하는 듯, 몇번 정도 입을 오물오물 거렸다.

"와아..."

공주의 낮은 감탄. 표정도 약간 밝아진 느낌이다. 아셰리아 공주는 수프에 이어 카나페와 샐러드도 하나하나 맛보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물었다.

"아셰라. 맛있어요?"

"네. 왕궁... 저택의 음식은 전채부터 기름진 맛이 느껴지기 마련이었는데, 이곳의 음식은 정말이지... 깔끔하게 맛있습니다."

공주님의 까다로운 입맛을 만족시킨 음식점이라니, 다행이다. 내심 신분제에 어울리지 않는 사이비스러운 외관에 걱정하고 있었던 나였다. 그런 마음속 걱정들이 전부 내려갔다.

"맛있게 드셔주셔서 다행이네요. 헤르만, 우리도 이제 먹... 벌써 먹고 있네."

"형님, 맛있으니까 빨리 먹어. 식는다."

"……."

아셰리아 공주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는데, 헤르만 녀석은 날 배신하고 먼저 먹고 있었다.

... 그래도 공주의 기분이 조금이라도 풀린 게 중요하지. 데려와서 다행이다. 계속 꺼림칙해하던 헤르만 녀석도 지금은 맛있게 먹고 있다.

나도 아셰리아 공주가 맛있게 먹었다는 수프를 떠먹어 보자...

"오."

원래 있던 세계에 비슷한 게 있다면... 클램 차우더. 해산물의 은은한 향과 크림의 고소한 향이 조화되어 있고, 다진 해물과 양송이의 질감이 느껴진다. 제일 중요한 간도 딱 적절하다.

원래 클램 차우더는 해산물이 질기거나 크림이 텁텁하기 마련인데, 이곳은 그렇지 않다. 해산물은 부드럽고 크림은 목넘김이 깔끔하다. 아셰리아 공주의 말처럼... 깔끔하게 맛있다.

요약해서.

맛있는데 건강한 맛.

여기 있었다.

* * *

이후로도 요리는 계속 나왔다.

치즈와 파스타로 속을 채운 단호박이라던가. 특제 소스가 뿌려진 생선찜이라던가, 빠지면 안될 스테이크라던가. 고급스러운 요리들이 계속해서 예쁘게 플레이팅된 채로 나왔다.

그때마다 아셰리아 공주는 음식 하나하나의 맛을 천천히 느꼈으며, 헤르만은 연신 맛있다는 극찬을 해대며 접시를 비웠다.

음식이 나왔다는 벨이 울릴때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게 귀찮긴 했지만... 두 사람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나쁘진 않다.

거기다 나도 꽤나 만족했던 것이, 에우데미아에 온 뒤로는 먹어보지 못한 음식들이 계속 나와서 익숙한 맛을 느낄 수 있었다. 주방장이 표류자는 아닐까 싶었지만... 설마 그러겠어.

그러고보니 표류자라...

나는 방금 아셰리아 공주가 고향이라는 단어에 반응했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리고 공주를 약간 떠보기로 했다.

"제가 살던 고향에도 이런 음식이 있었는데... 이 음식점이 훨씬 더 잘하네요."

"선생님의 고향 말씀이십니까?"

"네. 이 정도 질이면... 제가 살던 곳에서는 부자들만 갈 수 있었거든요. 저는 평민이었고."

"... 그렇군요."

내가 고향 이야기를 하니... 아셰리아 공주는 음식을 먹다 말고 나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방금과 같은 반응이 없었다. 혹시나 내가 잘못 보았던 것일까.

공주는 음식을 먹던 포크와 나이프를 잠시 내려둔 채로 고민에 빠졌다.

잠시 후, 공주가 내게 말했다.

"데려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감사할 일은 아닌 걸요. 오히려 제 부탁을 듣고 같이 와주신건데요."

"평소 먹지 못했던 색다른 요리도 많고... 맛도 제 취향에는 여기가 더 낫습니다."

아셰리아 공주는 바로 내 옆에서 나를 올려다 보면서 시식평을 하고 있다.

그 정도로 맛있던 걸까.

아셰리아 공주는 이어 부탁 하나를 말했다.

"... 다음에도 함께 올 수 있을까요?"

다시 오고 싶을 정도로 마음에 들었나 보다. 이 식당에 오길 잘했다는 안도감이 올라온다.

왕궁에서 식당이 좀 멀긴 한데... 가끔씩이라면 함께 와도 좋지 않을까. 나도 에우데미아의 음식에 질려가고 있었다.

"그럼 가끔 기분전환 삼아 같이 올까요?"

"... 네."

왕궁에서는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정말 걱정을 많이 했는데... 지금 아셰리아 공주는 기분이 많이 풀어진 것 같다. 내 우려보다 아셰리아 공주의 고민은 더 작을수도 있을 것 같다.

만약 크더라도 내가 어디 갈 일은 없으니, 나중에 힘들어할 때 고민을 들어주면 될 것이다.임시방편이지만... 지금은 이걸로 만족하자.

"공주님이 오고싶으실 때 말씀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아셰리아 공주는 얕은 미소를 지었다.

에코니아에 떨어진 첫 날 생각했듯이... 우리 공주님은 웃을 때가 가장 아이답고 귀엽다.

그 때, 내 등 뒤로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 후식입니다."

조금 연륜이 느껴지는 음성이다.

뒤를 돌아보니, 방금 전 창구 뒤에 보였던 하얀 조리모가 보였다. 키가 작아서 의자에 앉아있는 내 눈높이에 모자만 보인 것이었다.

내 허리춤까지 올만한 키.

하얀 조리복과 하얀 조리모.

후식 접시를 들고 있는 손에도 하얀 장갑.

코와 입을 하얀 면소재 마스크가 덮고 있어서, 드러나있는 안면부는 귀와 눈 뿐이다.

드러난 피부는 초록색인데, 나이를 대변하듯 주름이 꽤 있는편이다.

그의 귀는 뾰족하고 길게 뻗어있으며, 눈동자는 노란 색으로 빛나고 있다.

주방장은...

역시나 고블린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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