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 226. 있어야 할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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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 있어야 할 곳.
"공주님 같은 제자도 두신 분이니, 오래오래 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고블린 노인이 말했다.
내 학생이자 제자, 아셰리아 공주.
몇 개월 뒤면 12세의 생일을 맞이하는 그녀다. 그 생일의 의미는 특별하다. 아이가 한 명 왕국의 일원으로서 인정받는 생일이기 때문이다. 그 때부터는 사교계에도 활발히 참석해야만 한다.
그래도 내게 아셰리아 공주는 아직 지켜야 할 어린 아이일 뿐. 지금도 내 옆에 앉아있는 작은 소녀는... 닫혀 있었던 마음을 깨고 세상에 첫 발을 내디딘 병아리나 마찬가지다.
세상과 마주하며 언젠가 서서히 어른이 되어가겠지. 그리고 학생은 언젠가 졸업하게 된다.
내가 해야할 일은 아셰리아가 무사히 졸업할 수 있도록, 이 아이가 살아갈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 그 이후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오랫동안 산다.
과연 좋다고 할 수 있는 일인가.
나는 지금에서야 삶의 목표는 정했어도 삶의 의미는 찾지 못한 인간. 나로서는 적당한 나이까지 살다 적당히 가는 게 좋은 일로 느껴진다. 정말이지 행복한 삶이라면 조금이라도 더 연명하고 싶겠지만... 나는 그 행복을 찾지 못했다.
…….
아이 앞이니까 이런 말은 하면 안되겠지.
나는 마른 웃음을 내며 노인에게 답했다.
"하하, 당연히 그래야죠..."
내 대답을 듣고...
노인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으며,
공주는 왠지 모르게 표정이 밝아졌고,
... 헤르만은 일개 고블린의 입에서 나온 진언으로 인해, 더 큰 문화 충격에 빠져버렸다.
나는 노인에게 말했다.
"저 녀석은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히려 음식이 맛있다고 잘 먹다가 자신의 상식을 뛰어넘지 못한 거니까요..."
"원래는 에퀼리아에서 장사를 했었는데, 고블린들이 많이 사는 그곳에서도 일상적인 일이었습니다. 오히려 이 분 정도면 낫지요."
고블린 노인은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을 이어나갔다.
"맛있게 드시고도 제가 고블린이라는 이유로 돈을 못내겠다고 하던 사람들도 많았고, 먹은 음식을 토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게 아닌 게 어디입니까."
"... 고생이 많으셨네요."
에퀼리아는 작품 내에서도 겉으로는 자유와 평등을 외치면서, 실상은 보이지 않는 카스트가 존재하는 위선적인 나라였다. 이 노인이 겪은 일들을 들어보니 크게 다르진 않은 것 같다.
에우데미아에 와서 이런 식당을 내게 된 이유도 당시에 당한 차별 때문이었겠지.
노인과 말하며 멍해진 헤르만의 모습을 구경하다가, 무의식적으로 점내의 시계를 보았다.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아, 시간이 너무 늦었네요. 공주님을 데려다 드리고 저택에 가면 자정이려나."
나는 주방장에게 식대로 은화 세 장을 건넸다.
"여기 대금입니다.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개업 후 첫 손님이 그 유명한 가정교사님과 공주님이시라니, 오히려 두 분께 만족을 드릴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주방장 노인의 종족은 고블린이지만, 그의 내면에는 한 명 요리사와 한 명 신사가 들어 있었다.
내 옆의 아셰리아 공주 역시 인사했다.
"너무나 훌륭한 식사였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다시 뵙겠습니다."
"허허, 다음에 또 오시게 되면, 그때는 새로운 요리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음식이 꽤나 아셰리아 공주의 마음에 들었나보다. 이 근처는 귀족 지구라 치안도 좋은 편이고, 내 저택에서는 멀어도 왕궁에서는 올만한 거리다. 시간이 여유로울 때 다시 와도 괜찮겠지.
"그럼 저희는 가보겠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우리는 인사를 끝내고 왕궁으로 향했다.
카페테리아 고 블링에서 동쪽으로 쭉 직진하면 왕궁의 정문이 나온다. 올 때는 티오리아 가문을 경유해서 와야했기에 꽤나 시간이 걸렸지만, 돌아가는 데에는 금방일 것이다.
왕궁에서 근무하는 귀족들이나 장교들이 많이들 사는 구역이라 그런지, 희미한 마력등이 우리가 가는 길을 밝혀준다. 나와 공주는 그 길 위를 나란히 손을 잡고 걷고 있다.
문득 의문이 하나 들었다. 고블린 주방장의 말을 들어보니, 지금껏 정신이 저 세상으로 가있는 헤르만의 상태가 이해되긴 한다. 하지만 공주는 고블린이 요리를 한다는 사실을 왜 이렇게나 덤덤하게 받아들인 걸까.
11살이라서 편견이 없다고 봐야하나... 그렇다고 보기에는 갓난 아기가 아닌 이상 고정 관념이 생기지 않을리는 없다. 오히려 어린 아이들에게 생긴 선입견은 가감없이 휘둘러지기에 무서운 법이다. 다른 아이들이었다면 방금 그 주방장을 보고 분명 놀라겠지.
그렇다고 내 수업 때문이라 생각하기엔 자의식 과잉이라는 느낌이 없지 않아 있다. 나는 아셰리아 공주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아셰라."
"네."
"방금 그 식당의 주방장이 고블린이라는 점을 어떻게 생각하셨나요?"
"방금 그분이요?"
공주는 음... 소리를 내며 생각하다 말했다.
"그분이 저희 테이블로 다가오셨을 때, 딱히 악한 분은 아닌 것 같았어요. 그래서 그분의 종족은 크게 의식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가요."
"네."
종족을 의식하지 않고 사람을 대했다는 점은 칭찬을 해줄만 하다. 한 개인의 선악은 종족을 가리지 않으니까.
하지만 악한 사람은 아닌 것 같다라... 겉으로는 멀쩡한데 속에는 시커먼 것을 숨기고 있는 사람은 어디나 많다. 이 사실만큼은 내가 살던 곳이든 에코니아든 세계를 가리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굳이 이걸 지금와서 충고한다면, 방금 그 고블린 주방장과 나눈 대화의 의미가 퇴색될 것 같다. 굳이 지금 말하지 않더라도 언젠가 가르치면 되겠지. 거기다 아셰리아 공주가 스스로 깨달을 수도 있는 일이다.
나는 잘한 부분을 칭찬해주기로 했다.
"종족이라는 테두리에 갇혀서 사람을 바라보게 된다면, 그 사람의 진면목을 볼 수 없어요. 잘 하셨어요, 아셰라."
"... 감사합니다, 선생님."
길을 걸으며 대답하는 아셰리아. 왕궁에서 나올때보다 발걸음이 눈에 띄게 가벼워진 상태다.
공주가 나를 올려다 보며 말했다.
"선생님, 언젠가 시간이 나면 그 식당에 다시 가보고 싶습니다."
"가고 싶으신 날이라면 말씀해주세요. 별다른 일이 없으면 또 가면 되죠. 아니면 전날 예약을 하고 가면 더 맛있는 걸 해주실 수도 있구요."
"그것도 좋은 생각이네요."
"음... 다음번에는 다른 학생분들도 다함께 오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아샤도 있고... 여러 사람 있잖아요? 지금 말할 수는 없지만."
알렉산더는 왕자인데다 기디언은 공작가의 아들이다. 이런 거리에서 말할 이름은 아니었다.
내 말에 아셰리아는 얕게 미소지었다.
"네, 그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후로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왕궁 정문에 도착했다. 아직도 근무중인 근위병에게 인사를 건네고, 신원 확인을 받았다.
그렇게 정문을 통과하고.
왕궁 중앙 정원을 가로질러.
거대한 본관 건물을 뒤로 하고.
후궁 건물 입구 근처에 도착했다.
헤르만은 중앙 정원에서 기다리는 상황.
아셰리아 공주는 후궁에 들기 전에 멈춰섰다.
방금 전의 미소는 가라앉아 평소의 무표정이다.
그리고 나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선생님께 여주어보고 싶은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괜찮을까요?"
"네, 괜찮습니다."
그녀가 오늘 그토록 고민하던 물음일까.
아니면 다른 질문일까.
"그게..."
잠시 시선을 돌리고 숨을 가다듬는 공주.
"혹시나 이곳에 오신 뒤로... 이전 세계에 돌아가고 싶으시다거나, 그립다는 생각을 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 가끔 이전 세상이 떠오르긴 하죠."
"……."
이전 세계에 돌아간다라...
친구들이 가끔 떠오를 때가 있다. 그 녀석들과 함께 놀던 때가 그립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거기다 가끔 꿈에 어머니가 나올 때마다... 지금은 한 줌 재가 되시긴 했어도, 당신의 영정 앞에서 향을 올리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나는...
그곳에서 할 수 있는 게 없었던 인간이다.
좋은 대학, 괜찮은 성적, 그럭저럭 넓은 인맥을 성취했어도 되는 건 없었다. 그런 내 인생의 성적표는... 그저 내가 속해있는 그룹 내에서의 평가일 뿐이었다. 막상 어려운 상황이 왔을 때 도움이 되는 것은 전혀 없었다.
그걸 깨달은 나는 술에 절어 살았다. 아마 에코니아에 오지 않았더라면 언젠가 어머니와 살던 방구석에서 쓸쓸하게 죽지 않았을까. 어머니는 그런 걸 바라시지 않을거지만 말이다.
어찌 보면 이 세계, 아니 아셰리아는 날 두 번 살린 것이다. 게임 속 아셰리아 여왕은 부조리한 세상에 눈을 돌리려던 어린 시절을 지나게 해주었고, 지금 내 앞에 있는 아셰리아 공주는 당장에 살아갈 목표를 주지 않았나.
"하지만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한 적 없어요."
그렇기에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제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니까요."
아셰리아 공주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인사를 하며 말했다.
"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별로 어려운 질문도 아니었는걸요."
"... 그랬군요."
공주는 반쯤 뛰는 듯이 후궁으로 들어가다...
무언가 잊었다는 듯이 나를 뒤돌아 보았다.
"선생님,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알았어요. 공주님도 얼른 주무세요."
"오늘 감사했습니다."
다시 한번 인사를 하고...
공주는 건물로 사라졌다.
후궁 앞뜰에는 나만 남게 되었다.
결국, 아셰리아 공주의 고민은 무엇이었을까.
잘은 모르겠다.
하지만 마지막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왕궁 정문 방향으로 몸을 틀며,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제 돌아가서 마법 공부도 좀 하고, 다음 수업 준비도 하고, 루트도 정리해둘까."
아무도 듣는 사람은 없다.
순전히 나 자신에게 하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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