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왕실의 가정교사-63화 (63/215)

〈 63화 〉 2­27. 삶의 증명

* * *

2­27. 삶의 증명

꿈.

이곳에 온 뒤로 꿈을 자주 꾼다.

굳게 닫은 방문.

그 뒤에 웅크린 소녀.

무표정한 얼굴로 바닥을 멍하니 보고있다.

방문 너머에는 어김없이 그 짐승이 있다.

방의 문고리가 난폭하게 흔들리고.

뜻대로 되지 않자 짐승은 작게 욕을 내뱉는다.

... 저러는 걸 보니.

그 년이 집을 떠난지 꽤 지난 시점인 것 같다.

짐승의 발소리는 문에서 멀어진다.

집안의 수납장을 열고닫는 소리가 들린다.

아마도 방문 열쇠를 찾는 것이겠지.

다행히도 그 열쇠는 소녀의 손에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술에 취했어도 열쇠를 찾을 정신은 있다.

그 모순은 소녀의 마음 속 혐오감을 키운다.

잠시 후...

짐승은 코를 골며 잠에 빠져들었다.

그 짐승의 행동 패턴 중 하나다.

이제 늘어지게 자다 일어나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목욕을 하고

소녀에게 아무 말 없이 집을 나서게 된다.

아주 먼 옛날에는 미안하다는 말이라도 했었지만, 언젠가부터 그마저도 하지 않는 짐승이다.

그래도 소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오늘은 다행히 넘어간 것 같기 때문이다.

그 무서운 일을 또 당하기는 싫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내일은 있는 법.

원래 희망을 바라는 상황에서 쓰이는 말이다.

하지만 지금 소녀에게는 어떤 의미일까.

내일을 생각하며 소녀는 다시 우울해졌다.

이 시간을 다시 겪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끝낼 생각은 이미 여러 번 해보았다.

하지만 소녀가 저지른 잘못이란 없었다.

오히려 자신을 낳은 것들의 잘못이 아닐까.

왜 잘못도 없는 자신이 죽어야만 하는가.

그런 생각을 한 뒤로 그 발상은 접었다.

지긋지긋한 생활을 어찌 해야 끊을 수 있을까.

살기위한 고민을 끊임없이 이어나간다.

* * *

창 밖에서 들려오는 새들의 지저귐.

그 소리가 내 잠을 깨웠다.

눈을 뜨니 조선시대 건축 양식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나무 천장이 나를 반긴다. 주변의 창문과 방문은 종이가 발라진 미닫이문이다.

나란 년은 온돌방의 바닥에서 이불을 전부 차버린 채 굴러다니고 있었나 보다. 아무리 온돌방이라 하더라도 바깥은 찬바람이 쌩쌩부는 겨울. 온돌방의 바닥에 닿은 부분만이 덥고, 그렇지 않은 피부는 차갑게 식은 상태였다.

알고 있는가.

춥게 자면 악몽을 더 자주 꾸는 체질이 있다.

그게 나다.

나는 낮은 목소리로 욕을 내뱉었다.

"씨발."

그 시절의 꿈이라니.

이미 오랜 옛날 일이다.

거기다 흔한 일이었다.

벌린 년은 도망치고, 싸지른 놈은 휘두른다.

그저 어디나 있는 흔하디 흔한 집안.

나는 그런 곳에서 태어났고 또 살아 남았다.

"지금 몇 시지?"

나도 모르게 내뱉은 혼잣말과 함께 전통가옥에 어울리지 않는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이미 시침은 11시를 가르치고 있었다.

"약속을 잡아뒀으니까... 준비나 하자."

이 나라의 여관은 전통적인 건축 방식을 보전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편의성을 갖추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욕실에는 마법진으로 작동하는 변기와 세면대, 목욕통, 조명이 설치되어 있다. 거기에 거울이나 수납장처럼 현대 가정집의 화장실에 필수적으로 있어야 할 것도 전부 갖추어져있는 편이다.

오늘은 고위 귀족과 마주해야 하는 날.

목욕 정도는 하고 가는 게 좋을 것 같다.

자연 마법으로 목욕통에 물을 받은 뒤 적절한 온도로 데운다. 입욕을 위해 옷을 벗으니 거울 속의 그녀도 알몸이 되었다. 왼팔에 탁한 초록색으로 새겨진 뱀 문양이 눈에 띈다.

"남의 피부에... 촌스러워."

이상한 메시지 하나를 받고 이 세계에 떨어진 것도 웃긴 일인데, 어딘가 미쳐있는 마녀년이 내 팔뚝에 낙인까지 새겼다.

이 문양을 새길 때 느꼈던 그 음습함은 아직도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전신에 뱀이 스멀스멀 기어다니는 기분이었다. 덕분에 마력을 빠르게 습득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걸 볼 때마다 기분이 나빠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숙소에서 제공하는 꽃잎 몇 개와 난초 가루를 욕탕에 뿌리니 좋은 향이 올라왔다. 이런 사치는 참을 수 없는 법이다. 나는 바로 몸을 담갔다.

"하아..."

자연스레 나오는 기분좋은 한숨.

큰 숨을 들여마시고 목욕통 안에서 잠수했다.

물의 흐름이 내 전신을 안락하게 감싸준다.

…….

물 속은...

편안하다...

* * *

나는 목욕을 마친 후 옷을 갈아입었다.

얇고 딱붙는 재질로 가슴을 가리면 다행일 정도로 길이가 짧은 저고리. 과도하게 풍성한 치마를 연출하기 위해 안쪽에 채워넣은 수많은 속옷.

목이 뻐근해질 정도로 무거운 가체. 그 위에 얼굴을 가릴 수 있는 천이 덧대어진 전모. 거기에 가야금을 넣어다니는 가방까지.

전체적으로 검은 색이 기본이 되긴 하지만, 조금씩 내 취향의 푸른 색이 섞여있는 기녀복이다. 이 나라에서 높으신 분들의 거처에 출입하기엔 이것만한 옷이 없다.

하지만 기녀라...

기분이 안좋아졌다.

방금 전에 꾼 꿈의 영향도 있고, 가장 급이 낮은 기녀들은 매춘을 하는 자들이다보니 자연스럽게 떠오를 수 밖에 없다.

... 책임질 생각도 없이 가랑이나 처벌리고, 아무 생각도 없이 애를 낳은 년이 떠오른다.

"후우... 잊자, 잊어."

부정적인 생각을 지우고 오늘의 할 일을 다시금 떠올린다. 그리고 나는 숙소를 나섰다.

숙소 밖 거리는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 촬영 현장에 온 것만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이 나라의 정치 체제, 경제 구조, 생활 전반을 관통하는 문화는 조선 후기에 닿아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곳은 조선이 아니다.

게임 에코니아 아포칼립스 첫 DLC의 배경이 되난 곳. 다섯 나라들 중 에우데미아에 이어 두번째 절망이 펼치지는 나라. 동방의 혜세국이다.

내가 찾아가는 곳은 현 명월주의 외가이자 처가. 권세를 잡기 위해 외조카인 명월주를 억지로 자신의 친딸과 결혼시킨 인간의 집.

혼인을 올린 두 사람간에 사이는 막상 좋다. 하지만 그걸 위해 그 인간이 벌인 일들이 적당히 잔인했어야 말이지... 지금부터도 꽤나 많은 짓을 저질러주실 예정이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을 걸으니... 높은 담장이 끝이 안보일 정도로 길게 뻗은 집이 보인다. 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어떤 일로 오셨소?"

두 명의 보초병 중 나이가 조금 더 있어보이는 남자가 나에게 물었다. 원칙적으로 개인의 사병 소유가 금지인 나라지만, 사병이 보초를 서고 있는 것을 보면 이 집안의 권세를 보여준다.

"대감과 약속이 있어서요."

"... 알겠소."

* * *

"이곳에서 기다리십시오."

보초병들에게 안내받은 공간은 사방이 뻥 뚫린 누각. 작은 호수처럼 보이는 연못 위에 지어져 있어 바람이 차갑게 불어온다.

나는 어깨 뒤로 메고 있던 가야금 가방을 풀어 가슴에 안은 채, 사람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고.

스무 명 이상의 사병과 함께 그가 도착했다.

조선시대 높으신 분들이 입을 법한 붉은 도포.

남성성을 상징하는 정자관(?子?)

노화로 인해 회색이 되어버린 머리와 수염.

화를 잘 내는 노인을 상상하면 딱인 얼굴.

사병과는 별개로 젊은 무인 둘도 동행한 상황.

그는 오자마자 나를 얕잡아 보듯 말했다.

"네가 4년 전 일을 상세히 안다는 그 년이더냐."

현 명월주의 장인. 김원상.

그는 4년 전 일에 민감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자신의 외손녀이자, 현 명월주의 둘째 공주인 선의 왕위 세습을 위해... 첫째 공주, 윤을 죽였기 때문이다.

물론 대놓고 죽이지는 않았다.

김원상은 정치적인 문제를 이리저리 엮어서 9살 꼬맹이를 죄인으로 만들었고... 어떤 불쌍한 아이는 뙤약볕이 내려쬐는 뒤주 속에서 죽었다.

"뭣들 하느냐. 저 년을 에워싸라."

김원상의 말에 사병들이 나에게 다가온다.

젊은 무인은 김원상을 옆에서 지키고 있다.

저 노친네는 대화할 생각이 애초에 없었나보다.

'그래도 이 정도로는 부족하지...'

나는 가야금 가방에서 검 한 자루를 빼들었다.

내가 뽑은 검의 검신은 바탕이 검푸른 색을 띄고 있으며, 중앙에 푸른 번개가 그려져 있다.

그리고 익숙하게.

나의 심상마법을 발동했다.

"커헙!"

"으으읍!"

사병들의 얼굴에 큰 물방울이 하나씩 생겼다.

그 물방울은... 숨쉴 권리를 서서히 앗아간다.

당연하게도. 풀어줄 생각은 없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짐승들을 상대하며 깨달은 게 있다.

얕보여서는 잡아먹히게 된다.

내가 먼저 물어뜯지 않으면 죽게 된다.

나는 그렇게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이 간단한 깨달음은...

내가 살던 고향 세계던,

이 뒤틀려있는 에코니아던,

모든 세상에 적용되는 공통된 원칙이다.

검에 전격을 두르고 김원상을 향해 쭉 뻗었다.

그 상태로 말을 시작했다.

"4년 전. 윤을 모시던 유모는 도망쳤지."

"... 무엇을 말하려는 게냐."

내 눈앞에 있는 중년 남성의 안색이 바뀌었다.

별 감흥이 없던 얼굴에 당황이 떠올랐다.

당연하지. 세상에는 1공주의 사람은 전부 죽은 걸로 알려져있으니까. 하지만 공주를 모시던 유모는 에우데미아에 멀쩡히 살아있다.

슬럼가에 조그마한 빵집을 운영하면서.

거기다...

뒤주 속에서 죽은 꼬마는 그저 대역일 뿐.

그녀가 모시던 1공주, 윤 역시 살아있다.

"계속 찾고 있었지?"

"……."

사병들은 전부... 축 늘어진 오징어처럼 변했다. 마력으로 신체를 강화했어도 숨을 못 쉬는 것에는 어쩔 도리가 없는 법이다.

그 모습을 본 김원상이 자신을 호위하도록 대기시켜둔 두 젊은 무인에게 말했다.

"너희 둘은 물러가라."

"... 위험합니다."

"그래. 한 손을 내젓는 그 짧은 시간에 물을 조절하면서 검에는 강력한 뇌기를 두르기까지, 저 여자는 무시못할 심상마력 사용자다. 그렇기에 너희 둘로는 대항할 수 없지."

"……."

"대화를 할 뿐이다. 여러번 말하게 하지 마라."

"... 알겠습니다."

두 무인이 물러나고.

누각에 널부러진 시체들을 사이에 두고...

나와 김원상, 두 존재만이 숨을 쉬고 있다.

무인들이 멀어지는 걸 확인한 김원상이 말했다.

"... 다른 이들은 물렸다. 본론을 말하라."

"공주가 살아있다는 것도 알고 있지?"

"... 그렇다."

"용병을 보내 그녀를 계속해서 찾고 있었고..."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동방 혜세국에 악역 여왕이 탄생할 단초를 심어두기 위함이다.

이것은 원래의 역사. 예정된 파멸.

그 초록 마녀년이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언제나 이 세계의 끝을 보고 싶었다.

에코니아의 파멸은 내 삶을 긍정받을 수단.

그 과정을 내 손으로 직접 만들게 되다니...

차오르는 흥분에...

그만...

싸버릴 것 같아.

... 하지만 지금은 참아야겠지.

"내가 첫째 공주의 위치를 아는데..."

"……."

둘째 공주 선.

김원상의 외손녀.

4년 뒤. 정확히는 3년하고도 3개월 뒤.

그녀는 혜세국의 대표로서 에우데미아 왕국의 아레트 아카데미로 유학을 가게 된다.

그리고 우연히... 어릴 적 자신에게 친절했던 언니가 머나먼 타국에서 끝내 죽었음을 알게 된다.

배가 다른 언니긴 하지만...

선을 결함품처럼 취급하던 외척들 따위보다 자신에게 훨씬 친절히 대해주던 언니, 윤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복수를 다짐하게 된다.

어머니를 제외한 모든 외척을 죽이기로.

뱃속에 든 것이 욕심 뿐인 그 벌레들을 전부 자신의 손으로 죽이기로.

그 벌레들 중에는...

내 눈앞의 김원상 역시 포함되어 있다.

물론.

그건 이 노친네에게는 안 말해줄거야.

그래야 자신의 추악한 속을 보일거고

나에게는 그 편이 훨씬 흥미로우니까.

거기다...

그 길 만이.

내 삶이 옳았음을 증명해주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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