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왕실의 가정교사-64화 (64/215)

〈 64화 〉 2­28. 함께 하고픈 욕심.

* * *

2­28. 함께 하고픈 욕심.

슬럼가의 작은 빵 가게. 그곳에 사는 소녀, 혜윤은 건국제 이후 끊임없이 고민해왔다.

그리고 지금.

그 고민은 결론에 다다랐다.

"유모."

"네, 아가씨."

"... 이제 왕도를 떠날까?"

"……."

넷째 아이라는 평범한 이름을 가진 유모, 사아(四?)는 주인이 언젠가 이 말을 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윤 아가씨는 언제나 타인에게 민폐를 끼치기 싫어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가끔 찾아오는 알렉이라는 귀족... 사아로서 믿기지는 않지만, 아가씨의 추측으로는 이 나라의 왕자일 것이라고는 한다. 아마도 그가 같은 귀족 사이에서 생활하기를 바라시는 거겠지.

혜윤은 말을 이었다.

"도망칠 때 챙겨온 어머니의 패물이 조금은 남아있어. 여기서 처분할 수 있는 것만 얼른 팔고 떠나자."

"아가씨, 만약 왕도를 떠난다 해도 어디로 가실 작정이십니까. 에우데미아 안에서 왕도를 제외하면 안전하다고 할 수 있는 곳이 없어요."

"다른 작은 영지로라도..."

"안 됩니다. 김원상 그 자는 성정이 포악하여 쉽게 포기할 인물이 아닙니다. 지금쯤이면 국내는 샅샅이 뒤졌을테니 타국도 살피겠지요. 왕도의 슬럼가에 정착한 것은 위장을 위해서긴 했지만, 치안 문제도 생각했던 게 아니었습니까."

처음 이곳에 정착한 이유.

그 중 첫번째는 왕도의 치안 본부였다. 새로이 왕도에 찾아온 이들은 하나같이 입장 심사를 받게 된다. 만약 심상 진단용 수정구를 동반한 입장 심사에서 결함이 발견된다면, 그 사람은 어김 없이 헬창 대원들에게 끌려가게 된다.

거기다 입장 심사를 제외하고 생각하더라도, 왕도 아레트의 치안은 세계 제일이라고 불리운다. 그만큼 살수들의 활동은 어려울 것이다.

두번째 이유는 당연히 눈속임을 위함이다. 지금은 이런 삶을 살고 있어도 일국의 공주였던 혜윤이다. 살수들은 혜윤이 비공식적으로 망명했을 가능성도 고려해야 할 터. 그런 점에서 슬럼가는 우선 순위에서 낮은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이런 두가지 이유를 들면서 이곳에 정착하자고 주장했던 것은 혜윤이었다. 그랬던 그녀가 앞뒤를 가리지 않고 거처를 옮기자고 한다니. 혜윤을 어렸을 적부터 키워온 유모, 사아로서는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는 짐작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사아의 마음은 모르고 혜윤이 말했다.

"굳이 에우데미아가 아니어도 되니까... 뭣하면 혜세국에서 가장 거리가 먼 수인국이나 그 근처의 마왕령이라도..."

"아가씨. 정말 안전이 문제가 되어 거처를 옮기자고 하시는 것이라면, 저는 따랐을 겁니다."

"……."

혜윤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런 혜윤에게 사아가 말했다.

"그 귀족 남아와 함께 하시는 순간만큼은 아가씨께서 행복해보이십니다. 그런데 왜 그 자와 거리를 두려고 하시는겁니까."

에우데미아는 신분의 격차가 나도 서로에게 감정만 있다면 결혼까지도 할 수 있는 나라.

사아는 그렇다고 하여 혜윤이 귀족 하나를 꼬드겨 잘 살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만약 사아가 그런 속물적인 사람이었다면, 남겨진 가족들의 목숨을 걸고 이렇게나 먼 타국까지 도망쳐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저 자신의 주인이 지금처럼...

사이좋게 지내는 친구가 하나라도 있는 생활이 길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더 큰 것이다.

그런 사아에게 시선을 돌린 채 혜윤이 말했다.

"나는 존재 자체가 폭탄과도 같은 사람이야."

"……."

이번에는 사아의 말문이 막혀버렸다.

죽은 것으로 알려진 혜세국의 제 1공주. 그 존재가 밝혀지는 순간 그녀의 보호자는 곤란해질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 당연한 이치는 사아 역시 알고 있다.

"진정으로 친구가 잘 되기를 원한다면, 그 사람의 꿈을 도울 수 없다면, 그리고 언젠가 할 이별이라면. 되도록 빨리 하는 게 나아."

언젠가 할 이별.

그 사실을 알고 있다면 빨리 하는 게 덜 아프다. 늦어서 추억이 더 쌓이면 더 아플 뿐이니까.

이미 주인이 걷고 있던 길이기도 하기에, 사아는 혜윤에게 그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적막한 시간이 지나가고 있을 무렵...

밖에 손님이 도착했다.

"혜윤. 오늘은 시간 괜찮아?"

알렉산더 에우데미아.

혜윤의 하나뿐인 친구였다.

찾아오지 말라는 말을 애둘러서 했는데도, 이후의 이틀을 제외하면 계속 찾아오는 그였다.

혜윤은 고민하고 있는 유모에게 말했다.

"... 어머니. 준비는 해둬야할 것 같아요."

"알았어."

사아는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답을 들은 혜윤은 알렉산더에게 말했다.

"그래, 오늘은 어디 가려구?"

"음... 오늘은 서쪽 정문 근처로 가보려고 해."

"여기서는 꽤나 먼 곳이네. 가보자."

남은 시간만이라도 잘 보내야지. 혜윤은 이런 생각을 하며, 애써 밝은 티를 내기로 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떠나가고.

"후우..."

남겨진 사아는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 * *

내가 널 떠나겠다고 결심한 날.

그 날은 건국제의 밤이야.

내가 감히...

너와 함께하고 싶다는 욕심을 가지게 된 날.

너는 그게 언제인지 알고 있을까.

그 의상점에 갔을 때야. 알렉산더.

* * *

"거기 자네, 실례하네. 이 근처에서 가장 옷을 잘 만드는 의상점이 어디인가?"

"... 누구십니까?"

저 바보는 언제쯤 자신의 신분을 유연하게 숨길 수 있을까. 길가는 사람에게 저런 말투로 물으면 당황할 수 밖에 없잖아... 벌써 나와 다닌지 열흘은 된 것 같은데, 변할 기미가 안보인다.

그렇다고 내가 끼어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슬럼가에 사는 아이로서 어울리는 옷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괜스레 끼어들어봐야 알렉산더는 빈민을 데리고 다니는 괴짜 귀족 취급을 받을 것이 분명하다.

나로서는 알렉산더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말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 말투."

"아."

알렉산더는 이제야 깨달았나 보다.

... 이 바보는 함께 다닌 둘째 날부터 자신이 왕자라는 사실을 들켰다는 걸 알고는 있을까.

첫 날에는 별다른 호위도 없이 대금화를 들고다니지를 않나, 그 다음날에는 자신도 모르게 국왕을 아바마마라고 부를 뻔하지 않나.

그 뒤로 돌아가는 걸 몰래 따라가보았더니 왕궁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물론 그곳에 산다고 죄다 왕자는 아닐 것이지만, 국왕을 아바마마라고 부르는 사람은 분명 왕자겠지.

거기다 가명을 쓸거면 알렉산더 중에 두 글자를 따오지 말고 다른 이름을 썼으면 한다. 알렉스라는 가명은 너무 티가 나잖아...

정말이지 어딘가 허술한 왕자님이다.

그러면서 백성의 삶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고 싶다던가... 그런 말을 자신도 모르게 해버리면 나로서는 이리저리 신경쓸 수 밖에 없다.

바보스러운 동시에 순수한 모습이...

동생을 떠오르게 하기 때문이다.

"음음... 혹시 이 근처에서 평민들의 옷을 파는 곳 중에, 가장 질이 좋은 곳이 어딘가요?"

"... 「오트 쿠튀르」. 에퀼리아 복식의 옷을 파는 가게인데, 질이 좋은 건 확실해."

"혹시 방향도 가르쳐 주실 수 있을까요?"

"거길 진짜 가려고?"

알렉산더의 질문을 받은 행인은 찝찝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그런데 진짜 가려는지는 왜 물어보는 걸까. 혹시 방금 말했던 가게가 약간 이상한 곳이기라도 하려나.

잠깐 고민하던 행인은 말했다.

"... 모르겠다. 저기 골목으로 들어가서 오른쪽으로 틀면 바로 보여."

"감사합니다!"

영 좀 수상한데...

내가 행인을 미심쩍게 바라보고 있었더니, 옆에서 알렉산더가 말을 걸었다.

"혜윤, 그럼 가보자!"

"알렉스. 그런데 갑자기 의류점은 왜?"

"너와 다닐 때 같이 입고 다닐 옷을 사려고."

하긴, 나랑 다니는 게 부끄럽겠지. 사실 이런 옷을 입고 왕자님과 온 동네를 다녔다는 사실이 기적이다. 실제로 이상한 눈길로 우리를 보는 사람들은 언제나 많았다.

... 나라의 국왕이 알면 나는 에우데미아 자객들에게 쥐도새도 모르게 처리당하는 게 아닐까.

옷을 사는 게 좋을 것 같긴한데... 이 곳의 가게는 조금 비쌀 것 같았다. 유학생들이 많아 물가가 높은 구역이니까.

나는 알렉산더에게 말했다.

"... 비싸지 않을까?"

"괜찮아. 돈은 충분히 있으니까."

철없는 왕자님은 내가 처음 만났던 날 선물로 준 복주머니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 내 동생이 만들어줬던 복주머니다.

더이상 옛날 일을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 알렉산더에게 줘버린 물건이기도 하다. 주머니는 첫 날에 비해 가벼워 보이긴 하지만, 아직도 꽤나 많은 돈이 차있는 것 같다.

저걸 다 쓰게되면 이제 볼 일은 없겠지.

아마도 이 바보는 내가 한 말에 터무니없는 의무감을 느껴서 계속 찾아오는 것일 게 분명하다.

"그래, 가자."

"알았어."

왜냐하면... 알렉산더에게 있어 나는 수많은 백성들 중 하나일 뿐이니까. 결코 그는 혜윤이라는 사람을 온전하게 바라봐 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 * *

그렇게 도착한 의류점.

「오트 쿠튀르」

점내의 분위기는 꽤나 밝고 고급스러웠다.

여기저기 옷들이 걸려있는데, 제일 싼 옷의 가격이 은화 두 장 정도였다. 거기다 마법진이 그려진 보호 수트까지 파는 걸 보면, 꽤나 능력있는 재단사가 운영하는 곳 같다.

어린 시절, 부친께서 나를 조금이라도 안전하게 해주려는 명목으로 이런 옷을 입힌 적이 꽤나 있었기에 어느 정도 보는 눈은 있다.

옷들을 가볍게 둘러보고 있자 여점원이 다가와 우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사실 우리가 아닌 알렉산더를 보면서 한 인사다.

"안녕하세요. 어떤 옷을 찾으러 오셨습니까?"

"여기 있는 혜윤이 입을 옷을 사러 왔습니다."

"음... 그런가요."

"저와 함께 다닐 수 있는 정도면 됩니다."

... 역시나.

"보호 마법진이 새겨진 옷을 원하시나요, 아니면 평범한 일상복을 원하시나요?"

"음... 평범한 일상복으로 주세요."

"알겠습니다. 디자인은 어떻게 하실래요?"

"혜윤, 아무래도 직접 고르는 게 낫겠지?"

"... 그래."

... 나는 그저 왕자님이 하자는대로 하면 되겠지. 비위만 맞춰주면 될 일이다. 어렵지 않다.

나는 점내에 있는 여러 옷들의 디자인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거기 있는 옷들 중 가장 무난해 보이는 하얀 원피스를 골랐다.

"이거면 돼."

"음, 입어봐야하지 않겠어?"

"……."

내가 이런 옷을 시착해도 될까.

이럴 줄 알았으면 오늘은 씻을 걸 그랬다.

기초적인 자연마법은 쓸 수 있어서 물을 만들어 낼 수는 있지만, 슬럼가에서 마법을 쓴다는 사실이 발각되면 여러모로 귀찮아진다.

얼마 전 폭력 집단이 죄다 검거되긴 했어도, 주변 사람들에게 들키면 죄다 물을 만들어 달라 할 것이다. 마력을 많이 사용하면 쓰러진다는 사실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일테니까. 그러다 보니 씻는 것 조차 몰래 씻어야한다.

오늘은 씻은 지 사흘째가 되는 날인가... 시착 한번에 이 깔끔한 옷은 냄새가 베여버릴 것이다.

옷을 들고 고민을 하고 있었더니...

어디선가 바퀴가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외침이 점점 커진다.

"20년 장인의 가게에서 시착은 손님의 권리다!"

바퀴 달린 의자가 한쪽에서 굴러왔다. 그 위에는 동그란 원통형 모자에 알이 하나밖에 없는 안경을 끼고 있는 노신사가 타고 있었다.

옆에 있는 점원이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저희 사장님이십니다."

... 방금 그 행인은 이래서 이 가게를 말하지 않으려 했나 보다.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의자를 전차라도 되는 것처럼 타고 온다니.

... 머리가 많이 아프신 분일까.

노인은 나와 알렉산더를 살펴보다가 말했다.

"꼬마 숙녀께서는 어서 시착하러 가게!"

"그렇지만..."

"손님에게 시착은 권리야! 시착실은 저쪽!"

"... 네."

말해봐야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노인이 손가락으로 가르킨 시착실로 들어가 문을 걸어잠근 다음, 방금 고른 원피스를 두손으로 들어 올려 보았다. 정말이지 새하얗다.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옷은 서로 다른 색깔의 천을 여기저기 덧대어 바늘로 기운 흔적이 있는 옷. 유모가 비슷한 색을 맞추려고 노력은 했지만, 그래도 가까이서 보면 티가 날 것이다.

사실 돈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그래도 도피행이 언제까지 지속될 지 모르니까 뭐든 아껴써야 하는데다, 이런 옷을 입어야 위장이 된다.

그건 알고 있지만...

새하얀 옷과 누더기 옷.

내 인생이랑 비슷하네...

분명 이 옷의 가격은 혜세국의 공주 시절에 입던 옷의 1할도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인지... 이 옷을 붙잡고 인생을 고민하는 나 자신이 더욱 처량하게 느껴진다.

한참 고민을 하고 있었더니...

밖에서 두 사람의 대화가 들려온다.

"너는 왜 저 꼬마 숙녀에게 옷을 사입히려는 것이냐? 그저 단순한 소일거리로 저 꼬마 숙녀를 데리고 다니는 귀족놈이라면 옷을 팔 수 없다."

…….

하필이면 지금.

저런 질문을 들어 버리니...

눈에 습기가 차려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 옷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더해졌고, 새하얀 원피스에 구김이 져버렸다.

"그저 단순한 소일거리가 아닙니다. 그녀는 제 둘도 없는 친구이자 동행입니다."

"그래. 네 말이 옳다고 하자. 그렇다면 저 소녀와 함께 다니면서 받게 되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부끄럽기라도 한 것이냐?"

"... 스승님께서 가르쳐주셨습니다. 오직 한 면을 보고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는 법. 입고 있는 옷 하나로 사람을 전부 알 수는 없습니다."

"……."

"혜윤의 진가도 모르면서 험담을 내뱉는 자들은 그녀의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자들입니다. 생각이 짧기에 험한 말도 함부로 하는 것이겠지요. 그렇기에 부끄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의 습기는 물방울로 변해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걸 닦을 겨를이 없었다.

바깥의 대화에 집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저는 그녀가 그런 험담으로부터 자유롭길 바랍니다. 저는 그녀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하며 여러가지를 보기 위해 옷을 사러 왔습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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