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왕실의 가정교사-65화 (65/215)

〈 65화 〉 2­29. 어려운 미래

* * *

2­29. 어려운 미래

어렸을 적부터, 나의 부친이신 현 명월주께서는 내 약혼을 위해 귀족과의 만남을 여러번 주선하셨다.

아이들을 동반한 부모간의 모임. 그곳에서 자연스럽게 어린 남녀 둘이서 시간을 보내도록 하는 그런 만남이었다.

지금와서는 이해하고 있다.

부친께서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대신해내 주변을 지켜줄 벽을 세워주고 싶으셨던 것이다.

부친으로서는 그 정도가 최선이셨을 것이다.

그 때의 내 입장은 물론 좋지 못했다. 능력은 뛰어나다는 평이 있지만, 정치적인 배경이 없어 차기 명월주가 될 가능성은 전혀 없는 첫째 공주.

그런 공주와의 약혼을 자처하는 자들의 속셈이야 뻔했다. 그저 부친과의 연결고리를 만들기 위함이거나, 혹은 실현되지 않을 확률에 걸어보는 도박을 해보기 위함이었겠지.

물론 어린 나는 그런 사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저... 약혼을 하겠다며 찾아온 남자들이 왠지 모르게 싫었을 뿐이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남성들은 하나같이 별 것도 아닌 일들을 늘어놓으며 자신을 치켜세우기 바빴다. 그러면서 자신을 선택하라 했다. 하지만 어린 나에게는 그런 하찮은 사람들보다 부친이 훨씬 대단해보였다.

나와 비슷한 나이의 남자 아이들은 대부분 이 약혼을 성사시켜야 한다며 나에게 부탁해왔다. 해봐야 예닐곱살 아이들일 뿐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하나같이 가문의 어르신들이 시킨 일이라고들 했다.

나는 그저 신분의 격차를 한번에 매워줄 수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들은 전부 나라는 인간을 보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는 모든 약혼을 거절했다.

자연스럽게 내 주변에는 힘이 모이지 않았고, 그 결과로 나는 모함을 당해 이 꼴이 되었다. 그래도 나는 약혼을 거절한 일을 후회하지 않았다.

내가 후회하는 일이 있다면... 어린 시절부터 내 시중을 들어온 견습 나인, 죄도 없는 유나가 나를 대신해 죽었다는 것. 그 외에는 분명 없었다.

하지만...

"혜윤아. 점심 식사를 해야할 시간인데... 저번에 갔었던 혜세국 전통 식당에 갈까? 그때 너가 마음에 들어했었잖아."

"... 그랬나?"

"그 볶음 요리를 좋아하던 것 같았는데..."

"……."

하지만.

지금은 후회하게 된다.

만약 내가 약혼을 기반으로 나 자신의 몸 하나만이라도 건사하게 지킬 세력을 구성했더라면.

내가 아직도 그곳의 공주로 남을 수 있었다면.

만약 살아남아서 이곳에 유학을 오게 되었다면.

너와 대등한 관계로 만날 수 있었을까.

"아니면 다른 곳에나 갈까?"

"... 아냐. 그런데 거기 조금 비싸지 않았어?.

"아직도 돈은 많이 남았는걸."

저 주머니의 무게는 우리 관계의 수명.

처음 만났을 때와 비교하면 많이 가벼워졌다.

나는 분명 저 무게가 빨리 줄기를 바래왔었다.

내가 봐온 이들은 전부 거기서 거기였으니까.

사람들은 타인을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본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자신의 감정을 위해.

자신의 이상을 위해.

그 목적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너 역시 마찬가지일 줄 알았다.

하지만 너는 나를 온전히 바라봐주었다.

그 사실이 너무나 고마워서...

주머니가 더는 가벼워지지 않길 바라는,

욕심이 생겼었다.

그 욕심을 자각한 동시에...

건국제의 밤에 깨달아버렸다.

너와 다르게 지금의 나는

널 온전하게 볼 수 없는 사람이라고.

너와 미래를 함께 할 자격이 없는 여자라고.

그러니까 나는 널 떠나려고 해.

조금 더 욕심을 부리다가...

더 늦어버리기 전에.

* * *

[시하 시점]

나는 지금 날아가고 있다.

자의로 날아다니는 건 아니다.

... 방패에 치여서 날아가고 있다.

"켁."

등에 부딪힌 땅의 단단함.

그 충격에 폐부에 있던 숨이 빠져 나온다.

그리고 서관 훈련장 바닥을 추하게 굴렀다.

그런 나를 보고 어거스트 기사단장이 말했다.

"자네. 이제 그만 쉬도록 하게나."

"헉... 허억... 우웩..."

"... 그러게 진즉이 그만할 것이지."

고개를 숙인 채로 참고 있던 숨을 가프게 몰아 쉬다보니, 목에 무언가 이물감이 느껴지면서 구역질을 나기 시작했다.

그런 내 모습을 주변에서 지켜보고 있던 아일라가 다가와 컵 하나를 공손히 내밀었다.

"공작님, 여기 물이요."

"... 고마워."

시원한 물로 목을 적시니 살만해졌다.

아일라는 훈련장 구석에서 초급 마법을 연습하고 있었다. 지난 며칠간 어떻게든 가르쳐 보았는데 나름대로 재능이 있어보였다. 이 물도 아일라가 만든 것이다.

물을 마시며 숨을 고르고 있었더니, 멀리 서있던 기사단장이 다가왔다. 그는 전신 갑옷을 입은채, 몸을 전부 가릴법한 방패를 들고 있다.

"왜 그렇게 극성인겐가. 자네가 이곳에 표류한지 겨우 두 달도 채 안됐네. 그렇게 빨리 강해져서 도대체 무엇을 하려고."

"하하... 어떤 일이 생길 지 모르니까요. 강해져서 안 좋은 건 또 아니지 않습니까."

"... 그건 맞네만."

발람을 이긴 건 그 멍청이가 선수를 양보해주었기 때문이다. 그 방심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거기다 그 발람보다 강한 자들은 많고, 그 중에는 악역도 많다.

나는 그들과 적대하게 되더라도 전부 쳐낼 무력을 갖추어야만 한다.

... 이제 197년이 되기까지 단 3주만이 남았다.

나에게는 본편까지의 시간이 3년 남짓 뿐이다.

내 타는 속을 모르는 기사단장이 말했다.

"그래도 자네는 차근차근 해야하네. 자네의 담력과 이해력은 뛰어나지만 충분한 경험을 쌓아가면서 차근차근 해내야 돼. 강해진다는 것은 장거리를 천천히 달려야하는 법이야."

"하하하..."

말리는 것 같긴 해도, 기사단장은 내가 훈련을 부탁할 때마다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원래라면 내 수업일과 일정이 겹치던 그였지만, 국왕과 당번을 바꾸기까지 하며 날 도와주고 있다.

왕국의 최강자들 중 한 명이라 평가되는 그이다보니, 훈련 도중 건내주는 말 몇 마디가 나에게는 큰 도움이 된다.

"자네는 체스판 위에서 말을 움직이듯 전투에서의 경우의 수를 하나하나 생각하지. 하지만 싸움이라는 건 공평하지 않아. 자네의 방식은 무공에 미친 놈들이나, 수인들처럼 타고난 신체능력으로 밀어붙이는 놈들과는 상성이 최악이네."

"……."

어거스트 기사단장이 말하는 부류와의 싸움에서 내 반사신경이 따라갈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아무리 미리 생각하고 움직여도 타고난 사람들의 속도는 따라잡을 수 없다. 그 이유로 하던 운동도 관두었던 나다. 잘 알고있다.

게임에서야 이방인의 능력치를 쭉쭉 키우면 되는 일이었지만... 지금 이곳은 내게 현실이다.

나는 기사단장에게 물었다.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에퀼리아 마탑에 처박혀서 사는 늙은 마법사들이 강한 이유가 뭔지 알고 있나?"

"나이가 들수록 마력 총량이 늘어나니까요."

... 당연한 이야기가 아닐까.

하지만 나에게 적용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내 마력 총량은 지금이 최고점이다.

프로네시스 가에 출입하며 한나와 수련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다. 발람과의 결투를 준비하면서 한나가 가르쳐주는 방식으로 거의 한달간 명상을 해보았다. 내 마력 총량이 늘어날 기미는 1도 보이지 않았다.

표류자라서 내 몸에 결함이 있나보다.

기사단장이 내게 말했다.

"그들이 강한 이유가 총량 뿐이라면 재앙에게 진즉에 죽었다네. 그들이 강한 이유는 경험에서 나오는 연계와 준비라네."

"연계는 알겠는데... 준비라니요."

"그 치들은 특기가 아닌 마법이더라도 마법진을 만들어 항상 가지고 다니지. 그리고 상황에 따라 마력만 부여하여 사용한다네. 이게 일종의 준비야."

"마법진..."

"자네는 이곳에서 충분히 노력하여 마법의 지식은 꽤나 갖춘 것 같은데... 쓰는 마법의 가짓수가 부족하니 연계성이 떨어져."

... 아픈 말이긴 하다. 내가 알고 있는 마법이 많기는 하지만, 정작 쓸 줄 아는 게 적다.

마법 하나를 터득하려면 그 마법을 나만의 방식으로 이해해야 한다. 근데 그 이해가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마력이 흐트러지거나 구성 도중에 터져버린다. 거기다 요즘은 느긋하게 마법만 공부하는 시간은 새벽말고 없었지.

기사단장의 말이 구구절절히 옳은 것이다.

하지만...

"좀 더 느긋하게 하라고. 자넨 아직 젊어. 전투의 기본은 이미 체화된 것 같으니, 마법의 가짓수를 늘리며 경험을 늘려가면 돼."

기사단장님... 전 느긋할 수 없어요.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다.

괜히 말했다가 믿어주어도 문제고 안 믿어도 문제다. 미래를 아는 사람이 많으면 내가 아는 정보들이 쓸모가 없어질 위험이 생기고, 안 믿으면 내가 미친 놈이 되지 않는가.

... 거기다 다 죽는 미래를 어떻게 말을 해.

"그러니까 빨리 돌아가서 쉬기나 하게. 벌써 다섯시간 내내 이러고 있었지 않나."

"예..."

나는 축 늘어진 목소리로 대답하며 땅을 짚고 일어나려 했다. 그러자 숙인 시선에 자연스레 엔크라테아가 눈에 들어온다.

무려 당대 최악인의 검이라며... 이 멍청한 검은 내 손에 굴러들어오긴 했는데, 도대체가 어떻게 써야할 지 모르겠다.

게임에서도 이성스텟 뻥튀기 말곤 없어서 애초에 쓰레기 취급을 받던 검. 그 효과로 시원한 마력을 빠르게 수급할 수 있는 것 같긴 하다.

하지만 나는 원래 마력 감응력이 높아서 필요 없는 기능이다. 차라리 마력 총량 쪽으로 스텟이 붙었다면 훨씬 좋았을 것이다.

"에휴..."

자연스레 한숨이 나온다.

* * *

나는 이후 서관에서 몸을 간단히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왕궁 정문으로 나왔다. 일행은 헤르만과 아모스, 아일라다.

내 집으로 향하려면 어느 정도 왕도 중앙까지 내려가서 북동쪽으로 올라가야 한다.

"형님, 오늘 정말 잘 굴러다니더라고."

"……."

... 착한 생각, 착한 생각, 착한 생각.

화내봐야 힘만 더 든다. 참자 참아.

그런 생각을 하며 걷고 있는데, 멀리서 금발 귀족 아이가 어떤 여자애 한 명과 지나가고 있었다.

둘은 슬럼가 쪽으로 향하고 있다.

"형님, 저기 왕자님 아니야?"

"그렇네."

"저 여자애는 낯이 익은데..."

저 여자애가 알렉산더에게 사랑 고민을 시킨 아이일까... 내가 아는 인물들 중에서는 저 아이와 닮은 아이는 없다. 생김새가 묘하게 동양인스러운 것을 보면 혜세국의 아이인 것 같다.

... 괜찮은 아이이려나. 이 썩어빠진 에코니아에서는 상상치도 못할 일이 자주 일어난다. 알고보면 알렉산더를 노리는 자객일수도 있다.

헤르만 녀석은 잠시 고민하더니,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

"그 때, 분수에 있는 그 동그랗고 작은 빵집. 거기 여주인의 딸 아니에요?"

"아. 본 거 같기도 하고... 그런데 그 여주인 꽤 젊지 않았어? 아이가 있을 나이는 아니었는데."

"그런가... 저는 동방 사람들은 얼굴만 보고 나이를 알 수는 없겠더라구요."

그 허름한 빵집의 아이가 자객이라는 건 아무리 판타지라 해도 심한 일이 아닐까.

... 알렉산더의 연애사니까 본인이 최대한 겪어보고 판단해야겠지. 일단 믿어주자.

…….

알렉산더는 본편과는 다르게 자신감도 생기고, 철도 약간 든 것 같고, 사랑까지 생겼다.

게임의 루트로 따지면... 이 정도 변화는 내가 아는 미래가 크게 바뀔 수 있을 수준이다.

그래도 좋은 게 좋은거지.

알렉산더 녀석도 결국에 내 제자다. 내가 지켜야할 대상들 중 하나다. 녀석이 행복하면 됐다.

미래가 바뀌더라도... 그 때 가서 내가 조금 더 고생하면 될 일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몰래 저 두 사람의 관계를 응원하는 것 말고는 없다.

"헤르만."

"... 왜. 또 뭐 시키려고?"

이녀석...

눈치만 빨라져서는...

나는 은화 몇 장을 꺼내어 헤르만에게 전했다.

"그 빵집에 가서 이 돈 전해주고 와. 주인에게 내 저택 위치를 가르쳐주고, 무슨 일 생기면 나한테 오라고 해."

"형님이 직접 하면 되잖아."

"누구 말대로 너무 잘 굴러다녀서 피곤하네요. 헤르만씨, 저는 먼저 저택에서 쉬겠습니다."

"……."

"그 주변 사람들에게 돈 줬다는 사실은 들키면 안 된다. 빨리 가야해."

"... 에이씨."

"여기 A씨 없다."

아, 아일라가 스펠링 시작이 A구나.

가볍게 무시하고 나는 헤르만을 재촉했다.

"아, 왕자님이랑 저 여자애한테도 들키면 안 돼. 너가 더 빨리 도착해야 한다?"

헤르만 녀석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나를 멍하니 쳐다보더니, 사람들 사이로 재빠르게 사라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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