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왕실의 가정교사-66화 (66/215)

〈 66화 〉 2­30. 운명, 얄궂은.

* * *

2­30. 운명, 얄궂은.

왕도 거리에 땅거미가 안개처럼 퍼지는 시간.

"안녕하십니까."

"네, 손님! 지금 나갑니다!"

저녁시간에는 평소 찾는 사람이 워낙 적은 가게. 사아는 예상치못한 손님을 맞이하게 되었다.

한 달 전쯤에 보았던 귀족 남성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아, 기억하시고 계신 거 같네요."

"오늘은 어떤 일로..."

남성은 주머니 하나를 꺼내며 말했다.

"저번에 말씀드린 높으신 분이 이걸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저택으로 오라고도 말씀하셨구요."

"... 네?"

"따님 분께서 그 분의 제자 분과 함께 다니시는 걸 우연히 봐버리셔서요. 금전적인 문제로 고민하는 걸 원치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

귀족의 눈에 들어버리다니.

평소의 사아라면 이 돈을 거절하고 이 자리를 당장에 떠날 생각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마음이 솟구쳤다.

"저기, 혹시 그 분이 누구신지 알 수 있을까요?"

"... 그건 말씀드리지 못합니다."

아가씨와 함께 다니는 사람의 스승이라면 이 상황을 어느 정도 해결해주지 않을까.

아가씨께서는 함께 다니는 알렉스란 귀족 꼬마가 왕자라는 말을 했지만, 그것만큼은 믿지 못하는 사아다. 하지만 이처럼 정체를 밝히지 못한다는 것을 보면 꽤나 높은 사람일 게 분명하다.

물론 정체를 밝힐 생각은 없다.

혜세국의 공주가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은 온 나라가 안다. 정체를 밝히는 순간 믿지 못할 가능성도 있으며, 믿는다 해도 김원상에게 넘겨지는 결말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혹시 도와주신다는 분께 감사인사를 드리고 싶은데, 지금 찾아뵈어도 될까요?"

"네, 괜찮습니다."

사아는 그저 자신의 주인이 단 몇 달, 아니 몇 주일 동안이라도 이곳에서 웃으며 지냈으면 하는 바램이 컸다.

그렇기에 조력자의 집으로 향하게 되었다.

* * *

예로부터 혜세국에 떨어진 표류자들은, 자신들의 세계에서 가져온 고사를 정리해 교본으로 사용하는 일이 흔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고사성어들은 자연스레 혜국의 문화에 녹아들었다

그런 고사들 중 하나.

조운모우. ?雲?雨.

아침에는 구름, 저녁에는 비.

이는 언약이 굳은 형태를 말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남녀간의 성적인 교합을 뜻하기도 한다.

그 고사를 인용하여 창단한 단체가 있었으니, 조운회와 모우회이다. 그들은 혜세국에서 내란 선동죄를 짓고 도망친 탈주병들로, 여러 범죄를 저지르며 자금을 모으고 있었다.

"왜 우리가 이딴 일까지 해야하는건지..."

"회주, 이번 일이 끝나면 대금을 받고 조운회 놈들과는 거리를 두는 게 낫지 않을까."

아카데미의 숲의 북쪽.

언젠가 이시하가 사용했던 오두막보다는 깊은 곳에 있는 한 은신처. 그곳에서 상인으로 위장한 동방인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 자식들은 선을 넘었소. 우리가 언제부터 납치나 매춘 따위를 하게 되었나. 다 조운회 놈들이 시작한 일 아니오."

"……."

회주라고 불리우는 중년 남성.

그는 한 쪽 눈을 검은 안대로 가리고 있으며, 콧수염과 턱수염을 짧게 기른 동양인이다.

회주는 마차 뒷편의 짐칸에 걸터앉은 채, 다른 이들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을 뿐이다.

"맞아. 원래 신분을 숨기고 상단의 호위나 하며 힘을 모을 생각이 아니었나. 왜 우리가 슬럼가에 물건을 옮기는 일을 해야 해."

"요즘 그 새끼들은 아이들까지 납치해서 갖다 파는 것 같던데, 미친 놈들이 아닌가."

"거기다 이번 일은 특히나 찜찜하오. 목표가 누구길래 납치를 하는것이고, 의뢰주가 누구인지. 조운회 놈들은 우리에게 밝힌 게 없지 않소."

"집단의 명명도 이런 꼴을 낼 거라는 걸 알았으면, 모우라는 단어따위는 안썼지. 쪽수만 안 밀렸다면 전부 도륙을..."

점점 대화가 격해지자...

"닥쳐라."

"……."

"……."

회주가 짐칸에서 내려오며 말했다.

그의 눈에는 벌겋게 핏발이 서있다.

"우리의 목적이 무엇이든, 우리가 악행을 저질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의 말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개를 숙였다.

고개숙인 자들은 치욕을 안고 고향을 떠나온 자들, 그들은 복수를 잊을 수 없는 자들이다.

"김원상... 그 자를 뒤주 속에 쳐박아 뙤약볕에 내어놓는 그 날. 그 날이 도래할 때까지 인내하고 또 인내한다. 복수를 완수하고 나면 죽음으로 속죄할 뿐. 그저 간단한 일이다."

회주가 고개 숙인 수하들의 뒷편에 있는 자들에게 말했다.

"그래서, 너희가 임무를 수행하겠다고?"

"그렇습니다."

"지금 출발하면 시간은 맞을 것이다. 목표물의 위치는 제대로 숙지했겠지?"

"예."

"... 출발해라. 나는 남은 녀석들과 함께 동쪽 협곡에서 대기중인 놈들과 접선하고 오겠다. 그때까지 수화물을 확보해 잘 지키고 있도록."

명령을 받은 사내들은 시내 방향으로 흩어졌고, 회주 역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수하들을 추스려 황룡 산맥의 협곡 방향으로 향했다.

분명 계획에 차질은 없다.

"계획은 완벽한데..."

조운회가 왕도의 슬럼가와 협력하여 왕도의 동쪽에 뚫어둔 땅굴. 모우회주는 야심한 밤에 그곳으로 이동할 예정이다.

그가 듣기로 납치해야 할 목표는 그저 평범한 슬럼가의 소녀. 지금 보낸 이들 중 몇몇은 꽤나 실력이 있는 자들이다. 계획이 실패할 리 없다.

"짜증이 나는군."

모운회주, 윤흠서.

혜세국의 오군(五?) 중 전군(??)의 부장을 지냈던 자. 그 역시 무관이었기에 인간으로서의 도리는 분명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마음 속에 복수 외의 감정은 남겨두지 않으려 노력했다.

억울하게 죽은 제 1공주와 그녀를 위해 반란을 일으킨 전군의 장군.

그 두명의 복수만이 머릿속에 가득하다.

한 명 장수가 죽어야했을 전장에서 도망치고, 도적질을 하며 조운회주의 제안을 반대하지 않은 것도 그 복수심 때문이었다.

이런 더러운 일을 하게 된 것은 후회는 하지 않는다. 실제로 복수를 위한 발판은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지 않은가.

"언젠가 일을 마치면...."

하지만.

감정은 감히 제어할 수 없는 것.

이런 일을 하는 데 죄책감은 있다.

"그때는 죽어야지."

원래의 역사에서도.

지금으로부터 2년 후.

혜윤은 에우데미아의 땅에서 죽게 된다.

그녀의 사인은 방화로 인한 질식사.

혜세국의 김원상은 이전에 저질렀던 내란죄의 사면을 약속하며 조운회에 혜윤의 살해를 사주한다.

자신의 손에 피를 직접 묻히기 싫었던 조운회주는 형제 조직인 모운회에 의뢰를 넣게되고.

조직 내 변절자의 존재를 모르고 있던 모운회주, 윤흠서는 차질없이 계획을 실행하게 된다.

이후 자신이 혜윤을 죽인 것과 다름없다는 진실을 알게 된 윤흠서는, 누군가의 앞에서 자결하게 된다.

지금의 얄궂은 운명은...

당연히 그러할 운명이었던 것이다.

* * *

해는 사라지고 어둠이 깔리는 저녁.

사아는 헤르만을 따라 길을 걷고 있다.

아카데미와 왕성 사잇길로 올라가는 언덕.

그 언덕을 끝까지 올라가면, 그 귀족 소년의 스승이 사는 저택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 고위귀족의 저택을 앞두고...

사아는 지금와서 약간 후회하고 있다.

미천한 자신이 그런 높으신 분을 만나 무엇을 해야만 할까. 아가씨의 행복이 조금이라도 더 길어지기 위해서는 어떤 말을 해야만 하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아는 고향 혜세국에서 천한 가정에서 태어나 공주를 돌보는 유모 자격을 얻어 입궁한 여인일 뿐이다. 그녀는 언제나 높으신 분들의 명령을 들으며 따르기만 하면 되는 인생을 살아왔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해야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도출될 지 전혀 모르는 상황. 오히려 그녀는 자신이 멋대로 저지른 행동으로 인해 아가씨가 피해를 입을까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저기..."

"왜 그러십니까?"

"제가 너무 성급히 결정한 것 같아요. 아무래도 아이와 상의를 해보고 올 걸 그랬어요."

"……."

그렇기에 그녀는... 도망치기로 했다.

혜윤 아가씨는 분명 자신보다 현명하다.

비록 이번 일에서만큼은 자신이 고집을 부리긴 했으나... 이런 일을 아가씨에게 먼저 알린 후에 결정해도 되는 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사아의 말을 들은 헤르만이 답했다.

"음... 그래도 저택 위치는 숙지하셨죠?"

"아, 네."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꼭 오셔야 합니다. 제가 모시는 분이 제자 뿐만 아니라 그쪽의 따님도 꽤 걱정하고 있으시거든요."

헤르만은 이 상황을 그저 빈곤 계층의 여인이 고위 귀족과의 대면을 꺼리는 것으로 인식했다.

그렇기에 시하가 실제로 여자 아이를 걱정하지는 않았지만, 지금 당장에 여인을 안심시키기 위해 약간의 과장을 보태서 말했다.

사아가 대답했다.

"... 알겠습니다. 그럼 돌아가볼게요."

"배웅은 안 해드려도 되죠? 조심히 가세요."

"네. 오늘 감사했습니다..."

서로에게 인사를 건네는 두 사람.

이후 둘은 각자 돌아가야 할 곳으로 향했다.

결국 귀족의 저택에 가지는 못했지만, 사아는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느낄 수 있었다.

혜세국에서도 일개 유모에 불과한 자신에게 친절히 대하던 사람들은 공주에게도 우호적인 사람들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고위귀족을 모신다는 저 청년은 한낱 빈민일 뿐인 자신에게도 예의를 갖추었다. 그 사실이 왠지모를 희망처럼 다가온다.

한층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아가씨와 단 둘이 사는 빵집으로 향하는 사아.

이제 이 모퉁이만 돌면 집에 도착한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적막해야할 슬럼가에 익숙치 않은 말소리.

"마비 끝, 빨리 옮겨!"

"모우회주 새끼... 김원상한테 복수는 무슨. 돈 벌고 어린 여자랑 떡이나 치면 좋은거지."

"이번 임무면 끝이다. 집중이나 해."

"이거 귀족 남자애는 어떻게 하냐."

"... 여기서 처리할 순 없어. 일단 데려가."

귀로는 들리지만...

뇌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들은 것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

사아는 그대로 달려 모퉁이를 돌았다.

슬럼가 골목에는...

복면을 쓴 괴한들이 멀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자루 두 개를 들고 가고 있다.

자신이 평생을 책임지고 돌봐온 아가씨.

그 아가씨의 웃음을 되찾아준 귀족 소년.

두 사람이 납치당하는 장면을 봐버린 것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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