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화 〉 231. 밝은 달의 길.
* * *
231. 밝은 달의 길.
모우회가 사용하고 있는 은신처.
알렉산더는 수면독의 마취에서 깨어났다.
자신은 지금 양 손을 뒤로해 묶이고 입을 열 수 없도록 봉해진 채, 어딘가에 갇힌 상황.
몸을 애써 비틀어보니 옆에 사람 하나가 더 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혜윤이겠지.
다행히 같은 곳에 갇혀 있구나, 자신이 지금 살아있다면 혜윤 역시 살아있을 것이다.
약간의 안도감을 느낀 알렉산더는 지금의 상황을 냉정하게 분석하기 시작했다.
'기사들이 멀리서 우릴 보고 있었을테니, 곧 추가 병력과 함께 우릴 구하러 올 거야...'
오늘, 알렉산더가 혜윤과 있기 위해 궁을 나오며 호위를 부탁했던 기사는 단 두명.
잠이 들기 직전 확인한 바로는 괴한들의 수는 다섯. 괴한들은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다가와 혜윤과 자신에게 수면독을 썼다. 거기다 괴한들의 훈련받은 움직임으로 보아 실력도 미지수.
알렉산더와 혜윤이 인질로 잡힌 상태에서 기사들이 나섰다면, 오히려 괴한들에게 경각심만 불러일으켜 탈환을 실패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기사들이 취할 수 있었던 가장 합리적인 행동... 아마 한 사람은 구원을 요청하고, 나머지 한 사람은 근처에서 동태를 살필 것이리라.
그렇다면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애써 마력을 움직이려 해보지만... 수면약에 마력의 응집을 흐트리는 효과도 있었나보다. 몸 속의 마력이 유의미한 출력을 내지 못하는 상황.
'적어도 몸 상태가 정상으로 돌아올 때까지는 기다리는 수밖에 없나...'
예전과는 다른, 상황에 입각한 침착한 판단.
약간 자포자기의 심정마저 드는 그 때.
무언가 천이 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알렉산더가 갇혀있던 자루가 열리고, 바깥의 상쾌한 공기가 자루 속으로 들어왔다.
이내 알렉산더의 시야에 갇혀있던 방 안의 구조가 보인다. 창살이 달린 작은 창 하나가 달린 작은 창고. 창밖으로는 달빛이 새어들어온다.
"미안해. 알렉산더..."
혜윤이었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볼에는 눈물이 달빛에 비쳐 선명히 보인다.
알렉산더는 당황했다. 혜윤이 자신이 숨겨왔던 본명을 부르고 있다는 사실은 잊을 정도로.
지금 둘은 괴한들에게 납치된 상황일 뿐, 혜윤에게 미안할 일이 무엇이 있는가. 왜 지금 그녀가 눈물을 흘리며 내게 미안하다고 해야 하는가.
"내가... 욕심을 부려서..."
혜윤은 자그마한 장도(??)로 알렉산더의 손을 묶고 있는 밧줄을 끊어냈다.
알렉산더가 손의 자유를 얻고 겨우 몸을 일으키려 하자, 혜윤은 그런 알렉산더를 가볍게 누르며 두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다댔다.
"잠깐만. 조용히."
아직 입을 막고 있는 밧줄을 풀지 못한 알렉산더는 잠자코 혜윤의 말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조용히 있자, 밖에서 남성들이 드문드문 대화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려오는 걸로 보아, 바로 문 건너편에서 보초를 서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번 일만 끝나면 우리도 조운회지?"
"그럼, 조운회주가 약속했어. 이제 우리도 하고 싶은 것 잔뜩 하면서 살면 되는거지."
"하아... 모우회주 새끼. 꽉 막혀가지고는. 에우데미아까지 떠밀려온 주제에 복수라는걸 어떻게 하자는 거야. 맨날 불충이네 뭐네..."
"솔직히, 우리같은 잡병들이 정치같은 걸 어떻게 알아. 김원상이던 뭐던 우리에게 돈 잘 주고, 밥 잘 먹이고, 여자랑 하기만 하면 그만이지."
김원상.
혜윤은 그 사람의 이름에 두 손을 떨었다.
이 떨림은 두려움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본인에게 누명을 씌워 나라밖으로 쫓아냈으며
죄없는 시종, 유나를 죽도록 한 인물.
그 썩을 것은 본인의 외손녀가 왕에 어울리는 인물이 되야 한다는 명목으로. 혜윤의 동생, 혜선에게 어릴적부터 끊임없는 학대를 해왔다.
그 악귀는 지금 이런 꼴을 당하고 있는 본인과는 다르게, 아직도 혜세국에서 떵떵거리며 살고 있을 것이다.
당장에 자신의 눈 앞에라도 있었다면... 혜윤은 그 늙은 여우의 목을 졸라버렸을 것이다.
그렇게 마음속에 차오르는 분노에 몸을 떨고 있던 혜윤의 손에 온기가 느껴졌다.
다른 손이 혜윤의 손을 감싸고 있었다. 그 손목에는 밧줄 자국이 심하게 남아있다. 울면서 떨고 있는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알렉산더.
'지금은 중요한 건 김원상이 아니잖아...'
원래라면 자신만 죽고 끝났을 일이다. 자신의 일에 휘말려버린 알렉산더만큼은 살려야한다.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세상에서 자신을 처음으로 온전하게 봐준 이 사람은 무조건 살려야만 한다.
혜윤은 다시 지금 상황에 집중했다.
"풀어줄테니까... 조용히 있어야 해. 자루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들키면 안되니까."
혜윤이 알렉산더의 입을 봉하고 있는 밧줄 끊어내며 나지막이 말하자, 알렉산더가 끄덕였다.
혜윤은 생각했다.
방금 전 대화를 나누던 목소리는 둘.
나머지 괴한들은 어디 있는지 모른다.
무기는 어머니의 유품인 작은 장도 뿐.
체내의 마력을 깨끗하게 정화하는 혜세국 왕족의 심법을 행한 혜윤과는 다르게, 알렉산더의 몸은 아직 불안정해 보인다.
무기라도 있으면 한명씩 처리할 수 있겠지만, 지금 이대로면 이 상황을 타개할 수는 없다.
혜윤이 그렇게 생각하는 도중...
문 밖의 인기척이 늘어났다.
"잘 지키고들 있냐."
"그래. 그런데 갑자기 왜 왔냐."
"저 나이 여자애라면 아래는 새거겠지."
"설마 너 또..."
"넘기면 어차피 뒤져버릴 건데, 한번도 못쓰고 죽어버리는 것 보다는 낫잖아."
"미친새끼... 하지 마라."
"아... 왜!"
... 이건 기회가 아닐까.
혜윤은 알렉산더에게 말했다.
"... 알렉산더. 일단 다시 자루에 들어가 있자."
"……."
하지만 알렉산더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리 사랑이라는 감정에 무지한 그라도, 사교계에 데뷔하기 위해 여러 지식을 쌓아왔던 왕족이다. 밖의 인간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안다.
지금 혜윤은 설마 몸을 대가로 자신의 안전을 지키려하는 것인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비록 몸이 성하진 못하더라도, 그녀를 지켜야겠다는 생각 뿐이다.
표정이 화난 채로 굳은 알렉산더를 정확히 바라보며, 혜윤이 말했다.
"... 이번 한번만 나를 믿어줘."
자연스레 눈을 마주한 두 사람.
혜윤은 눈물에 젖은 얼굴로 얕게 웃고 있다.
아직도 희미한 달빛은 눈물에 맺혀 있다.
알렉산더는 혜윤의 그 모습을 보고...
팟
마음 속에서 작은 불꽃이 터졌다.
느긋한 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더는 왠지 모르게 스승의 말이 떠올렸다.
"……."
밖에서는 실랑이가 벌어졌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알았어..."
자신의 어버이. 국왕 필레몬과 왕비 루시아가 서로를 믿듯.
지금은 믿어야 한다 생각했다.
하지만 남자가 혜윤에게 해코지를 한다면, 자루를 나와 남자에게 주먹을 날릴 것이다.
그렇게 다짐했다.
"고마워..."
알렉산더가 자루에 들어가자, 혜윤 역시 자신이 있던 자루로 들어가 위장을 끝냈다.
문에서 조금 더 가까운 위치에서.
자루 입구로 손을 뻗기 쉽도록.
"아, 어차피 멀쩡하게 쓸 거라고. 비켜봐."
"저 씨발놈..."
"그래, 나 씨발놈 맞다."
뒤늦게 와 실랑이를 벌이던 남자는 끝내 두 사람이 갇힌 창고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혜윤은 소리를 들으며 감각을 집중했다.
어릴적부터 부친에게 배워온 명월주의 길.
백성에게 이를 사용하는 것은 모순이다.
하지만 지금은 알렉산더를 위해 쓸 것이다.
만천(?川)을 비추는 명월(?月)처럼.
성군의 빛은 만백성에 닿아 세상을 밝힌다.
그러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방에 들어온 남자는 자신을 향해 오고 있다.
"흐흐..."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면서.
명월주는 그 누구보다 밝아야만 한다.
그렇기에 후계자들은, 어릴 적부터 혹독하다는 말 외에는 표할 단어가 없는 교육을 받게 된다.
또한.
세상 만민을 온전히 비춰야만 한다.
자신의 빛을 닿게 할 세상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온 세상을 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단지 그것만을 위한 단순한 심상 마법.
남자와 혜윤 사이의 거리.
네 걸음.
세 걸음.
두 걸음...
혜윤의 자루 앞에서 남자는 멈췄다.
그는 한 무릎을 굽힌 채 서서히 손을 뻗는다.
'조금만 더...'
그리고 자연스럽게.
남자의 목도 점점 내려왔다.
이윽고 남자의 손이 닿으려는 그 순간.
닫힌 듯 했던 자루가 펄럭였다.
푸욱.
"어억... 커헉..."
정확히 남자의 목에 박힌 혜윤의 장도.
남자는 털썩하고 쓰러졌다.
기도에 차오르는 피로 숨을 쉴 수 없다. 그리고 목의 혈관을 통해 철철 흘러넘치는 피의 무게만큼, 그의 몸은 싸늘하게 식어간다.
스릉.
혜윤은 쓰러진 남자가 패용하고 있던 환도를 뽑았다. 어른들이 쓰는 용도이기에, 어린 혜윤의 키 절반에 해당하는 길이다.
하지만 문제 없다.
검의 연습을 누구보다 열심히 했던 혜윤이다. 그녀는 더 어린 시절에 부친의 검을 들어본 적이 있다.
그 때 느꼈던 무게보다 이 검은 훨씬 가볍다.
"알렉산더, 나가자."
자루에 들어가있던 알렉산더는 아직 약에 절어 불편한 몸을 이끌고 나와 상황을 파악했다.
"아직 힘들지? 내 뒤에 숨어 있어."
그저 평범한 소녀인줄로만 알았던 혜윤이 자신의 키보다 더 큰 괴한을 죽인 현장.
그녀는 가녀린 체구에 비해 너무나 커 보이는 도를 두 손으로 쥔 채 앞을 향하고 있다.
그리고 문 밖의 외침.
"무슨 일이야!"
"어... 어!"
바깥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괴한 두 명이 위화감을 느껴 창고 문을 열고 들어왔다.
눈 앞의 상황에 당황한 두 사람. 그 중 하나는 바로 무기를 빼어들고 혜윤을 향해 달려들었다.
생포를 시도하되 예외 상황이 벌어지면 가차없이 죽일 것. 조운회주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서다.
일직선으로 달려드는 남자. 그의 손에는 혜윤이 들고 있는 것과 비슷한 길이의 검이 들려있다.
마지막 명월주의 길.
밝은 달의 빛은 항상 티없이 맑아야한다.
한 점의 더러움도 허용할 수 없다.
두 사람의 검이 맞부딪힌 그 순간.
혜윤이 왼쪽 아래로 검신을 비틀자, 남자의 검은 그 방향으로 흘려져 버렸다.
자연스레 무게중심이 앞으로 기울고.
남자는 얼빠진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어, 어...?"
그 얼빠진 소리와 함께.
혜윤은 검으로 그의 목을 베어버렸다.
털썩.
달려들었던 자 역시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명월주는 대대로.
모든 방위의 공격을 허용치 않는
절대방어의 검법을 계승한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