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화 〉 234. 그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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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 그때처럼.
회주에게 쇄도하는 화염구와 빙창의 탄막.
시하는 그 짧은 시간동안 엄청난 화력을 부었지만, 모우회주 윤흠서는 만만치 않았다.
때로는 검으로 마법을 쳐내고, 때로는 마력 장막을 두른 몸으로 공격을 그대로 받아낸다. 그러면서도 그가 달려오는 속도는 변하지 않았다.
그의 모습은 마치 전차와 같았다.
혜세국의 전군.
판타스매터나 외세와의 전투에서 항상 선봉에 서는 자들. 그들이 사용하는 마법은 마력 부여와 신체 강화, 마력 장막이 전부. 전방에서 적의 화력을 감당해야 하는 것 치고는 빈약해 보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전투의 맨 앞에 선 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방어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하의 앞에 도달한 윤흠서는 검을 내리쳤다.
쿵.
검과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아닌.
무거운 물체가 떨어지는 듯한 소리.
시하는 신체 강화에 투자하는 마력을 최대한으로 돌리고 적절한 순간에 공격을 막아냈다.
"으윽..."
그 무게감은 시하의 상상을 초월했다. 검을 받치는 두 팔이 떨리고, 버티고 서있던 무릎이 절로 꿇리는 일격이었다.
'이게... 혜세국 전군의 중검술!'
최선의 공격으로 방어할 여지조차 없앤다. 무거운 일격으로 끊임없이 적을 내려쳐 역습의 여지를 지우는 것. 전군 병사들이 삶을 지속해가며 쌓아나가는 단 하나의 무리?理이다.
마력의 분배를 자유로이 전환하는 그들은 적에게 접근하는 순간까지 마력을 방어에 투자하고, 공격의 순간에는 무기와 신체의 강화에 모든 마력을 돌린다.
그 상태에서 행해지는 참격은 한번 한번이 망치로 내려치는 것과 같은 무게감을 지니게 되어, 왠만한 적들은 일격에 도륙해버릴 수 있다.
폭파 마법을 발동시키기 전에 했던 도발로 눈 앞에 있는 인간이 모우회주라는 사실은 눈치채고 있었던 시하였다. 그렇기에 최대한 접근을 저지하려 했지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하는 온 힘을 짜내면서 생각했다.
'거리를 벌려야 한다. 저 참격을 계속해서 검으로 받아내면 내 몸이 절대로 버티지 못해.'
다음 일격을 위해 회주가 검을 빼는 순간, 시하는 신체 강화를 이용해 뒤쪽으로 최대한 멀리 도약했다.
그런 시하를 보고 회주가 외쳤다.
"몸을 빼는 모습이 꽤나 추하구나!"
그는 다시 마력 장막으로 마력을 돌리며 시하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그에 대응하는 시하는 발람과의 결투에서 사용한 마법을 이곳에서 시전했다.
바닥에 물줄기를 흘려내는 마법. 수류.
결투장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곳은 숲.
물을 머금은 흙은 진흙으로 변했고, 회주의 발은 푹푹 빠지게 되었다.
'휘말릴 수 있으니 위력은 크게는 못하지만...'
그 상태에서 방전. 전류는 물을 머금은 흙으로 침투해 회주에게 쇄도한다.
"으으읍!"
마력장벽이 방전 마법의 마력은 대부분 흡수해주었으나, 전부를 막지는 못했다. 윤흠서는 감전된 상태로 이를 악물고 버텼다.
한 차례 방전을 버텨낸 그는 각력에 대부분의 마력을 돌려 높이 솟아올랐고, 진흙탕을 벗어나 멀쩡한 땅에 착지했다.
온 몸이 너덜너덜해진 상태로 회주가 말했다.
"젊은 마법사가 영창도 없이 여러 속성을 다루는 것으로 보아... 보통은 아니군. 허나, 이 정도 마법을 쓰는 재앙을 수없이 많이 베어온 나다."
그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네 놈은 내 적수가 되지 못한다!"
시하는 다음 수를 생각하려 했다.
수많은 탄막을 펼쳐도 뚫렸다.
진흙탕 속에 빠트려도 탈출해버렸다.
감전을 노려도 정신력으로 극복했다.
'저게 어딜봐서 인간이야...'
폭발 마법은 유효했으나 준비할 시간이 없다.
빙결을 노리기엔 사전 작업이 필요하다.
... 기사단장의 말이 시하의 마음을 찌른다.
'자네는 쓰는 마법의 가짓수가 부족하니 연계성이 떨어져.'
하지만 고민할 틈이 없었다.
이미 회주는 눈 앞에 닥친 상황.
시하는 신체 강화로 모든 마력을 돌리고 윤흠서의 공격을 받아쳤다.
무게감을 최대한 분산시키도록.
충격을 전신으로 흘려낼 수 있도록.
첫 참격을 막았을 때 보다는 훨씬 안정된 자세로 공격을 받아냈다. 하지만... 거듭되는 참격에 충격은 점점 쌓여만 간다.
"검도 꽤나 다룰 줄 아는군. 그래도 내 중검을 계속해서 막아내기엔 역부족이다!"
이격. 폐부에 남아있던 숨이 빠져나간다.
삼격. 검을 받치는 두 팔이 접히기 시작한다.
사격. 한 쪽 무릎이 접혀버렸다.
오격. 온 몸의 뼈가 소리지른다.
회주는 여섯번째 검을 내려친 뒤, 비어있는 시하의 몸에 최고 속도로 발차기를 내질렀다.
"흐억!"
엔크라테아를 놓친 시하는 멀리 날아가버렸다.
잠시의 시간이 지나고.
회주 역시 방금의 공세로 체력을 크게 소진한듯, 지친 기색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나를 원망하시게..."
회주는 시하를 보며 말했다.
"자네 말이 맞다. 나는 죽은 자를 위해 이러는 거야. 언젠가 복수를 마치게 된다면, 스스로 죽어 지옥으로 떨어지겠네."
말을 마친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싸움을 끝내기 위해 다가간다.
땅에서 한바탕 구른 시하는 흙투성이가 된 채 손을 더듬어 엔크라테아를 찾았다.
하지만 잡히지 않는다.
엔크라테아는 먼 곳에 떨어져있었다.
혹시나 싶어 손을 뻗어보지만, 기적은 없었다.
방금 전까지 신체 강화는 엔크라테아의 이성 버프로 꾸준히 유지할 수 있었던 것.
아무리 마력의 회복 속도가 높은 시하라고 해도, 검을 놓치고 체력을 전부 소진한 지금은 마력이 제대로 모일 리가 없었다.
'그래도... 죽을 수는 없어.'
시하는 대응책을 떠올린다.
얼음검. 공격을 버틸만한 강도로 제조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마력과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지금껏 썼던 마법은 전부 무위로 돌아갔다.
남은 선택지가 없었다.
검집을 매달기 위해 묶어둔 끈을 풀었다.
검집을 써서라도 방어하는 수밖에 없었다.
추가 전력이 오는 시간까지 버틴다.
그가 살 수 있는 마지막 길이었다.
시하는 몸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검집으로 땅을 짚었다.
그 순간.
"아..."
타라스 마을에서 경험한 그 감각.
시원한 마력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다.
대신 모든 움직임이 또렷하게 보인다.
흙먼지가 가라앉아 보이는 주변의 풍경.
난사한 마법에 그을린 나무.
얼어붙은 잎사귀.
수류에 진창이 된 주변.
폭발에 혼절해버린 회주의 수하들.
그리고...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모우회주.
하지만 그 때와 다른 점이 있다.
지금은 모든 마력의 흐름이 보인다.
원래라면 농도가 짙은 마력만이 눈에 보이지만... 지금은 세상에 구성하는 모든 마력이 물결처럼 떠돌아다니고 있다.
시하는 그 모습을 눈에 새기며 생각했다.
'중검술의 빈틈...'
마력의 흐름.
그것은 모우회주에게도 적용된다.
그 역시 몸에 피해가 축적된 듯, 신체 강화마법에 대부분의 마력을 쏟아부어 움직이고 있다.
일순간 달라진 분위기에, 회주가 말했다.
"마지막 수가 남아있나. 내게 보여 봐라!"
이 공격으로 모든 것을 결정짓겠다는 듯, 모우회주는 낼 수 있는 최속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시하는 그를 유심히 지켜보며...
오른 손을 뻗었다.
'지금이라면 할 수 있어. 중요한 건 타이밍. 이렇게까지나 잘 보이는 데 못할 리 없어.'
시하와 회주 사이의 거리는 단 열 걸음. 회주는 마법에 대비해 마력 장벽을 둘렀다.
하지만 시하는 일절 공격하지 않았다.
여섯 걸음. 회주는 마력 장벽에 할애하던 마력을 조금씩 걷어내기 시작했다.
다섯 걸음. 전신에 퍼져있던 마력이 역동한다.
네 걸음. 최후의 일격을 준비하기 위해. 회주는 모든 마력을 자신의 신체와 무기에 두른다.
두 걸음. 회주는 평생동안 전장에서 휘둘러온 그 일격을 준비하기 위해 검을 쥐고 있는 오른팔을 높이 들었다.
그 순간, 시하는 낮게 읊조렸다.
하지만 회주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흐아아압!"
그저 온 몸의 무게 중심과 힘을 검에 싣고.
윤흠서라는 인간의 최강의 일격을 내려친다.
하지만...
"... 아?"
검은 휘둘러지지 않았다.
내질러야 했던 오른팔이 보이지 않는다.
회주의 시선이 어깨로 이동했다.
그곳에 있어야 할 오른팔은 깔끔하게 잘려있고, 피가 철철 흘러넘치고 있다.
뒤를 돌아보니 자신의 오른팔이 떨어져 있었다. 십수년동안 수많은 전쟁터를 함께 해온 애검이 들린 채로.
다급히 앞을 돌아보자.
그곳에는 시하의 오른손이 있었다.
이어지는 공기의 폭발.
"크억...!"
회주는 피를 흩뿌리며 날아갔다.
* * *
이번엔 내가 아닌 회주가 땅을 굴렀다.
그는 더이상 일어나지 못했다.
"해냈다..."
그 자리에서 나는 주저앉았다.
전신이 비명을 지른다.
쿨럭 쿨럭.
기침을 하며 앞으로 고꾸라져 버렸다.
입에서 피가 튀어나온다.
각혈이라니...
상대방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기 위한 중검술. 그걸 받아낸 충격이 그대로 쌓였나보다. 내장이나 폐부가 상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래도... 끝을 내야..."
검집으로 내 몸을 지탱하며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익숙한 형태의 얼음검을 만든다.
충격을 견딜 정도는 필요없다. 상대방의 숨통을 끊어놓기 위한 예리함만이 필요할 뿐.
휘청 휘청.
비틀 비틀.
가끔 넘어지기도 하면서.
검과 검집으로 다시 일어나며 걸었다.
하지만 가야만 한다.
이곳에서 죽여야만 한다.
모우회주. 그는 에코니아 아포칼립스의 또다른 악역 여왕, 혜선을 타락하게 만드는 마지막 기폭제나 다름없는 인물이다.
지금 당장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내가 모르는 미래가 닥쳐왔을 때, 타국의 도움이 필요하게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몇년 뒤, 혜선과는 원만한 관계를 쌓아둬야 한다.
그러니 죽여야 한다.
그 게임을 플레이하던 그 순간처럼.
행복한 루트를 위해 가지를 쳐내던 것처럼.
물론 이건 현실이다.
현실과 게임은 다르다.
하지만...
이런 다짐을 하는 것도 처음이 아니다.
물론 그때는 끝까지 가지 못했지만...
그래.
그때처럼.
그 때의 마음가짐을 떠올리자.
소중한 이의 행복을 위해.
악인을 치우는 것일 뿐이다.
나 따위와는 비교도 안되는...
선인?人들이 살 수 있도록.
어차피 저 인간은 범죄자.
이곳에서 나는 저걸 죽일 권한도 있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회주의 앞에 도착했다.
그는 오른팔에 피를 쏟아내며 쓰러져있다.
그래도 아직 숨은 쉬고 있는 것 같다.
괴물같은 생명력이다.
나는 회주의 목 근처에 섰다.
죽여야만 한다.
내 앞에 누워있는 이 인간은 악이다.
세상을 어둡게 하는 쓰레기일 뿐이다.
그렇기에 죽여야 한다.
얼음검을 두 손으로 치켜든다.
내 시야가 붉게 물든다.
머릿속이 어지럽다.
하지만 한 가지 생각만은 확실하다.
죽여야만 한다.
"... 죽어."
내 다짐을 말로 내뱉으며...
회주의 목을 향해 검을 찍어내린다.
하지만 검은 닿지 않았다.
누군가 내 팔을 붙들었기 때문이다.
"... 왜 막는거야."
"형님, 정신 차려."
헤르만이었다.
"헤르만, 죽여야 해. 이 사람을 안 죽이면 미래가 어두워져. 그러니까... 죽여야 해."
"형님은 지금 제 정신이 아니야. 괜히 무리해서 사람 죽이려 하지 말고... 일단 쉬어."
두 손에 힘을 주려고 해보지만, 이미 앞선 전투에서 전부 쏟아부어서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건지도 모르겠다.
"지금 눈이 벌겋게 돌아가 있어. 제발 쉬어. 내가 여긴 알아서 정리할테니까."
"아냐... 죽여야 해."
헤르만은 잠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 이 방법은 안 쓰고 싶었는데."
"죽여야..."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