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왕실의 가정교사-72화 (72/215)

〈 72화 〉 2­36. 팥...?

* * *

2­36. 팥...?

침실을 나와 1층으로 향했더니, 이미 그곳에는 저택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내 호위를 맡은 헤르만

아모스와 아일라

임시로 보호중인 사아라는 슬럼가 빵집 여성

"좋은 아침."

"참 좋은 아침이네요..."

내 아침인사에 헤르만이 기운없이 답했다. 아마도 뒷처리를 하느라 힘들어서 저러는 게 아닐까.

나는 현재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헤르만에게 질문했다.

"헤르만, 내가 잠들어버려서 그러는데... 혹시 그 뒤로 어떻게 되었는지 설명해줄 수 있어?"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하지..."

녀석은 머리를 긁적이는 헤르만.

"일단 그 사건이 일어난지 이틀이 지났어."

"뭐? 그럼 나 일은 어떻게 하고..."

"걱정 마. 잠시동안은 쉬라고 하셨어."

이틀이 지났다니, 예상치 못한 일이다. 그 동안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면 계획이 어긋나는데...

헤르만 녀석은 내 표정을 슬쩍 확인하더니 설명을 이어나갔다.

"당연한거야. 그 정도 상처를 입고도 하루만에 일어나면 그게 괴물이겠지. 아, 그러고보니 성당의 수녀님이 치료를 마치시더니 전해달라더라. 다음은 무조건 고통 두 배라고."

…….

망했다.

그 치유마법을 고통 두배로...?

첩보 기관의 시크릿 에이전트가 와도 그 고통에 온갖 기밀을 불어버릴 것이다.

... 다른 치유 마법사를 찾아봐야 하나.

헤르만 녀석은 상황 설명을 이어나갔다.

"먼저 형이 제압한 그 놈들은 전부 우리 가문에서 맡기로 했어. 일반적인 범죄도 아니고 왕족 납치 미수니까."

"죽은 사람은 있어?"

"... 중상인 사람이 있긴 한데, 일곱 명 모두 살아는 있어. 우리끼리 심문을 할까 고민도 했는데, 일단 교사님이 정신을 차리고 나서 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어."

"음..."

왠지는 모르겠지만 약간 찌푸린 얼굴로 이야기를 마친 헤르만.

그래도 다행이다.

어차피 나는 내 예상을 검증한 뒤에 움직일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검증에는 모우단이 행동한 이유를 캐내는 것도 포함된다.

왕궁부의 그림자들이 심문하는 과정에서 그것들이 죽어버리기라도 한다면 곤란하다.

나는 헤르만에게 물었다.

"왕자님과 그 여자아이는 어떻게 됐어?"

"두 사람은 지금 왕궁에 있어. 왕자님께서 그 여자아이... 혜윤이라고 했나. 그 아이가 위험할 수도 있으니 슬럼가로 돌려보낼 수 없다나."

혜윤.

내 마음 속의 예상이 확신으로 변한 순간이다.

'윤'이라는 이름만 알려진 혜세국 제1공주. 하지만 공교롭게도 나는 그녀의 동생이 유학을 왔을 때 어떤 이름을 썼는지 알고 있다.

거기다 그날 밤 보여주었던 그 사기적인 성능의 색적 마법. 혹시 내가 모르는 마법이 따로 있을까 확신하지는 않았지만, 게임 내에서 그런 특징을 가지는 색적마법은 명월시 뿐이다. 확률을 따질 필요도 없이 1공주가 맞을 것이다.

아마도 지금 내 옆에 있는 사아라는 여성은 공주의 측근 비슷한 것이겠지.

"골치아프게 됐네..."

"왜 그래?"

"음, 그런 게 있어."

"또야, 또."

오늘따라 헤르만이 좀 까칠하네.

기분나쁠 일이라도 있었나 보다.

그나저나 알렉산더의 첫사랑이 정말로 동방의 폐위된 공주라니. 무슨 막장 드라마도 아니고...

내가 다른 사람의 연애사에 김칫국을 사발째 들이마시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금단의 사랑은 자칫 잘못했다간 혜세국과의 전면전을 부를 수도 있기에 조심해야 한다.

게임에서 혜세국의 2공주 혜선은 이방인과 함께 조운회와 모우회를 습격해 대부분의 구성원들을 죽여버린 뒤, 회주 두 사람만을 살려둔 채로 심문을 진행하게 된다.

끝내 밝혀지는 내막은... 1공주의 암살을 사주한 범인이 혜선의 외조부였다는 것. 혜선은 언니에게 누명을 씌운 것도 모자라 끝내 암살까지 의뢰한 외조부에게 분노해 미쳐버린다.

여기서 중요하게 생각해야할 것은... 그 외조부라는 인간이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시간대에서도 혜세국의 실세라는 것이다. 거기다 에우데미아에 강경한 입장을 취하는 인간이기도 해서, 어떤 꼬투리를 잡아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 인간이 1공주가 에우데미아에서 멀쩡히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아마 1공주를 송환하라는 요청을 보낼 것이고, 그에 불응하는 순간 온갖 압박을 해오겠지.

물론 지금의 에우데미아는 혜세국과 싸운다고 해도 절대 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재앙이 빈번하게 출몰하는 지금, 국가 간의 전쟁은 전력의 낭비일 뿐이다. 최대한 갈등은 피하는 게 좋다.

"일단 왕실과의 사전 교섭이 먼저인가..."

"갑자기 무슨 소리야 형님."

"헤르만, 지금 바로 왕궁으로 가자."

"... 에휴, 알았어."

"아모스와 아일라는 저택에 사아씨와 함께 있어줘. 그리고 사아씨는 내가 혜윤이를 데려올테니, 걱정말고 기다리고 있어."

"... 감사합니다."

만약 알렉산더의 연심이 얕다면, 1공주와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도 해결책이 될 수 있겠지.

약간의 희생을 함으로서 잠재적 갈등을 해소하는 것이다. 미래에 혜선이 찾아오면 1공주가 죽은 원인을 김원상에게 돌리며 접근하면 된다.

하지만 나는 그런 배드엔딩에는 관심이 없다.

내 목표는 아셰리아 공주의 행복.

새삼 느끼는 거지만, 정말 어려운 목표다.

이제야 막 세상에 발걸음을 내딛은 아이. 타인의 슬픔을 자기 탓으로 돌리기 바빴던 아이.

그런 아이가 진정 행복해지려면 그녀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행복해져야만 한다. 왕자의 행복역시 공주에게 필요조건인 것이다.

거기다 알렉산더 역시 내 제자가 아닌가. 아이들만큼은 행복한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다.

내가 조금만 더 노력해서 이뤄줄 수 있는 행복이라면... 나는 무엇이든 해줄 수 있다.

학생들은 내가 에코니아에 떨어진 뒤, 내가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원동력이다.

* * *

후궁의 응접실.

나는 원래 알렉산더가 사건의 내막을 어디까지 파악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녀석을 먼저 찾아가려 했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나는 입궁하자마자 국왕내외에게 호출당했고, 두 사람이 모여있는 응접실에 먼저 찾아오게 되었다.

국왕이 말했다.

"자네, 몸은 괜찮나?"

"네, 치유 마법의 후유증으로 몸이 피곤한 것 이외에는 전부 괜찮습니다."

"그건 다행이군."

흠흠. 국왕은 목을 정돈하며 말을 이었다.

"내가 자네를 다급히 호출한 건 다름이 상의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네. 큰 일과 작은 일. 두 가지 중에 무엇을 먼저 듣고 싶나?"

"... 혹시 둘 중 하나는 좋은 소식이고 나머지는 나쁜 소식이라도 되는건가요?"

"음... 큰 일은 정말이지 밝은 일이고, 작은 일은 자네가 받아들이기 나름일세."

밝은 소식... 나머지는 받아들이기 나름?

나는 음식을 먹을 때 맛있는 것은 조금이라도 남겨두었다가 마지막에 먹는 스타일.

이런 선택지에는 나쁜 일을 먼저 듣고, 좋은 일을 나중에 들어 기분전환을 노리는 스타일이다.

대답은 정해져있다.

"그럼 작은 일을 먼저 듣겠습니다."

"북방 변경백인 모멘토 가문에서 딸과의 맞선을 추진해달라고 부탁해왔네."

"그런가요..."

오랜 시간 동안 에우데미아의 중심 노릇을 하며 전국에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 사대 가문이라 한다면, 역사의 흐름 속에서 공적을 인정받아 변경백으로 자리잡게 된 귀족들도 있다.

그 중 하나가 모멘토 가문.

게임의 쿠데타 루트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가문 중 하나지만, 그 가능성을 지워버리기 위해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나저나 상식적으로 국왕에게 맞선을 제안한 건 아닐테고, 알렉산더에게 제안을 한거겠지.

이미 알렉산더는 12세 생일을 지났으니, 맞선 제의가 들어와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알렉산더는 연애 상담을 해버릴만큼 이미 마음에 둔 아이가 있는데...

신분과 국가를 넘나드는 금단의 사랑...

그런 두사람 앞에 찾아온 거대한 시련!

이게 바로 게임의 메인 캐릭터였던 우수에 젖은 왕자님, 알렉산더에게 닥쳐오는 운명...!

"알렉산더로서는 꽤나 힘든 일이겠네요."

"자네 무슨 말인가?"

"네?"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라는듯한 얼굴로 국왕은 한 손가락으로 슬쩍 나를 가르켰다.

에이 설마...

그런 생각을 하고있었는데 국왕은 정말 친절하게도 한 음절씩 끊어가며 확인사살을 날렸다.

"자.네.와. 맞선을 추진해달라고 부탁했다네."

"에엑?"

나도 모르게 이상한 소릴 내버렸다.

잠자코 보고 있던 왕비님이 끼어드셨다.

"선생님께서 따로 가문이 있으신 게 아니다보니, 제게 간접적으로 맞선 요청을 부탁하는 경우가 지난 두 주 동안 꽤나 있었습니다."

"그랬...었나요."

"성공적으로 무도회를 거치셨으니까 무리도 아니죠. 하지만 교사님의 의향이 중요하니 굳이 간섭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취해왔습니다만..."

왕비는 잠시동안 말끝을 흐렸다.

"이번 건은 저희도 무시할 수 없다보니 이렇게 전해드리게 되었네요. 만약 선생님께서 관심이 동하신다면 추진해보겠습니다."

나도 모르게 이마에 손바닥을 대었다.

이게 설마 내 이야기였다니...

하지만 나는 연애나 결혼을 할 생각이 딱히 없다. 인생에서 단 한번 해보았던 연애. 그 당시에 너무나도 큰 교훈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럼 반려해주세요. 왕비님께는 이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왕비는 내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 독대에서도 내가 밝혀둔 적이 있었으니, 내 의향을 존중해주는 것 같다.

그나저나 이게 작은 일이라면 큰 일은 뭘까.

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작은 일은 제 맞선이었고, 그렇다면 큰 일은 무엇입니까? 엄청난 사건이라도 일어났나요?"

"엄청난 대사건이지."

"엄청난 대사건이죠."

국왕 내외가 동시에 답했다.

이게 부부의 단합력...

도대체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걸까.

국왕 내외는 서로를 쳐다보더니, 왕비가 발언을 양보하겠다는듯 손바닥으로 국왕의 무릎을 가볍게 두드렸다.

이내 국왕은 손가락 하나를 세운 채로 말했다.

"팟­"

팥...?

팥빵이라도 드시고 싶은 걸까.

갑자기 이런 이유를 하시는 이유가 뭘까.

"자네가 말했다지... 팟­"

어디서 자라던 팥에 재앙이라도 깃든건가.

왜 계속 팥 이야기를 하시는거야.

"이번에 알렉산더와 함께 납치되었던 여자 아이 말일세. 녀석이 글쎄... 본인이 그 아이를 사랑하는 것 같다고 우리에게 털어 놓았네."

뭐요...?

"그래서... 자네 의견을 묻고자 불렀다네. 이 두사람을 이어주기 위해 어떻게 해야겠는가?"

…….

부모에게 상담을 하다니...

내 생각 이상으로 녀석의 마음은 간절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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