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왕실의 가정교사-73화 (73/215)

〈 73화 〉 2­37. 버릴 수는 있어요.

* * *

2­37.잊을 수는 없어요. 하지만 버릴 수는 있어요.

"알렉산더가 정말 그렇게 말했습니까?"

"그렇다네. 자네가 팟­ 하고 느낌이 오는 순간이 생긴다면 사랑이라고 했다던데. 아닌가?"

"하... 하하... 맞습니다..."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였네. 아무튼 두 사람 간에 신분의 차이가 있다 보니... 우리에게 미리 제 마음을 털어놓으며 허락을 구하더군."

그 녀석에게 '팟­'을 가르쳐준지 일주일도 채 안된 시점인데, 벌써 그걸 자각하는 일이 생긴다니. 설마 납치라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흔들다리 효과가 작용하기라도 한걸까...

아차... 중요한 건 이게 아니지.

원래 알렉산더가 혜윤을 어느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등성했던 나다.

그런데 국왕 내외에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을 정도로 1공주를 좋아하고 있다니... 이 정도라면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할 수 밖에 없다.

나는 국왕 내외에게 물었다.

"두 분께서는 그 여자아이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계신가요?"

"사실 이전에 알렉산더 녀석이 그 아이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네. 백성들 사이의 상식을 알려주면서 거리를 함께 다녔다고 했지."

"왕궁에서 보호하고 있다보니, 그 아이와 식사를 함께한 적도 있어요. 슬럼의 아이라고 생각하긴 어려울 정도로 예법에 익숙해 보이더군요. 어딘가의 몰락 귀족이라도 되는 걸까요."

…….

왕비님.

몰락한 귀족 정도면 제가 고생도 안합니다...

두 대국 사이에 전쟁의 불씨가 될 수 있어요.

혼자 그런 생각을 하는 중, 왕비가 덧붙였다.

"신원이 불분명하긴 하지만... 일상생활을 하는 중에 알렉을 챙겨주려는 모습을 보였기에 저는 만족합니다."

"그랬지. 나도 서로의 마음만 확인되면 당장 약혼을 올려도 된다고 생각하네."

벌써부터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어 시부모의 마음을 얻어내다니. 폐위된 1공주의 친화력은 어마무시했다.

그나저나 두 사람은 윤의 정체를 자세히는 모르는 것 같다. 하긴 다른 나라에서 죽었다고 알려진 1공주가 자신들이 다스리는 나라에 숨어있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게임에서도 1공주가 에우데미아에서 죽었다는 사실은 사건의 당사자들 이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었으니, 전혀 무리가 아니다.

내가 생각에 잠겨있자, 국왕 내외가 말했다.

"아들이 이렇게 마음을 털어놓으며 허락을 구한 건 지금까지 없던 일이라 꼭 돕고 싶네. 그래서 자네 의견을 묻는 거야. 자네는 지금까지 아이들 문제에 혜안을 자주 보였지 않나."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귀족들 반응이 조금 귀찮긴 하겠지만... 뭐 어쩌겠어요. 이런 일 정도는 알렉이 원하는 대로 밀어주고 싶군요."

두 사람의 입장은 확고했다.

이렇게 되면 나에게 고민이 하나 생긴다.

그 고민은... 과연 국왕 내외에게 그 아이의 정체를 알리는 게 올바른 길인가.

두 사람 역시 나라의 수장이다. 특히 왕비는 게임에서도 나름대로 합리적인 정책만을 펼치던 인물. 알렉산더와 1공주의 관계가 얼마나 위험한지 알게 되면 생각을 바꿀 수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 나라는 개인의 감정과 행복을 중시하는 에우데미아다. 사실을 전한 순간, 국왕은 성검 아레트를 빼들고 혜세국의 김원상을 쳐죽이러 갈 수도 있다.

... 이거 좋은건가?

아니, 좋을리가 없다.

이건 현실이고, 전쟁은 피해야 한다. 거기에 국왕 역시 게임 속 역사에서 성군으로 기억되는 자다. 아무리 팔불출이라 해도 생각이 없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국왕 내외가 진실을 알게 되더라도 알렉산더의 행복을 지켜주고 싶어한다면... 이들에게 남는 선택지는 단 하나 뿐이다.

폐위된 공주의 존재를 은폐하는 것. 하지만 이 경우에는 혜세국에 발각되는 순간 전쟁이다. 왕족이 타국의 죄인을 몰래 숨겨준 꼴이니까.

…….

나는 국왕 내외에게 말할 수 없다.

알렉산더의 행복과 양국의 전쟁을 피하는 것.

상반된 두 가지 요건을 모두 충족하기 위해, 1공주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오직 나 하나 뿐이어야만 한다. 책임은 오롯이 나만이 져야 한다.

그렇게 하면... 만약 1공주의 정체가 발각되더라도, 두 나라의 전쟁만큼은 피할 수 있다.

마음을 정한 나는 국왕 내외에게 말했다.

"두 분의 마음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있지 않습니까?"

"해결해야 할 일이라. 선생님께서는 납치 미수 사건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것도 맞습니다만... 하나가 더 있습니다. 그 여자아이의 마음은 확인하셨는지요?"

왕비는 고개를 약간 갸웃거리며 답했다.

"음... 그러고보니 그걸 모르네요."

"그 여자 아이의 마음을 확인하는 것과, 납치 미수 사건. 두 가지를 제게 맡겨 주십시오."

"납치 미수 사건까지요?"

"네, 제게 짐작가는 부분이 있습니다."

내 말에 국왕이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

"어차피 범인들의 심문은 자네가 깨어난 뒤 진행하기로 정해두었네. 거기다 이번 사건은 자네가 관여한 부분이 많으니 좋을대로 하게나."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그 여자아이의 마음을 확인한다는 건 어떻게 할 생각인가?"

"그 아이의 어머니를 제 저택에서 보호하는 중입니다. 아이를 데려가 모녀의 의향을 모두 들어볼 생각입니다."

"흠... 알겠네. 우리가 도울 건 없나?"

국왕은 약간 아쉬운 듯이 말했다. 자신이 직접 도울 일이 없다는 게 내심 불만인가보다.

도움이라... 만약 내가 생각한 것처럼 된다면, 국왕 내외 뿐만이 아니라 다른 장관들의 도움도 필요할 것 같다.

미리 부탁해두는 게 좋겠다.

"당장은 아니지만, 폐하 뿐만이 아니라 재상부, 사법부, 왕궁부의 도움이 모두 필요합니다."

약간 의외인듯, 국왕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렇게나 큰 일인가?"

"아직 확정된 일은 아닙니다. 때가 오면 장관님들과 자리를 만들어 주십시오."

"... 알겠네. 내가 돕기는 하겠네만, 그래도 그들을 납득시키는 일은 자네가 해야만 하네."

"알겠습니다."

이 길을 걷는 것은 멍청한 짓일 수도 있다.

잘 되도 내게 이득은 없고, 1공주의 정체가 발각되는 날에는 모든 책임을 물게 될 뿐이니까.

하지만 나는 지금껏 여러 책임을 남들에게 미뤄왔으니... 이 방법으로라도 책임을 지고 싶다.

* * *

이후 소식을 전한 뒤 헤르만과 기다리고 있자, 곧 혜윤이라는 아이가 알렉산더와 함께 나왔다.

"스승님, 몸은 괜찮으십니까?"

"네, 이틀동안 쉬었더니 다 나았어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알렉산더의 안부 인사를 받은 뒤, 나는 혜윤에게 말했다.

"저택에 어머님이 기다리고 있단다. 슬럼가에 바로 가는 건 위험하니, 당분간은 내 저택에서 어머니와 함께 지내도 돼."

"... 알겠습니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여자아이는 꽤나 긴장된 표정을 한 채 대답했다.

알렉산더가 그녀에게 말했다.

"혜윤, 스승님은 믿을만한 분이셔. 그제 납치 사건에서도 우리를 위해 혼자 남으셨던 분이니까 긴장을 풀어도 돼."

"고마워, 알렉산더."

"그리고 뭣하면 내가 스승님의 댁으로 찾아갈테니까. 스승님, 괜찮을까요?"

"음, 방이 없어서 주무시고 가는건 안돼요. 저택이 왕궁보다는 작거든요."

"낮에 방문할 예정이라 괜찮습니다. 그럼 내일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허허... 바로 다음 날 찾아오겠다니.

지극정성이구만.

그런데 미안하다, 알렉산더.

나는 네 여자친구를 조금 몰아붙일 생각이야.내가 생각하는 방법은 저 아이의 큰 결심이 필요하거든.

"그럼 내일 봐요, 알렉산더."

"그동안 즐거웠어, 알렉산더."

"그래, 내일 보자."

"... 응."

우리는 작별을 하고 각자의 장소로 향했다.

그나저나.

'그동안 즐거웠다'라...

그 말을 하는 1공주의 표정에 얼핏 슬픔이 보였다는 건, 그저 내 기분 탓일까.

* * *

시간이 흘러 시하의 저택 앞.

시하와 헤르만, 그리고 혜윤은 저녁 시간이 되어서야 저택에 도착했다. 혜윤은 처음 보는 주변의 경치를 감상하고 있다.

시하는 헤르만에게 말했다.

"헤르만, 밖에서 여기 아가씨와 이야기를 좀 하고 들어갈게. 먼저 저택에 들어가 있어."

"알았어."

헤르만이 저택으로 들어가는 걸 본 시하는, 왕도가 잘 보이는 곳에 흙마법으로 의자 두 개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 더 낮은 의자에는 손수건을 깔고 혜윤에게 말했다.

"자, 여기 앉아 봐. 할 이야기가 있어."

혜윤은 그런 시하의의 행동에 의문을 느끼긴 했으나, 이내 순순히 그가 하는 말에 따라 손수건이 깔려있는 의자에 앉았다.

"이곳에서 내려다 보는 경치는 참 좋아."

"……."

혜윤은 마음 속으로 시하의 말에 긍정했다. 지금은 저녁 시간대. 해는 이미 저편에 숨었고, 어둠 속의 거리는 불이 밝혀져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표류자라는 사실은 알고 있니?"

"... 네."

"음, 그렇구나."

잠시간의 침묵.

그저 두 사람은 저 멀리 경치를 볼 뿐이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혜윤이 물었다.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셨었죠."

"그래."

"그게 무엇인지 여쭈어도 될까요?"

"흠."

약간의 뜸을 들이고, 시하가 말했다.

"운명이란 정말이지 묘한 단어라고 생각해. 세상엔 아무리 노력해도 안되는 일도 있는 반면에, 기적이라는 말 외에는 표현할 수 없는 일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거든."

"... 그렇죠."

"나는 그토록 혐오하던 에코니아에 오게 되었지만 이곳의 인간들을 마냥 싫어할 수는 없었고, 너는 온갖 불행의 끝에 알렉산더를 만났지."

시하가 내뱉은 말의 대부분은 혜윤이 이해하지 못할 것이었다.하지만 한 대목에서, 혜윤은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온갖 불행의 끝.

혹시나 이 사람은 내 정체를 아는 걸까, 잠자코 듣고만 있던 혜윤은 다급히 시하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시하는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왕도의 풍경을 응시하고 있다.

"지금 너가 하는 생각이 맞아. 폐위된 혜세국의 제 1공주 윤. 나는 너의 정체를 알고 있어."

"... 언제부터 알고 계셨던 거죠?"

"너가 명월시를 쓴 그 순간부터. 하지만 확신하게 된 건 너의 이름을 듣고 나서야. 정말로 위장을 하고 싶었다면 혜윤이라는 이름은 쓰지 말았어야지. 혹시나 알렉산더에게는 가르쳐 줘도 되겠다는, 그런 희망이라도 품었던 거니?"

혜윤은 감히 대답할 수 없었다.

원래라면 이름을 알려줄 일이 없었지만, 알렉산더와 처음 만난 그 순간에는 왠지 모르게 경계심이 얕아졌던 것도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혜윤은 말했다.

"... 저를 어떻게 하실 셈인가요?"

"모든 건 네 대답에 달렸지."

"……."

"왜 알렉산더의 곁에서 떠나려는 거니."

이 사람은 어디까지 알고 말하는 걸까.

혜윤은 당장 새벽에 시하의 저택을 몰래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자신이 알렉산더의 곁에 있는 한, 그에게는 폐만 끼칠 것이 분명하니까.

왕궁에서의 시간은 그녀의 마지막 욕심. 알렉산더와의 마지막 추억으로 간직할 셈이었다.

이 사람은 나를 넘기려고 하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 해도, 나에게 후회는 없다.

혜윤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시하에게 말했다.

"어차피 제 존재는 알렉산더에게 해가 될 뿐이니까요. 김원상, 그 자는 제 죽음을 확인하는 그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을 인간이에요."

"만약... 정말 만약이에요. 알렉산더가 정말 저를 아낀다면, 그리고 제가 이곳에 살아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전쟁이 벌어져도 이상한 일이 아니에요."

쓸쓸하게 말하는 혜윤.

시하와의 대면이 겨우 두번째인 그녀다.

생판 남인 사람에게 왜 자신이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있는지, 자신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저... 자신의 마음 속에 담아두었던 말들을 누군가에게 토해내고 싶을 뿐이었다.

그렇게 말을 계속하는 도중, 그녀의 감정은 북받쳐 오르기 시작했다.

"맞아요. 저는 폐위된 공주일 뿐이에요. 하지만 덕분에 이곳에서 알렉산더와 만났어요. 이것도 당신이 말한 운명이겠죠."

"제가 만약 공주로서 그 아이를 만났더라면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까요. 거리를 다니며 소소한 추억을 쌓을 수 있었을까요. 그 아이에게 이 정도로 간절해질 수 있었을까요."

혜윤은 끝내 울먹이며 말했다.

"그러니까 저는 지금 이 정도만으로도 만족해요. 만약 저를 넘기실 생각이라면, 그 아이가 모르게만 해주세요. 부탁드려요..."

앉은 자리에서 고개 숙여 울기 시작한 혜윤.

시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다릴 뿐.

그렇게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 흘렀다.

혜윤이 약간 진정하게 되자, 시하가 말했다.

"만약 너에게 이 썩어빠진 운명을 벗어나 그 녀석과 함께 할 방법이 있다면."

"……."

"만약 그 방법이 알렉산더에게 전혀 해가 되지 않는다면. 너는 그 길을 걸을 수 있겠니."

"... 네?"

혜윤은 시하의 말에 고개를 들고 그를 보았다.

"물론 이 길은 정말이지 힘든 길이 될거야. 너에게는 각오가 필요해."

말을 이어나가는 시하의 표정은 아직도 변함이 없었다.

혜윤이 말했다.

"그 방법이 뭐죠?"

"그 방법을 말하기 전에 밝혀둘게. 너는 혜세국에 남겨둔 모든 것. 인연이든 원한이든, 너는 모든 과거를 버려야만 한다. 그러지 못하겠다면 난 너를 돕지 않을 생각이야."

인연. 혜윤에게 남아있는 혜세국의 인연은 명월주인 부친과 하나뿐인 동생이 전부이다.

원한. 김원상은 자신의 공주로서의 삶을 앗아 갔다. 거기다 그는 어릴 적 부터 하나뿐인 친구로 존재해주었던 자신의 대역, 유나를 죽게만든 자다.

그들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동시에.

지금의 혜윤에게는 너무나 멀리 있는 것이다.

생각을 마친 혜윤은 말했다.

"잊을 수는 없어요. 하지만 버릴 수는 있어요."

"그래..."

혜윤의 간절한 대답을 들은 시하는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크게 기지개를 펼치며 말했다.

"으차... 그럼 이 더러운 운명부터 고쳐볼까."

그 모습으 지켜보던 혜윤이 물었다.

"...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

그 물음에 시하는 말없이 경치를 보았다.

마음을 다잡을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와서 지게 될 가장 큰 책임.

자신이 생각해낸 그 방법을 혜윤에게 밝히는 그 순간, 시하는 모든 책임을 짊어지게 된다.

그 책임의 무게는 분명 무거운 것이다.

그렇게 잠시간의 시간이 지나고

결심을 마친 시하는 천천히 돌아보았다.

"일단."

그리고 그는 혜윤에게 고했다.

"... 너와 사아를 죽일 생각이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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