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 244. 서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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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4. 서걱.
12월의 마지막 날.
오늘은 내 저택에서 아셰리아 공주가 제안한 연말 파티가 예정된 날. 나는 지금 음식을 준비하기 위해 주방에서 양파를 까는 중이다.
파티의 꽃은 바로 음식이지 않은가. 갑작스럽게 파티의 호스트가 되긴 했지만, 이왕 하게 되었으니 학생들에게 특별한 음식을 대접하고 싶어졌다.
그렇게 메뉴를 고민하던 중, 카페테리아 고블링에서 맛있게 음식을 먹던 아셰리아 공주의 모습이 떠올랐고... 내가 살던 세계의 음식 중 에우데미아에서 만들 수 있는 것을 하기로 했다.
내 옆에서 닭을 손질하던 사아씨가 말한다.
"역시나 제가 더 일찍 일어나서 준비했어야..."
"저 때문에 커진 일인걸요. 거기다 아직 이 저택에 익숙해지지도 않으셨는데 도와야죠."
"남성, 그것도 고용주께서 부엌에 서도록 하는 것은 사용인으로서 부끄러운 일입니다."
"제가 살던 세계에서는 흔한 일이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요리는 했었으니까 괜찮습니다."
혜세국에는 아직도 남자가 주방에 서면 안된다는 고정 관념이 남아있는 걸까. 사아씨는 내가 주방에 있는 게 내심 불편한가 보다. 하지만 나는 굳이 따지자면 요리를 즐기는 편이다.
어렸을 적부터 일로 바쁘신 어머니를 대신해 식사를 준비하는 일이 잦았고, 조금씩 성공적인 음식을 하게 되었기에 요리는 언젠가부터 내 취미가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문제가 아니어도 오늘 내가 요리를 해야하는 이유는 따로 있으니...
"사아씨는 아직 이곳의 고급 요리는 익숙하지 않으시잖아요. 혜세국의 요리는 잘 하실 것 같지만요."
"그렇긴 합니다만..."
지난 며칠간 사아씨가 집안의 사용인 노릇을 하기는 했지만, 그녀는 아직 이곳의 요리에 적응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슬럼가에서 생활할 때는 간단한 음식으로 끼니를 때웠을 것이니 당연한 일인데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에게 파티 요리를 일임한다는 건 너무 무책임한 일이지 않은가.
그렇다고 외부의 음식을 그대로 사오기엔 모양 빠지는 일이고... 결국 내가 직접 하게 된 것이다.
"나중가서 혜세국 식재료를 구하게 된다면 몰라도, 지금 여기서 구할 수 있는 것으로는 그곳 음식을 만들긴 어려울 거에요."
"면목이 없네요..."
"괜찮아요. 두 사람은 4년간 편히 지낼 수도 없으셨잖아요. 이곳에 적응하시게 되면 그때부터 사아씨가 활약해 주시면 됩니다."
"... 배려 감사합니다."
나중 가서 자신의 실력을 발휘해주면 된다.
그런 말로 사아씨를 납득시키고 있자니...
딩동
에우데미아에서는 오직 해방자의 저택에만 존재하는 초인종이 울렸다.
"누가 온 것 같은데... 제가 나가볼게요. 사아씨는 재료를 마저 손질해주세요."
"알겠습니다."
* * *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안녕하세요...?"
현관에는 아셰리아 공주와 아샤가 있었다. 파티는 한참 뒤에나 열리는데, 왜 벌써 온 것일까.
"오라버니께서는 유나님과 함께 계시다가 파티가 시작될 때쯤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아..."
"두분께서 하실 말씀이 있는 듯 해서... 저는 자리를 피해드릴 겸 선생님 댁으로 먼저 왔어요."
"그런 분위기는 확실히 부담스럽죠... 어서 들어들 오세요."
"실례하겠습니다."
내 의문을 해결해주기라도 하는 듯, 아셰리아 공주는 자신이 먼저 찾아온 이유를 밝혔다.
그런데 공주와 아샤 둘만이 저택에 있으면 심심하지 않을까. 지금 저택에는 나와 사아씨를 제외하면 아무도 없는 상태다.
아모스와 아일라는 높으신 분들을 부담스러워 하는 분위기여서, 따로 내가 예약해준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고 오도록 권유했다. 거기에 헤르만은 따로 해야할 일이 있어 외출한 상황. 지금 저택에 있어도 둘은 할 일이 없을 것이다.
나는 아셰리아 공주에게 물었다.
"지금 저택에 아무도 없고... 저는 주방에서 파티 요리를 준비하는 중이라서 아샤와 둘이서만 있어야 하는데 괜찮으신가요?"
"……."
내 말에 공주는...
나를 빤히 올려다 보았다.
"그럼 저와 아샤도 도와드릴까요?"
"... 네?"
"제가 제안한 연말 파티인데, 선생님께서만 고생을 하시는 것 같아서요."
그녀는 평소와 같은 무표정이다.
하지만 나도 이곳에 온지 벌써 3개월. 그동안 아셰리아 공주와 함께 지내면서 그녀의 무표정에도 조금씩 차이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완벽한 무표정이 있다면... 약간 긴장을 한 상태로 무표정을 연기하는 경우 역시 있다.
지금이 바로 후자의 경우다. 이 경우에는 상대방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긴장을 하고 있는 것.
이럴 때 내가 거절을 하게 되면, 그녀는 큰 내색은 하지 않아도 저기압이 되어버린다.
아무리 그래도 일국의 공주님인 그녀를 주방에 세워도 되는걸까. 이것만으로도 고민인데... 공주의 시야 바깥에서 아샤까지 나를 째려 보면서 거절해라, 거절해라, 눈으로 말하고 있다.
... 나는 마음 속으로 거절 의사를 밝히기로 하고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공주님께서 주방에 서는 건..."
조금씩 어두워지는 공주님의 표정.
…….
"여러모로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간단한 재료 손질만 도와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나는 결국 져버렸다.
내가 말을 마치자 다시금 공주님의 얼굴은 환해졌고, 아샤의 표정이 역으로 어두워졌다.
"주방은 이쪽이에요..."
미안하다, 아샤.
그래도 어쩌겠니. 왠만해서는 즐거운 날에 기분 상하지 않았으면 하는 걸...
* * *
주방에 들어오자 아샤의 얼굴은 한 층 더 일그러졌다. 아무래도 식재료가 신경쓰이나 보다.
"발 하나 달린 귀신에, 부정타는 붉은 열매..."
…….
발 하나 달린 귀신은 숙주나물.
부정타는 붉은 열매는 토마토다.
사실 에우데미아에 온 뒤로 이 두 가지를 쓰는 음식은 제대로 보지 못했다. 저번에 아셰리아 공주와 방문했었던 카페테리아 고블링에서 먹은 파스타만이 토마토를 쓰고 있었지.
아샤는 말을 덧붙였다.
"거기다 마늘은 왜 이렇게 많은 거야... 누군가를 냄새로 독살할 생각이에요?"
지금껏 내가 본 것 중 가장 많이 말하는 아샤.
하지만 나는 진성 한국인이다.
마늘이 없으면 그게 음식인가.
물론 아이들이 먹을 예정이니 마늘을 적게 넣기는 할 거다만, 그래도 아샤의 눈에는 너무 많아보였나 보다.
나는 아샤에게 말했다.
"토마토는 피부와 노화방지, 다이어트에 효과가 좋아. 그리고 숙주나물과 마늘도 적당히 쓰면 얼마나 맛있는 요리가 되는데."
"... 웩."
"그런 거 다 미신이니까 오늘은 그냥 먹어. 내가 살던 세계에서는 얼마나 많이 먹는 건데."
웩이라니... 오늘 아샤 너는 요리를 전부 먹어보고 나서 5700자 시식평을 꼭 쓰고 가라.
나는 옆에서 멍하니 있는 아셰리아 공주에게 양파와 도마를 준비해주며 말했다.
"공주님은 여기... 양파를 썰어주실래요? 모양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요."
"... 알겠습니다."
내 말에 대답한 공주는 무언가 큰 다짐이라도 한 듯이 도마가 올려진 조리대 앞에 섰다.
그리고 깊게 한 숨을 들이킨 다음...
한 손에 얼음으로 된 검을 만들었다.
... 뭐요?
서걱.
내가 차마 말릴 틈도 없이. 우리 공주님은 양파와 도마를 물 흐르듯이 단숨에 베어버렸다.
그 순간 부엌에 있는 모두가 일시 정지.
아샤는 이마에 손바닥을 얹고 있으며,
사아씨는 선 채로 굳은 채 입을 벌리고 있다.
나는 다급함을 감추지 못한 채로 말했다.
"아셰리아 공주님. 잠깐만요. 일단 얼음으로 만드신 검은 집어 넣으시구요..."
자연 마력을 쓰는 나와는 다르게 검을 심상 마력으로 만든 것인지, 검은 녹지도 않고 허공에 새하얀 마력을 흩날리며 사라졌다.
나는 두 동강이 난 도마를 치우기 시작했다.
"잠시만요... 일단 이건 치워두고."
그나저나 이곳을 설계한 해방자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도마가 완전히 두동강이 날 정도인데, 조리대는 실금 하나만 생긴 채로 건재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다.
그 일격을 버텨내다니...
이런 잡생각을 하고 있자니, 아셰리아 공주가 풀이 죽은 채로 말했다.
"그게... 죄송합니다."
"요리는 처음이신가요?"
"... 네."
"그럼 어떻게 하는지 모르는 게 당연하죠. 사과하지 않으셔도 되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게임에서 마냥 완벽하게만 보였었던 그녀의 유일한 약점이 요리였다니.
잔해를 치운 나는 공주님 앞에 새로운 도마를 가져왔고, 그녀에게 식칼을 쥐어주며 말했다.
"지금부터 식칼 쓰는 법을 가르쳐 드릴게요."
"... 네."
그래도 아셰리아 공주는 날 돕는다고 나선 셈이니, 타박을 해야한다는 생각보다는 대견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우리 공주님처럼 착한 아이가 세상 어디에 있는가.
나는 공주의 바로 뒤에 서서 식칼을 든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내 왼손으로 식칼을 받치는 방법을 보여주며 설명해주었다.
"자, 일단 손에 힘은 빼세요. 손을 베지 않으려면 왼손이 중요해요. 이렇게... 제가 하는 것처럼 손가락 마디가 식칼의 옆면을 지지하게 해줘야 해요."
"……."
첫 칼질이 긴장되는 걸까.
유난히 전신을 떨고 있는 공주님이었다.
"공주님, 칼질을 하실 때 몸을 떠시면 안되요. 진정하시고, 무서운 일 아니에요."
"네에..."
내 말에 약간은 진정하게 된 아셰리아 공주.
우리는 이미 반토막이 난 양파의 면이 바닥을 향하도록 한 채, 그걸 차근차근 썰기 시작했다.
"칼날이 대각선으로 들어가게 집어넣어야 부드럽게 자를 수 있어요. 차근차근. 힘을 빼야 식재료의 면이 훨씬 깨끗하게 잘리게 되구요."
언젠가는 나도 이렇게 요리를 배웠던 것 같다.
내가 배운 방식대로 어린 아이에게 재료 손질을 가르치게 되다니, 감회가 새로운 일이다.
"이제 공주님이 왼손으로 칼을 받쳐봐요. 엄지 손가락이 베이지 않도록 손 안에 잘 숨기셔야 해요. 위험하지 않은가 계속 확인하면서..."
그렇게... 한동안 나는 아셰리아 공주에게 붙어 안전한 칼질 연습을 돕게 되었다.
하지만 계속 이런 식이라면 원래 해야할 음식의 진도가 느리게 되지 않을까.
나는 구경만 하고 있는 아샤에게 부탁했다.
"아샤. 저는 공주님께 칼질을 좀 더 가르쳐드려야 할 것 같으니까 당신은 요리를 도와줘요."
"귀찮..."
"저기 돼지고기에 다진 양파랑 제가 만들어둔 소스를 얹어줘요. 오븐 사용법은 사아씨한테 물어보고 180도로 구우면 되요."
"... 에휴."
내가 공주님과 함께 채소 썰기 교실을 진행하고 있자, 아샤는 싫은 내색을 하면서도 터벅터벅 내가 시킨 일을 시작했다.
이후로 공주님은...
양파에 이어 당근과 파같은 여러 채소를 정복.
칼질 하나만큼은 아이치고 잘 하게 되었다.
... 물론 좋은 일만 있던 것은 아니었지.
"얼음이 그렇게까지 클 필요가 없어요!"
"치킨 스톡은 조금만 넣어도 되요. 그렇게 많이 넣으면 맛있는 걸 넘어서 음식이 짜져요..."
얼음을 자신의 머리만큼 크게 만든다거나.
'만능 육수'를 왕창 들이 붓는다거나.
수많은 해프닝이 연달아 벌어졌다.
그래도 난 괜찮아...
공주님의 표정은 밝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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