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화 〉 245.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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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5. 죄송합니다.
에우데미아 귀족들이 먹는 음식은 겉보기에 화려하지만 맛은 밋밋한 것이 많다.
버터나 치즈를 비롯한 기름진 재료와 각종 향신료는 엄청나게 많이 들어가지만, 음식에 간 자체는 적게 하기 때문이다.
왕궁의 음식들 역시 하나같이 고급스럽긴 하지만 내게는 너무 느끼한 동시에 심심한 요리였다고 해야 하나... 자극적인 맛에 길들여진 나에게 이곳의 요리는 고역이었다.
그에 반하면 오늘 파티 요리들은 정말이지 내 취향을 충족시키도록 만들었다. 비록 한국에서 먹던 장류가 없어서 한식은 못만들었긴 했지만, 나름 괜찮은 결과물을 낸 것 같다.
풀드포크를 빵 사이에 넣어먹고 있는 알렉산더가 말했다.
"스승님, 이 잘게 찢어먹는 고기 요리는 정말 맛있었습니다. 고기만을 먹을 때는 꽤나 자극적인 음식이라고 느꼈는데, 빵 사이에 넣어 먹으니 꽤나 별미더군요."
"맛있었다니 다행이네요. 아샤가 요리를 도우면서 레시피를 배웠으니까, 부탁하면 왕궁에서도 먹을 수 있을 거에요."
"그렇습니까? 아샤, 왕궁에 가면 조리사들에게 선생님의 레시피를 알려줄 수 있겠나? 폐하께서도 꽤나 마음에 들어하실 것 같아서 말이야."
아샤는 알렉산더의 말에 귀찮음이 얼굴 전체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곁눈질로 나를 째려보던 그녀는 이내 깊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아... 알겠습니다."
"오오, 고맙다."
풀드포크 외에도 오늘 한 음식으로는...
소스부터 직접 만든 피자
시장에서 팔법한 치킨
숙주를 곁들인 스테이크
약간 매콤하게 만든 로제 파스타
소고기를 듬뿍 넣은 마늘 필라프
저쪽 세계 기준으로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것은 죄다 한 셈이다.
그래도 걱정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평생 심심한 음식만 먹어온 귀족 자제들이지 않은가.
하지만 다행히도 단짠은 에코니아에서도 통하는 불변의 진리였다.
뒤늦게 돌아온 헤르만도 아이들 틈에 껴서 음식을 맛있게 먹고 있으니, 이 정도면 성공적인 파티 요리가 아니었을까.
헤르만이 파스타를 그릇에 덜어가며 말했다.
"저번에 그 고블린 식당도 그렇고, 형네 세계는 음식은 맛을 엄청나게 끌어올린 느낌이네."
"내 세계에서 이 정도면 꽤 대중적인 요리야."
"이게 대중적인 거라고? 도대체 얼마나 맛있는 요리가 더 있는 거야..."
"나는 이 정도가 한계긴 하지만... 그 고블린 주방장은 더 알고 있지 않을까. 스승이라던 표류자는 헤드 쉐프라 했었지? 헤드 쉐프는 고급 요리점의 최고 주방장을 말하는 거야."
"쩝... 아쉽게 됐구만."
헤르만은 내심 그 고블린 주방장의 실력을 인정하긴 했어도, 막상 그곳을 다시 가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인가 보다.
그렇게 모두가 맛있게 식사하는 모습을 구경하다 우연히 창밖을 보았는데...
하늘에서 왠 하얀 쓰레기가 내리고 있었다.
"눈이 많이 오면 안되는데..."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저택 문을 열고 밖을 나와보니, 눈보라와 함께 강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손을 뻗어 눈꽃 한 송이를 손바닥에 얹어 보니, 도로에 쌓이기 좋은 습기가 느껴진다.
저택의 정원으로 나와 도로를 바라보니, 눈은 이미 질척질척하게 쌓여있는 상황.
흠...
이 정도면 아이들을 각자의 집으로 돌려보내는 게 훨씬 위험하지 않을까.
내가 사는 곳이 그리 높지 않은 곳에 있긴 해도, 약간의 경사가 있는 곳이다. 특히나 마차는 아무리 숙련된 마부라고 해도 아차하는 순간 미끄릴 경우도 있을 것이다.
내 저택에 방이 적은 것이 문제이긴 하지만, 지금 날씨로 봐서는 아모스와 아일라 역시 저택으로 돌아오지도 못할 것 같다.
아모스의 방에 알렉산더와 기디언을 재우고, 아일라의 방에 아셰리아와 아샤를 재우면 되지 않을까.
왕자님과 공주에게 각자 방을 온전하게 주지 못하는 것은 신경쓰이지만, 위험한 것 보다는 훨씬나을 듯 하다.
나는 아이들을 설득시켜 집에서 재우고 내일 보내기로 마음먹고 저택 안으로 돌아갔다.
"마차로 돌아가기엔 지금 눈이 너무나 많이 오는데, 내일 해가 오를 때까지 제 저택에서 있다가 가실래요?"
잠시 문 밖을 나갔다 들어왔음에도 내 어깨에는 눈이 조금 쌓인 상태. 아이들은 내 모습을 보더니 창 밖을 보더니, 기디언이 말했다.
"음... 선생님 말씀대로 눈이 이미 많이 쌓였네요. 궁까지 가깝다 해도 안전한 선택을 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 * *
내 저택에 묵고 가기로 정한 뒤로도 파티는 계속되었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아이들은 각자에게 배정된 방에 들어가 잠에 들었고,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난 뒤에야 내 방의 서재로 향할 수 있었다.
서재에서 해방자가 모아둔 책을 읽는 건 지난 한 주 동안 잠들기 전의 내 루틴이 되었다.
이곳에는 에코니아를 살아가기 위한 전반적인 상식 도서가 없는 건 아니지만, 결국 강함과 연관되어 있는 도서들이 특히 많았다.
자연과 심상 마법.
마법진에 대한 이론.
각국 강자들의 전투법.
해방자 역시 악인들이 날뛰는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수많은 고민과 노력을 했겠지.
나 역시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힘을 내야할 것이다. 그래서 요즘은, 한 노트에 내가 알고 있는 게임의 정보를 정리해가면서 여기 있는 책들로 내용을 보강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나자... 저택 2층의 복도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누군가 화장실에 가는 소리겠지.
하지만 다시 책에 집중하려는 그 순간, 내 방문에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읽던 책을 덮고 문을 향했다.
"누구세요?"
"늦은 밤에 실례합니다, 선생님."
내 방문 앞에는 아셰리아 공주가 와 있었다.
유나에게 빌려입어 약간은 커보이는 수면용 원피스를 입은 채로.
"이 늦은 밤에 왠 일이에요?"
"잠자리가 변해서 그런지 잠들 수가 없어서요. 잠시 방에서 나와 바깥 구경을 하려 했는데, 선생님 방에 불이 켜져있던 걸 보았습니다. 혹시 주무시던 중이셨나요?"
"아닙니다. 서재의 책을 읽고 있었어요."
"그렇군요..."
자는 곳이 달라지면 적응하지 못하는 타입이라도 되는 걸까. 아셰리아 공주의 두 눈에는 잠이 오는 기색조차 없는 상황.
공주는 말했다.
"그럼 그 서재를 구경해도 될까요?"
"예...?"
"헤르만님께서 이곳이 해방자의 저택이라 하셨기에 흥미가 동해서요. 일전에 선생님의 방은 구경해보았지만, 해방자께서 쓰시던 서재에는 어떤 책이 있을지도 궁금해졌습니다."
뭐요...?
하긴 표류자에 대해 그렇게까지 관심을 가지던 공주다. 호기심이 생기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런 야밤에 공주님이 남자의 방에 들낙거리는 일은 올바른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아무리 그래도 이 밤에 이성의 방에 들어오시는 건..."
"... 선생님께선 제 방에서 주무셨지 않습니까."
내가 공주의 방에서 언제...
아.
에코니아에 떨어진 첫 날. 그 날의 이시하씨는 공주의 방에서 아주 그냥 숙면을 취하셨다.
과거의 나는 무슨 불경한 짓을 한거지...
순식간에 거절할 논리가 사라져버렸다.
"그럼 서재를 구경만 하시는 거예요..."
"알겠습니다."
"들어오세요."
내 허락이 떨어지자, 아셰리아 공주는 실례하겠습니다 라는 말과 함께 내 방에 들어왔다.
나는 그런 공주보다 조금 더 빠른 걸음으로 서재에 향했고, 내가 어린 시절 플레이하던 에코니아 아포칼립스의 온갖 배드 엔딩을 정리해둔 노트를 책장 구석에 숨겨두며 말했다.
"왕실에 있는 책들과 크게 다른 건 없죠?"
"……."
자그마한 서재를 눈으로 훑어보는 공주.
이내 그녀가 말했다.
"이곳에서 선생님과 책을 읽다 가도 될까요?"
"당연하죠. 원하시는 책으로 골라 집으세요."
나는 별 생각없이 그녀의 의견을 수락했다.
대학에서도 전공 서적은 수면제였다. 이곳의 책들도 마찬가지이니, 책을 읽다가 잠이 오게 되면 돌아가서 잠을 청하겠지.
이내 그녀는 역사서 한 권을 꺼내더니 서재 한 켠에 놓여 있는 작은 소파에 앉았다.
나 역시 읽던 책을 다시 펼쳤다.
물론 정리하고 있던 노트는 꺼낼 수 없지만, 중간중간 다른 종이에 나만 알 수 있도록 정리해둔 다음 옮기면 될 것이다.
그렇게 책 넘기는 소리만 들리던 중, 아셰리아 공주가 말했다.
"선생님."
"왜 그러시나요?"
"... 오늘 제가 도와드린다고는 했지만, 여러모로 민폐만 끼친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주방 일을 돕던 것을 말하는건가.
하지만 평생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살던 아이가 처음으로 요리에 입문한 날이다.
거기다 나로서는 팔방미인으로만 여겨졌었던 게임 속 그녀와는 다른 모습에 감회가 새로웠다고 해야할까. 서투른 분야에 열중하는 그 모습이 평범한 소녀로 보여서 오히려 즐거웠다.
... 적어도 게임 속 미래에서 보았던 그녀의 모습보다는 훨씬 즐거워보였으니까.
"처음이니까 그런 거죠. 저도 옛날에 요리를 처음 배울 때는 실수를 많이 했었어요."
"그런가요?"
"당연하죠.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으니까요."
공주가 책을 넘기는 소리는 어느 순간부터 멈춰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선생님은 언제 요리를 배우셨나요?"
"어렸을 때부터 요리해야할 일이 많았거든요. 그때 인터... 아니 여러 서적을 보기도 하고, 어머니께 배우기도 했죠."
"아..."
조금은 힘없는 탄식.
내가 말실수를 한 것일까.
아마도 어머니라는 존재는 그녀에게 꽤나 아픈 기억일 것이다. 괜히 말했다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공주는 내 예상을 깨는 말을 했다.
"죄송합니다..."
"네?"
나는 오히려 사과를 받게 되었다.
나는 공주를 뒤돌아볼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침울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선생님께서는 이곳에 오게 되셔서, 가족분들과는 만나지 못하시잖아요."
내가 안좋은 기억을 떠올리게 한 줄 알았는데, 오히려 저런 이유로 사과를 받게 되다니.
그녀가 미안해할 일이 아니다.
"그런 걸로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되요."
"하지만... 어머님의 이야기를 하실 때, 그 시절을 생각하시는 모습이 즐거워 보이셨어요."
"……."
기색을 숨기지 못했던 걸까.
하필이면 지금 이런 걸 숨기지 못해서 아이에게 죄책감을 가지게 한다니... 이건 내 실수다.
"공주님. 잘 들으세요."
나는 공주가 앉아 있는 소파에 다가가 한쪽 무릎을 대고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녀는 자신의 발끝을 보고 있다.
"저는 가족이라고 할만한 사람이 없었어요. 어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었죠. 그런데 이곳에 오기 6개월 전에... 어머니께서는 돌아가셨어요."
그제서야 아셰리아 공주는 나를 바라보았다.
눈에는 약간의 눈물이 고이려하고 있었다.
우리 공주님은 어쩜 이리 다른 사람의 감정에 민감한 것일까. 아마 지금도 내가 슬퍼할 것이라 생각하여 연민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걸 원하지는 않는다.
"아무런 목적도 없이 살고 있다가... 이곳에 오게 된 거에요. 공주님의 걱정처럼 각별한 사람도 딱히 없었구요."
"... 그럼 미련은 없으신가요?"
미련.
미련이라...
그 단어에 나는 잠시동안 생각에 잠기었다.
삶에 의미도 느끼지 못했고, 목적조차 없었다.
그런 내가 미련이 있을 리 없다.
만약 있다면... 하나 뿐이지 않을까.
어머니를 들이받은 그 자식을 찾지 못한 것.
그 일만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왜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셔야만 했고...
왜 그 자식은 홀로 숨어 세상을 살아가는가.
그 사실에 화가 난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있기는 하지만... 어찌할 수 없었던 일이에요. 아마 그곳에 남았어도 이루지 못했을 거에요."
"……."
아셰리아 공주는 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다.
아니... 정확히는 초점이 내 뒤를 향하고 있다.
가끔 이 아이는 이렇게 내 무언가를 꿰뚫어 보는 느낌으로 관찰할 때가 있다.
"공주님?"
"아, 네?"
"제 뒤에 무언가 떠있기라도 한가요?"
"... 아뇨."
하긴, 아무리 총명한 공주님이라 해도 내 뒤에 귀신이 붙어있다거나 그런 걸 볼 리가 없지.
나는 그녀의 옆에 앉으며 하던 말을 이어갔다.
"적어도 저는 그곳에서 지낼 때보다는 행복해요. 오늘 공주님께 요리를 가르쳐 드리는 것도 꽤나 즐거운 일이었고, 다른 아이들이 먹는 걸 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어요."
"그런가요..."
아직은 힘이 없는 목소리.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공주님은 어떠셨나요?"
"네?"
"공주님께서 손수 도와주신 요리를 모두가 나누어 먹으며 여러 이야기를 했잖아요."
"……."
"공주님도 즐거우셨죠?"
그녀는 약간 고민하다 말했다.
"즐거웠던 것 같습니다."
"저도 즐거웠어요. 그러니 제 걱정은 안하셔도 됩니다. 아시겠죠?"
"... 알겠습니다."
방금 전보다 조금은 밝아진 목소리였다.
그 후로 공주는 책을 읽으며 가끔 대화를 나누다가 꾸벅꾸벅 졸게 되었고...
잠이 덜 깬 아샤의 칼침이 무서웠던 나는 공주를 내 방 침대에서 재울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나는 서재의 소파에서 새우잠을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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