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왕실의 가정교사-82화 (82/215)

〈 82화 〉 2­46. 삶의 증명 (2)

* * *

2­46. 삶의 증명 (2)

김원상의 저택.

나는 배정받은 방에서 손바닥 위에 조그마한 검은 구슬을 올려놓고 이리저리 굴리고 있다.

그 늙은이는 1공주 암살 사주의 경과를 확인할 수 있을 때까지 이곳에서 지내라고 했지만... 결국 나를 믿을 수 없다는 거겠지.

내 정보가 도움이 되지 않았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동원해서라도 입막음을 시도할 것이다.

물론 그런다고 내가 위험해질 일은 없다.

애초에 내 정보가 틀릴 수도 없을 뿐더러... 내게 위협이 될만한 인물은 혜세국에서도 손으로 꼽을 정도로 적으니까.

만약 약간의 오차가 있었다고 해도, 이 구슬을 그 자리에서 발동시키고 유유히 빠져나가면 그만인 일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도중,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오더니 한 노인이 말했다.

"어르신께서 부르셨소. 어르신께서는 대청에서 아가씨와 함께 기다리고 있으시오."

"... 알았어."

무슨 일로 나를 부르는 걸까.

물론 김원상의 호출은 처음이 아니다.

하지만 대청에 다가는 매 순간마다 내게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모습 외에는 없었기에, 1공주 암살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면 나가기 싫은 것이 내 본심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나는 명목상 이 집안의 식객. 그 늙은이는 엄연히 나를 손님으로서 대우하고 있다.

그 인간에게 기대하는 가치가 있으니, 그 목적을 이루기 전까지는 그에게 어울려줘야 한다.

나는 손 안에서 굴리던 구슬을 주머니 안에 넣고, 그 노인네가 있는 대청으로 향했다.

* * *

그렇게 도착한 본관의 대청.

김원상은 외손녀와 함께 있었다.

이 나라의 2공주 혜선. 그녀는 양 손을 공손히 모은 채 외조부의 앞에 경직된 채 서있다.

전반적으로 순한 인상을 하고 있는 11세 소녀. 아이에게 어울리지 않는 밝고 화려한 옷을 입고는 있지만, 그녀의 표정은 옷과는 정 반대로 너무나도 어둡다.

게임 본편에서 그녀의 능력은 꽤나 뛰어난 편이지만... 매사에 자신이 없는 모습을 보이며, 불안을 많이 느끼는 성격으로 묘사된다.

한 나라의 차기 수장으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성격이며, DLC와는 전혀 상반된 모습이다.

김원상은 자신의 외손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교사로 와있는 식객들이 너에게 역대 명월주들의 업적을 가르쳤다고 전해들었다. 그 중에 너가 가장 존경하는 이는 누구더냐."

혜선은 왜 그런 소극적인 아이로 자라날 수 밖에 없었는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저택에 한 달간 머물면서, 그녀가 왜 그렇게 자라날 수밖에 없었는지 명확히 알게 되었다.

혜선은 자신없는 어조로 질문에 답한다.

"저로서는 40번째 명월주이신 선주(??)님이 가장 존경스러웠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했느냐."

"선주께서는 그 어두운 시기를 대비하실 정도로 능력있는 분이셨습니다. 동시에 백성들의 근처로 내려가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빛날 수 있도록 친히 가르치셨죠. 그렇기에 초대 명월주께서 제시하신 길 위에 본인만의 해석을 더하여 직접 실천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그리 생각하느냐?"

"네, 외조부님..."

내가 살던 세계의 역사에서도... 찬란한 왕조의 뿌리에는 내정에 힘을 쏟으며 국력을 키우던 전대의 왕들이 존재했다.

혜선이 말한 선주라는 명월주는 악인기가 시작되기 전 나라의 기틀을 닦은 자. 그녀가 없었다면 이 나라는 스스로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김원상은 조금은 성이 난 듯한 어조로, 혜선에게 따지는 듯이 말한다.

"고작 백성들을 가르쳤다는 것이 어찌 초대의 길을 새로이 해석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냐?"

"... 초대께서는 온 세상을 밝혀 백성들을 평안토록 하라 하셨으니, 그들 스스로 빛나게 한다면 세상 역시 밝아지지 않겠습니까."

"그건 멍청한 생각이다."

"……."

그의 말에 말문이 막혀버린 혜선.

김원상은 말을 이어나간다.

"그녀는 난세를 극복할 수 있을 정도로 밝아질 자신이 없었기에 도망을 쳤던 것일 뿐이다. 그 결과로 백성을 가르쳤다는 그럴듯한 업적만이 남았을 뿐, 그녀 스스로 무언가 해낸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느냐. 거기다 그뿐만이 아니다."

"백성들을 가르쳤다고는 하지만, 그런 것으로 도대체 무엇이 달라졌느냐. 백성들을 아무리 가르쳐보아야 밝아지지 않는다. 오직 절대적인 군주만이 세상을 밝힐 수 있는 것이야."

김원상의 '교육'은 정말이지 폭이 넓다.

이 저택에는 나를 제외해도 수많은 식객들이 신세를 지고 있는데, 그들은 각국의 학문과 무예를 혜선에게 가르치는 것을 대가로 금전을 제공받고 있다.

그 결과 그녀는 쉴 시간이 전혀 없다. 내가 밤 산책을 나갈 때마다 저 아이의 방에는 불이 켜져있었지. 언제까지 깨어 있는가 궁금해서 기다려보았더니, 새벽 3시경이 되어서야 잠에 드는 그녀였다.

아마도 친부인 명월주의 궁에서 심상 마법을 배우는 시간이 그녀에게 유일한 휴식일 것이다.

늙은이는 말을 마지막 말을 이었다.

"선주. 그녀는 초대 마왕에게 도움을 받고, 그에 물들었기에 그 빛이 퇴색되었을 뿐이다. 너는 그런 자보다는 다른 명월주들을 본받거라. 너는 그 누구보다도 밝은 이가 되어야만 한다. 나는 너가 해낼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이 노친네는 이렇게까지 아이를 몰아붙임으로서... 그녀가 더 나아진다고 믿고 있는걸까.

결과를 아는 나로서는 정말 멍청해보인다.

혜선은 김원상에게 인사를 올리며 말했다.

"외조부님의 말씀... 삼가 받들겠습니다."

"알았다면 물러나거라. 나는 손님과 나눌 대화가 있다."

"알겠습니다, 외조부님."

인사를 올린 그녀는 감히 기죽은 내색조차 하지 못했다. 대청을 나서는 도중에 나와 눈을 마주친 그녀는 약간의 움찔거림을 보인 후, 자신의 처소를 향해 쓸쓸히 걸어갔다.

김원상은 혜선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내게 말했다.

"자네에겐 미안하군. 손녀와 대화를 나누다가 늦어버렸으니."

"... 당신이 가진 교육관에 참견하기 싫지만, 나를 손녀에게 압박을 주기 위한 병풍으로 쓰는 건 관뒀으면 좋겠는데."

"허허! 자네같이 위협적인 기색을 숨기지 않는 자를 많이 경험해보아야 선이도 성장하겠지."

"……."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뻔히 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노인네는 자신의 외손녀를 몰아붙여 그녀 스스로의 자존감을 끊임없이 깎아내린다.

그런 와중에도 자신은 너에게 큰 기대를 품고 있다, 너는 분명 해낼 수 있다는 식으로 일말의 희망을 심어두는 것도 절대 잊지 않는다.

현대라면 학대라 불려도 모자람이 없는 행위.

그 결과... 저 아이는 외조부의 말을 맹목적으로 따르게 되고, 가끔 듣는 칭찬을 위해 자신을 더더욱 몰아붙이게 된다.

물론 나는 이 일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야 내 목적을 이뤄낼 수 없게 되니까.

나는 혜선 본인이 이 상황을 스스로 극복해내는 역사를 내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기 위해 행동하고 있다.

나는 김원상에게 물었다.

"그래서 늙은이. 나는 왜 부른건데?"

"역시나 자네는 참 당돌해서 좋군. 내가 일을 맡겼던 자가 드디어 돌아왔다."

"... 그래서?"

"하하하하하!"

김원상은 내 물음에 크게 웃었다.

이내 웃음을 멈춘 그가 손짓하자, 온 몸에 검은 천을 두른 자가 대청으로 올라와 김원상의 앞에 무릎꿇었다.

"나도 아직 성공이라는 말 이외에는 듣지 않았어. 정보를 제공한 건 어디까지나 자네이니, 함께 일의 전말을 듣는 게 좋지 않은가."

김원상은 밝은 표정으로 자신의 수하에게 다시금 보고를 해보라며 재촉했다.

"대감의 명에 따라 조운회주 김달선에게 금전과 사면을 약속하고 1공주 납치와 살해를 사주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놈은 생각이 있다며 모우회라는 단체의 장에게 일을 떠맡기더군요."

"장사치 놈이 또다시 잔꾀를 굴렸나 보구나."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일이 깔끔하게 해결되었습니다."

이후 흑의인은 나와 늙은이에게 일의 경과를 상세히 전했다.

일을 맡긴 모우회주가 윤흠서였다는 것.

비록 납치는 실패했지만, 슬럼가에 숨어사는 1공주의 집에 불을 질렀다는 것.

자신이 무덤을 파헤쳐 1공주와 유모의 시선을 자신의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고 왔다는 것.

여기까지는 내가 알고 있던 역사와 다른 게 없었다. 하지만 그 다음은 나도 예상하지 못했다.

"윤흠서 그 자가 왕도에 침입한 이후, 큰 실수를 저질렀나 봅니다. 두 단체를 감히 왕도에 침입하여 불을 지른 도적이라 판단한 에우데미아는 친위대를 파견해 그들을 전부 죽였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더냐?"

"예. 왕도 신문에서 그리 공표했더군요. 저 역시 혜세국으로 돌아오기 전, 조운회의 소굴을 다시금 들러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에우데미아 친위대가 출동했다.

원래의 역사에선 없던 일이다.

김원상이 물었다.

"윤흠서와 김달선은 어찌 되었느냐?"

"김달선의 사망은 확실합니다. 그의 목이 광장에 효수되어 걸린 것을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윤흠서의 행방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 놈은 별 것 없는 놈인데도 심지 하나는 곧은 자였지. 그 부분은 아쉽게 되었구나."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윤흠서는 작전을 수행하던 중에 팔을 잃은데다, 자신이 1공주를 시해했다는 사실 역시 모르고 있습니다. 거기다 수하들도 토벌로 인해 전부 잃었으니, 쉽게 재기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건 내가 역사를 바꿔버린 반동일까.

원래의 역사대로면 친위대가 출동할 일도, 모우회주 윤흠서가 팔을 잃지도 않았을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혜윤의 죽음은 2년 뒤 여름에 일어났을 일. 그보다 더 빠른 시기에 역사를 진행시켰기에 모우회의 준비가 부족했던 걸까...

모우회와 조운회의 토벌은 혜선의 각성에 첫 걸음이나 마찬가지다. 그들이 사라졌다면 약간의 보강이 필요하다.

"하하! 이것 참 훌륭하구나. 그 썩을 계집을 죽이고, 그 흔적마저 대부분 지운 셈이 아니더냐. 거기에 윤흠서 그놈이 힘을 모은다고 해도 그 명분을 틀어막을 고삐가 생긴 셈이니, 가히 완벽하다고 볼 수 있겠구나."

"그렇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대감."

"너도 수고했다. 타국에 가서 꽤나 고생했지 않느냐. 이번 일의 대금은 후하게 치뤄주마."

"감사합니다."

고민하는 내 앞에서 두 사람은 자축의 분위기를 잔뜩 내고 있다.

…….

지금 당장에 에우데미아로 향할 필요는 없다.

에우데미아에는 색욕에 미쳐있는 늙은 여우년이 밑작업을 하고 있지 않은가.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년이지만, 그 수완만큼은 확실하다.

거기에 혜선이 아레트 아카데미로 유학을 가는 날은 3년하고도 2개월이나 더 남았다. 그때가 되어서 약간의 밑작업만 해주면 될 것이다.

그때까지는 다른 나라를 돌면서 그 마녀가 시킨 일을 수행하면 된다.

나는 김원상에게 물었다.

"그럼 이걸로 전부 끝이지?"

"하하하! 자네에겐 큰 감사를 전해야겠군. 앓던 이를 시원하게 뽑은 기분이야."

"... 좋을대로 생각해. 그리고. 내가 여기에 있어줄 이유는 사라졌으니까, 이만 가볼게."

"뭣?"

내가 간다는 사실을 예견하지 못한 모양이다.

나는 그를 무시하고 내 갈길을 가기로 했다.

"기다리게나."

그렇게 대청을 나서 정문을 향하는 도중.

역겨운 늙은이가 나를 멈춰세웠다.

"그러고보니 통성명도 하지 못하였군. 자네의 이름은 무엇인가."

이름이라...

이곳에 오고나서 이름을 묻는 자는 처음이다.

"델피니아."

존경하던 양부가 준 이름이다.

뭐, 죽었지만.

내 대답을 듣고, 김원상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의아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물었다.

"동방의 이름이 아니로군. 자네는 왜 서이들의 이름을 쓰는건가?"

"... 옛날에 쓰던 이름은 버렸거든."

"허허, 나름의 사연이 있나보군. 하지만 나는 과거따위는 묻지 않는다. 보수는 충분히 하겠네. 자네는 실력이 있으니 내 밑에서..."

"더 할말은 없지? 그럼 간다."

더 들을 가치도 없는 소리였다.

내 반응에 그는 말문이 막혀버린 모양.

얼빠진 모습이 참 보기가 좋다.

나는 그 표정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사실 보수는 이미 충분히 받았다.

아니, 미래에 받게 될 것이다.

저 늙은이는 내가 그리는 미래를 모른다.

외손녀가 자신의 목을 조르게 되는 미래를.

그 순간이야말로 혜선이 해방되는 순간이다.

물론 그것이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진 않는다.

그 게임의 악역답게, 비참하게 죽을 것이다.

하지만 걱정할 것 없다.

이곳 에코니아는 근본적으로 썩어있는 세계.

최후의 순간에 멸망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그저 순서의 문제인 것이다.

나 역시 언젠가 죽게 되겠지.

그래도 납득할 수 있다.

... 오직 내 삶이 옳았음을 증명할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 나는 만족하며 죽을 수 있으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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