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화 〉 247. 해방력 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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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 해방력 197.
잠을 자는 도중 자세가 영 불편해서 일어나 보니, 나는 서재의 소파에 새우처럼 등을 구부린 채 누워있었다.
내가 왜 여기 있는걸까.
... 어제 책을 읽다 잠든 공주를 내 침대에 재우고, 나는 그대로 이곳에서 자게 되었었지.
공교롭게도 나는 자다가 깨버리면 다시 잠들지 못하는 체질이다.
결국 몸을 일으킨 나는 가볍게 기지개를 켠 뒤, 서재 문을 조용히 열어 밖을 보았다.
내 방인데도 불구하고 함부로 열면 안 될 것만 같은 이 아이러니함...
아셰리아 공주는 아직 내 침대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나는 아이가 깨지 않도록 살금살금 움직여 창문으로 향했고, 바깥의 빛을 차단해주고 있는 커튼을 살짝 걷어내었다.
어젯 밤에 펑펑 내리던 눈은 어느새 그쳐 있었고 바깥은 온통 새하얗게 물들어있는 상황.
해가 떠오른 지 별로 되지 않은 모양인지, 희미한 여명만이 눈에 덮힌 왕도를 비추고 있다.
잠시라도 자겠다고 몸을 구겨가며 잠을 청하긴 했지만, 겨우 두세시간만이 지났나 보다.
…….
잠시동안 밖을 보며 멍해져버린 나였다.
그래도 계속 이렇게 있으면 안된다.
바깥에서 들어온 빛에 아셰리아 공주가 깨버릴 수도 있지 않은가. 아직 성장기의 아이는 자야하는 시간이다.
나는 내 방문을 열고 밖을 향했다.
* * *
이후 따뜻한 차를 우려 병에 담은 나는 정원 밖으로 나와 흙 마법으로 만든 의자에 앉았다.
이 자리에는 많은 추억이 있다.
게임 속 이방인으로서 이곳에 온 적도 있었고,
축제의 마지막에 공주님과 밤하늘을 봤으며,
유나의 결심을 물은 장소도 바로 이곳이다.
이곳에서는 같지만 다른 수많은 풍경을 봐왔다.
왼편으로는 아카데미, 오른편으로는 왕성. 그 사이로 보이는 중앙 광장과 모든 건물에 눈이 덮여 있다.
게임에서도 사계는 구현되어 있었기에 나에게 익숙한 구도이지만, 내 눈으로 직접 보는 이 풍경은 그래픽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
이곳에 온 뒤로...
머릿속을 계속 떠다니는 의문이 있다.
에코니아 아포칼립스.
그 게임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혹시나 나는 그 게임 속으로 들어온 것일까.
아니면 그 게임이 이 세상을 본따 만든 걸까.
내가 무슨 통속의 뇌라던가, 지금 내가 보는 현실이 뇌가 만드는 홀로그램일 뿐이라던가. 그런 논리적인 개소리를 지껄이려는 것은 아니다.
당장에 손을 뻗어 온 천지에 깔린 눈을 만져보면, 피부를 통해 차가운 감촉을 느낄 수 있다.
나는 이런 감각마저 신체의 오류라며 현실을 부정한다거나, 삶은 한낱 허상일 뿐이라며 모든 것을 내려놓는 무책임한 사람이 아니다.
물론 그들의 주장이 세상의 진리에 닿아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경우는 그들의 가설이 운좋게 들어맞았을 경우가 아닌가.
그 가설을 증명해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멀쩡히 살아가고 있던 사람들에게 확실하지 않은 궤변을 들이민 사기꾼이 될 뿐이다.
아쉽게도 나는 그런 확실하지 않은 이론으로 나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삶을 배팅에 걸 생각은 없다.
나에게 에코니아는 엄연히 현실이다. 이곳이 허상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지금은 알면서도 고민하게 된다.
지금와서 이런 고민을 하는 이유...
이제와서 그 게임이 무서워졌기 때문이다.
만약 그 게임이 에코니아를 본따 만든 게임이고 나는 그 원본이 되는 세상에 온 것일 뿐이라면, 어느 정도 희망이 생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지금 시점은 해방력 196...
아니, 오늘로 해가 바뀌었으니 197년이다.
엄연히 게임 시작 3년 전의 시점.
그렇기에 수많은 루트가 발생할 전제를 깔아뭉개버리면 미래는 바뀔 수 있다. 게임의 스토리가 성립할 개연성 그 자체를 없애버리면 아셰리아 공주를 비롯한 모두가 행복해질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만약...
내가 게임속으로 들어온 것이라면?
이 세상이 그 병신같은 게임 속이라면?
마지막에 플레이했었던 그 루트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아무런 복선도 없었던 새로운 악역이 튀어나와서는 아셰리아 여왕을 죽이지 않았던가.
개연성을 무시하는 강제력이 느껴지는 결말.
그런 일이 나에게 일어난다면 어떤 식일까.
지금부터 게임의 시점까지 3년 동안. 온갖 노력을 기울여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고 치자.
그런데 갑자기 새로운 인물이 나타나서 일구어 놓은 모든 것을 손짓 한번으로 망쳐버린다면...?
이 세상에는 심상 마법이 있다.
물론 모든 심상 마법이 대단한 것은 아니다.
끽해봐야 불을 지핀다거나, 염력을 사용한다던가, 물을 흐르게 하는 등의 별 것 아닌 마법도 많다.
하지만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역사서를 읽을 때마다 내 머릿속은 아파진다.
누군가는 어린 시절로 회귀했다고 한다.
누군가는 타인의 마음을 읽었다고 한다.
누군가는 세상의 기억을 고쳐썼다거나...
누군가는 자신을 세상에서 지우려했다고 한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상식을 깨부수는 마법인 건 확실하다.
만약 말도 안되는 마법이 넘처나는 이곳이 게임 속일 뿐이고, 내가 어떤 선택을 하던 간에 결말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라면...?
상상조차 하기 싫은 일이다.
물론 이것 역시 내가 가정한대로 생각한 가설일 뿐이다. 생각이 안좋은 쪽으로 흘렀을 뿐일 수도 있다.
... 하지만 게임의 마지막 루트를 플레이했던 그 경험이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을 하도록 한다.
"에휴..."
벌써 시간이 이렇게나 흐른걸까.
눈에 뒤덮힌 풍경을 바라보며 마시려 했던 차는 이미 식어있었다.
이왕 우려낸 찻잎이 아까워서 한 모금 마셔보니... 시원하게 정신을 깨워주는 것 같아서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차를 한잔 마시고 있는 순간.
끼이익
저택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다보니 그곳에는 유나가 있었다.
유나는 남아있는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의부님."
"일찍 일어났네."
"어제 하루를 즐겁게 보내어서 편히 잘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구나."
짧게 주고받은 아침인사.
하지만 그 뒤로 아무 말도 이어지지 않았다.
어색하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하는 걸까.
내가 누군가의 의부가 되다니. 그것도 그냥 의부도 아니고 동쪽 공주님을 숨겨주고 있는 처지이다.
... 근황 이야기라도 할까.
"아이들과는 어떤 이야기를 했었니?"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만..."
생각에 잠긴 유나.
그녀는 이내 생각을 정리하고 말했다.
"제가 본격적으로 귀족으로 살게 되었다고 하니, 올해 있을 행사들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 그랬구나."
파티 대화 주제가 올해 있을 행사라니.
역시나 아이들이라 해도 귀족은 귀족이다.
유나는 이어서 말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행사로는 해방제와 건국제가 있지만, 저는 해방제 파티에는 참가할 수 없겠죠. 아마 혜세국 출신의 아카데미 유학생들이 파티에 잔뜩 있을거니까요."
"당분간은. 그래도 이 나라에 자리잡은 이후에는 참가할 수 있으니까... 크게 상심할 필요는 없어."
"……."
내 말에 유나는 잠시동안 나를 처다보더니, 이내 먼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잠시 후 그녀가 말했다.
"약간 아쉽긴 해도 저는 괜찮아요. 저로서는 이 생활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하니까요."
"……."
"이렇게 생활하다 보면 들킬 수도 있겠죠. 하지만 도망만 다니던 그 시절보다는 훨씬 행복해요."
"그럼 다행이고."
"... 그러고보니 잊은 게 있어요."
유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의부님, 감사합니다."
나는 그저 멍하니 그 모습을 볼 수 밖에 없었다.
"어제 잠들기 전에 곰곰히 생각해보았는데... 아직 감사하다는 말을 한 적이 없더라구요."
"의부님이 아니었다면 저는 그날 죽었을 거에요. 그게 아니어도 지금쯤 왕도를 떠나 길을 떠돌고 있었겠죠."
그렇지.
원래의 역사대로라면 그녀는 지금보다는 조금 먼 미래에 죽을 운명이었다.
모우회가 예정보다 일찍 습격을 감행한 이유는 알아낼 수 없었지만... 그래도 이 아이가 산 것은 우연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알렉산더가 타라스 마을로 향해 사고를 친 것까지는 원래의 운명이라 생각해도 되겠지.
하지만 그 후로는 전부 우연이다.
슬럼가 분수 거리에서 수업을 하는데... 하필 내가 빵을 산 곳이 유나의 은신처였던 것.
알렉산더 녀석이 그 보상을 하겠다며 금화를 들고 유나를 찾아간 것.
유나가 알렉산더에게 여러 상식을 가르치며 두 사람이 친해진 것.
이외에도 이루 셀 수 없는 수많은 우연이 겹쳐 이 아이는 살 수 있었다.
... 이 아이가 운명을 피한 것이면 좋겠다.
물론 앞으로 고난이야 있겠지. 그래도 3년간 잘 대비해두면 괜찮을 수준일거라 생각하고 있다.
에우데미아와 혜세국의 국력 차이는 분명 존재하기에 김원상은 함부로 행동할 수 없을 것이고, 2공주를 끌어들이기만 하면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도 있다.
... 그 쓰레기 게임처럼 부조리한 고난만 닥쳐오지 않으면 될 일이다.
…….
오늘따라 머릿속에 걱정만 늘어나는 느낌이다.
나는 착잡한 심정을 숨기며 대답했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잘 해보자."
"... 그래야겠지요."
유나는 자리에 다시 앉으며 말을 이었다.
"해방제에 참여는 못하지만... 올해는 아셰리아 공주님의 12살 생일이 있다고 하더군요. 해방제 두 달 전입니다."
해방제는 7월.
아셰리아 공주의 생일은 5월이다.
고위 귀족의 12세 생일에는 17살 아래의 귀족 자제이 한데 모이는 사교 모임이 열리는데, 아셰리아는 왕족이다 보니 그 규모가 꽤나 클 것이다.
왕족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는 아이들도 있을 것이고, 정치적인 이유로 어떻게든 잘 되어 보려는 맹랑한 놈들도 있을 것이다.
개차반 귀족놈이 우리 애를 꼬드기려 하면 필레몬 국왕과 함께 그 놈 가문을 찾아가 폭파를...
아니, 부정적인 생각은 그만두자.
아직 모르는 미래이지 않은가.
나는 유나에게 말했다.
"또래 귀족들과 친해지면 여러모로 생활이 편해질테니까... 사교 모임에는 신경쓰는 편이 좋아."
"네. 그러지 않아도 알렉산더와 기디언이 친하게 지내는 이들을 소개해준다고 했어요."
게임에서는 사교와 담을 쌓은 왕자.
그런 왕자 뒤에 숨기만 하던 기디언.
음...
그래도 아이들 나름대로 생각이 있는 게 아닐까.
내가 아는 역사보다 훨씬 밝아진 알렉산더다. 거기에 기디언은 공부도 열심히 하고 왕자를 어떻게 보필해야하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에게 일단 맡겨두고 문제가 생겼을 때 내가 개입하면 되겠지.
"그래, 건국제 파티엔 나도 함께 등성해서 파티에 참가할 거니까. 그 전까지는 아이들과 열심히 해보렴."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유나와의 대화가 끝나자...
"벌써 해가 떠버렸네."
희미했던 빛은 어느새 밝아져있었다.
아카데미 뒤편의 산맥 위로 해가 떠올랐다.
…….
만약 이곳이 그 게임속이라면.
나는 분명 꺾여버릴 것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가 뒤늦게 후회하기는 더 싫다.
"... 노력해봐야지."
그렇게...
나는 해방력 197년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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