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화 〉 254. 이곳에 수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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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4. 이곳에 수왕은 없다.
아카데미 거리 북쪽의 언덕 위.
시하의 저택.
그 앞에 말끔하게 차려입은 일곱 수인들이 있었으니.
견인족 루이가 말했다.
"클로에. 이거 괜찮은 거 맞아?"
"안정적인 직장... 1년에 대금화 두 장!"
"……."
루이의 말은 클로에에게 닿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꼬리를 바짝 세우고 그 끝만 살랑살랑 흔들어대고 있다.
연봉으로 대금화 두 장.
시하에게 있어 대한민국 최저 시급의 반도 안되는 금액이지만, 에우데미아에서는 경력직 기사들이 받는 급여와 비슷하다.
식량 배급받으며 개인 비용은 적게 지급받는 수인국에서는 꿈도 못꿀 거액.
거기다 이들은 고급 여관을 빌려 자신들을 씻기고 좋은 옷까지 입혀주지 않았나.
지금까지 겪어온 고생들과는 대비되는 호사에 자신의 눈이 가려진 클로에였다.
하지만 너구리 특유의 둥글둥글한 귀를 가진 소녀 라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다른 건 오기 전에도 말했으니 넘어가. 그래도 우린 지금 높으신 분과 만나는 거잖아."
"그럼 좋은 거 아냐?"
"수인국 바깥 세상에서는 귀족들에게 지킬 예절이 따로 있다고 배웠었잖아. 우리는 그런 걸 배운 적도 없고..."
"아..."
너구리는 들 구멍과 날 구멍을 파야 한다.
언제나 뒷일을 생각하며 행동하라는 환족의 격언이다.
갑자기 자신들에게 고액의 금액이 보장된 일을 맡기겠다는 것도, 갑자기 일곱 사람을 전부 불러냈다는 것도 수상하다.
만에 하나 이 일이 진짜라고 해도... 귀족들 앞에서 실수라도 했다간 목이 달아나지 않을까 걱정까지 된다.
그런 그녀에게 헤르만과 아모스가 말했다.
"시하 형님은 예법같은 건 크게 신경쓰지 않으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마."
"나도 한때는 무례를 많이 저질렀던 것 같소. 하지만 괜찮다고 하셨었지."
그 말에...
클로에는 '그렇다는데?' 라며 어깨를 으쓱거렸고,
루이와 라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다른 수인 아이들이 말했다.
"뭐... 지금보다 더 나빠질 거라도 있겠어."
"맞아. 적어도 그 변경백 아들인가 하는 사람보다는 낫겠지."
"일단 그 사람보다 저택이 아담하시네."
자신의 탐욕으로 타인의 몫을 줄이지 말라. 곧 수인들은 절제와 공의를 중시한다.
그런 인식이 가득 담겨있는 평가였다.
다른 아이들마저 이런 반응을 보이자, 루이와 라나는 그저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하아... 그래. 일단 들어가보자."
"어떻게든 되겠지..."
그들의 말에 헤르만은 방긋 웃으며 저택의 문을 열었다.
"자. 그럼 다들 들어가자. 시하 형, 애들 다 데려왔어."
* * *
"""안녕하세요."""
헤르만의 부름에 거실로 내려오자 수인 아이들이 내게 인사를 건네 왔다.
유나는 자신의 방에 있는지 보이지 않고, 사아씨는 어느새 수인 아이들의 실내화를 내어준 뒤 사용인실 앞에서 손을 모으고 서있는 상황.
나는 거실 소파의 상석에 앉으며 말했다.
"그래. 다들 여기 와서 자리에 앉으렴."
쭈뼛쭈볏 다가와서 소파에 앉는 수인들.
아모스와 아일라는 나를 보좌하듯 내 소파 양 옆에 섰다.
나는 문 근처에 남아있는 헤르만에게 말했다.
"헤르만. 오전에 부탁했던... 지파이 좀 사다줄래?"
"아. 맞다... 잊고 있었네. 얼른 다녀올게."
"그래. 수고 좀 해줘."
지파이. 대만의 닭튀김이다.
물론 이 세상에 지파이는 없다.
하지만 녀석은 평소보다 빠르게 저택을 나섰다.
다시 수인들을 돌아보며 얼굴들을 살피니...
내가 알고 있는 익숙한 얼굴이 둘.
견인족 수인이 넷. 묘인족 수인이 둘. 왜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환인족 수인까지 하나.
십대 중후반 정도의 나이로 보인다.
얼마나 고생을 했던걸까. 수인들은 털을 보면 건강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데, 씻었는데도 불구하고 윤기가 전혀 없이 메말라있었다.
"아일라에게 들었어. 지금까지 고생이 많았다."
"……."
"사아씨. 최대한 빨리 만들 수 있는 음식으로 열 사람분 정도. 준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수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는 음식이 최고.
사아씨는 사뿐한 걸음으로 주방으로 가 요리를 시작했다.
내 호의적인 태도에 다소 용기가 생긴건지, 서로 다른 눈색이 돋보이는 고양이 소녀 클로에가 물었다.
"그게... 면접을 보신다고 하셨는데. 뭘 하면 될까요?"
면접.
사실 당장에라도 첫 의뢰가 무엇이었는지 묻고 싶다.
"먼저. 너희가 수인국에서 어떤 일을 주로 맡았는지 알려 주겠니?"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나는 이미 게임을 통해 알고 있는 내용들을 그들의 입으로 직접 듣기로 했다.
견인족 소년들은 대규모 농장이나 군대, 건설 현장 등에서 잡무를 했다고 하며.
묘인족 소년 하나는 야간 경계나 수렵을 해보았다고 했다.
역시나 가장 흔한 견인족과 묘인족스러운 답변.
그나마 특별한 건 클로에와 환인족 소녀겠지.
"저는 종족간 갈등조정 위원회라는 곳에서 직원으로 일했어요. 그런데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네요..."
"제 이름은 라나라고 합니다. 종족이 너구리라서... 마도구 제작에 종사했어요. 보석에 정밀 마법진을 새기는 분야였어요."
한 명은 말단이긴 해도 수왕부 직속 기관의 직원.한 명은 에퀼리아 상인들이 탐내는 환인족.
수인국에서는 직종에 따라 누릴 수 있는 복지 혜택이 꽤나 차이가 있는데, 서민치고는 둘 다 높은 직종이다.
클로에야 그녀에게 헛바람을 집어넣은 인물이 따로 있는 걸로 아는데... 이 너구리 소녀는 왜 그 벽을 나왔을까.
몇 년 뒤에는 에퀼리아의 상인에게 자신을 판 돈을 클로에에게 건넬 운명이었다는 것을 알고나 있을까.
... 참 사람 일은 모르는 법이다.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그래. 그 정도라면 내가 시키는 일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네. 일단 면접은 합격이다."
"정말인가요?"
"당연하지. 그럼 계약서부터 쓰자."
"계약서..."
계약서라는 말에 낯빛이 창백해지는 클로에.
작중에서 그녀는 임하는 일에 꼼꼼한 성격이었긴 하지만... 사람의 악의에는 약했다.
계약서에는 독소조항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가.
첫 의뢰에도 그걸 확인하지 않았었겠지.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내가 너에게 지켜야 할 사항들. 그리고 너희가 어떤 일을 해야하는지가 모두 적혀 있어. 꼼꼼히 읽어보고 사인해. 대충 읽지 마라."
"... 네."
클로에에게 계약서를 넘기자...
루이와 너구리 소녀가 그 옆에 모여들었다.
"클로에. 같이 보자."
"셋이서 보면 저번 같은 일은 없겠지!"
고용주를 앞에 두고 할 말인가 싶지만...
이번만 참아주기로 했다.
사회 초년생이 실수할 수도 있지 뭐.
"기본 연봉은 대금화 두 장."
"일곱 명이 살 기숙사 제공... 방은 세 개? 하나는 나랑 클로에가 같이 쓰면 되겠네!"
"규정상 주 5회 출근. 추가 근무시 별도의 수당 지급? 바깥 세상은 이런 식이구나!"
"업무는 피고용인의 능력에 맞추어 부여한다..."
처음에는 문제점을 찾으려 했지만, 넘쳐나는 혜택에 정신을 못 차리는 그들이었다.
하긴. 아무리 천만 원 남짓한 돈이라도 이곳에서는 하급 귀족 부부의 1년치 생활비.
거기다 의식주 보장이니 얼마나 돈을 모으기 좋은 환경인가. 에코니아에서는 꿈의 직장일 것이다.
"서명할까?"
"문제 없을 것 같은데."
"... 얘들아 잠깐."
돈에 혹한 클로에와 약간 맹한듯한 표정을 짓는 너구리 소녀.
하지만 루이가 제지했다.
"여기 하나가 신경쓰이는데?"
"고용 후. 업무 외적인 부분에서 한 가지 질문과 한 가지 요청에는 성심성의껏 응해야 한다."
"……."
역시.
루이는 평소 낙천적이어도 클로에의 중심을 잘 잡아주는 녀석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대놓고 적은 독소 조항은 잘 찾았네. 하지만 아직 너희가 못 본 게 있어."
"네?"
"추가로 내가 일을 얼마나 시킬 건지. 정확히 어떤 일을 하게 될 지. 전혀 적어두지 않았잖아. 이외에도 여러가지 있어."
이후 나는 여러가지 허점을 짚어주었다.
성실하게 일에 임한다는 애매한 단어.
실수에 대한 손해배상을 해야한다는 조항.
을의 사유로 인한 계약 파기시의 위약금.
인수 인계 기간의 보수 미지급.
현대에는 흔한 독소 조항들이다.
내가 하나씩 말을 더할 때마다 수인 아이들은 단체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특히나 클로에는 귀의 털이 곤두선채로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다른 종이를 내밀며 말했다.
"자. 내가 말했던 부분을 전부 수정한 계약서야."
"이걸 왜..."
"너희들처럼 수인국을 갓 나온 아이들은 사기에 걸려들기 쉽거든. 수인국에서도 에퀼리아는 가지 말라고 들었지?"
"아... 네. 그랬던 것 같아요."
"에퀼리아의 수전노들은 이런 계약을 자주 한단다. 그래서 어른들이 가지 말라고 하는거고. 물론 나는 그런 사람은 아니지."
나를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던 클로에는 내가 다시금 준 계약서를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방금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루이와 라나 뿐만 아니라 다른 녀석들도 달라붙었다.
그만큼 경각심을 느꼈다는 거겠지.
내 밑에서 일할 거면 이 정도 일은 스스로 생각해야만 한다.
첫 계약서를 읽을 때보다는 조금 더 긴 시간이 흐르고...
고개를 든 클로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질문과 요청은... 그대로 있네요. 혹시나 미리 들을 수 있을까요?"
"안 돼. 그럴거면 왜 계약서에 넣었겠니."
"저희에게 해가 되는 건가요?"
"그건 모르겠네... 하지만 나에게는 정말 중요한 부분이란다."
그녀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다.
그 옆에서 다른 묘인족 소년과 한 견인족 소년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클로에. 돈 많은 인간들은 다 똑같아."
"그래. 그냥 나가자. 뭘 시킬지 모르잖아."
"……."
"클로에...?"
하지만 클로에는 그들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처음 주었던 가짜 계약서로 향하는 그녀의 시선. 그 시선은 이내 자신이 손에 들고 있는 것으로 옮겨 갔다.
그리고 내게 말했다.
"계약하겠습니다."
"클로에!"
"우리는 아무 실적도 없고 찾아주는 사람도 없어. 이 정도는 각오해야한다고 생각해."
단호하게 말하는 클로에.
그녀는 말을 이어나갔다.
"거기다... 정말로 그 귀족과 같은 부류의 사람이라면 이렇게 계약서를 둘씩이나 준비하지 않았을 거야. 이 분은 달라."
잠시동안의 침묵.
루이와 라나도 클로에를 거들었다.
"나도 찬성."
"나도."
분위기가 이런 식이 되자, 일어났던 수인 소년들도 제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말은 없었다.
나는 지금의 분위기에 묻어가려는 네 소년에게 말했다.
"이곳은 수인국이 아니란다. 모든 결정을 스스로 판단하고 해야만 해."
또박또박. 천천히.
"세 사람은 결정을 내렸는데..."
나는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나머지 네 사람은 어떻게 할 거야?"
"……."
"또 클로에에게 책임을 넘기고... 안되면 저 아이 탓을 하면서 수인국으로 돌아가기라도 할거니?"
본디 그들이 겪어야만 했던 역사.
"이곳에 수왕은 없다. 저 아이를 따라 수인국을 나온 시점부터 너희들 역시 책임이 있는거야."
"그게 싫으면 돈을 줄테니 수인국으로 돌아가. 나는 시킨 일만 하는 노예는 필요 없어."
클로에는 평생을 자학하며 살게 된다.
그리고 이방인을 만나 조금은 치유되지만... 그건 선택을 받은 경우의 이야기다.
다른 루트에서는 귀족에게 팔려간 뒤 자살.
수인 루트에서도 클로에는 엔딩 직전까지 정신적으로 몰려 있는 상태였다.
악몽은 기본. 자해나 착란은 덤.
속은 사람이 고통받아야하는 그런 운명.
멋대로 맡긴 책임을 도맡아야하는 현실.
... 나는 그런 서사가 싫었다.
불편할 정도로 현실다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모두가 숨죽인 시간이 흐르고...
나머지 네 소년이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찬성..."
"나도."
"찬성합니다."
"계약할게요."
그렇게.
나는 일곱 수인을 고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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