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왕실의 가정교사-91화 (91/215)

〈 91화 〉 2­55. 안심하라구!

* * *

2­55. 안심하라구!

수인 소년 소녀들은 각자의 앞에 놓인 계약서에 서명을 했고, 시하 역시 그곳에 이름을 남겼다.

그리고 주방에서 음식을 가득 실은 카트 하나가 등장했다.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오... 샌드위치네요."

"중요한 말씀 중이오니 드시기 편한 것으로 준비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아씨."

메뉴는 커틀릿이나 다진 고기가 사이에 들어간 샌드위치.

거실 한 가운데에는 무릎 정도 높이의 티테이블 뿐. 확실히 식사를 하기엔 부적합하다.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한 음식을 해오신 사아였다.

수인들은 하나하나 높여가는 접시들에 시선이 고정된 상황. 견인족 소년 하나는 침까지 줄줄 새고 있다.

방금 전까지 믿니 못믿니 했던 애들이 맞나? 그런 생각을 하며 시하가 말했다.

"너희들 먹으라고 준비한거야. 빨리 먹어."

"""잘 먹겠습니다!"""

이후 수인들은 냠냠 쩝쩝 온갖 소리를 내어가며 음식을 먹어가기 시작했다.

시하 저택의 사람들은 그 모습을 그저 바라만 볼 뿐이었다.

그렇게 몇분의 시간이 지났을까.

"의부님."

2층 계단에서 유나가 내려왔다.

"시키신 일은 전부 끝내두었습니다."

"그렇구나. 수고했어 유나야."

이어서 그녀는 피곤한 듯 눈을 비비며 말했다.

"오랜만에 썼더니 조금은 피곤해서... 저는 방으로 돌아가 쉬겠습니다."

"그래. 어서 들어가서 쉬렴."

명월시를 사용한 자의 두 눈에는 각기 다른 형상이 맺혀 보이게 된다. 그러다보니 장시간 사용한 후에는 심한 어지럼증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유나는 다시금 2층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고, 시하는 음식을 준 지 10분도 채 되지 않아 식사를 마친 수인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손수 엮은 종이뭉치... 연습장이나 스케치북을 연상시키는 그것을 손에 들고 말했다.

"자. 배는 채운 거 같고... 한 가지 질문과 한 가지 요청을 한다고 했지?"

히끅.

클로에는 급하게 먹은 게 체했는지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시하는 그런 클로에는 무시한 채 너구리 소녀를 보며 말을 걸기 시작했다.

"거기 너구리 수인... 이름이 라나라고 했나?"

"... 네."

긴장한 채 대답하는 라나.

그런 그녀에게... 시하는 스케치북의 첫 장을 보였다.

[첫번째 일이다.]

"...!"

그 내용은 다른 수인들에게까지 보였다.

[지금 우리 대화를 엿듣고 있는 사람이 있다.]

[진정하고. 흥분하지마. 적힌 대로만 행동해.]

스케치북에 적힌 내용을 보기 전까지는 시하에 대한 경각심이 강했다면... 지금의 거실에는 다른 긴장감이 맴돌고 있다.

"내가 너구리를 엄청 좋아해서 말이야..."

"그... 그러신가요?"

그 뒤로 스케치북이 한 장. 한 장

서서히 넘어가며 다음 내용들이 나왔다.

그 내용을 보고 꿀꺽. 라나는 입안의 침을 삼켰다.

이후 시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라나의 뒤편에 섰다. 그리고 라나의 왼손을 잡으며 말했다.

"지금부터 내가 시키는대로 하는 거야."

"왜... 왜이러시는 거에요."

"내가 좋아서 이러는 거라니까? 거절할 수 없는 한 가지 요청. 계약서에 있었잖아."

"으..."

"이제야 좀 얌전하게 됐네. 자. 손은 이렇게..."

시하는 그녀에게... 한 가지 포즈를 취하게 했다.

얼굴은 정면을 바라보게 하며 15도 정도 오른쪽으로.

왼손은 턱 높이까지 올린 채 손바닥 면을 전부 펴도록.

그 모습을 보면서...

다른 수인들은 낮은 신음을 흘렸으며.

보다못한 클로에가 그 사이로 끼어들었다.

"차... 차라리 저에게 하세요!"

"음... 이건 너구리 말고는 안 되는건데."

"제가 이 아이들의 장이니까요. 저한테 책임이 있는 거에요!"

"... 너는 잠자코 기다리기나 해."

싸늘하게 답하는 시하.

클로에는 순간 그의 반응에 얼어붙었다.

"계약서는 인당 하나씩 적었잖아. 그 말은 요청도 한 사람에 하나씩이란 거지."

"아..."

"네 차례는 나중에 돌아올테니까... 그때까지 몸 관리나 잘 해."

시하는 클로에에게 향했던 시선을 거두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스케치북 다시 한 장 넘기며 말했다.

"이제 보기 좋은 모습이 됐네. 좋아."

"흐윽..."

흐느끼기 시작한 라나.

몇몇 남자 아이들은 이를 갈기 시작했고, 루이는 '으윽...' 손을 불끈 쥐는 시늉을 했다.

"자... 이제 이걸 읽어보라고."

"시... 싫어요."

"읽지 않으면 너는 계약 파기야. 네 탓으로 깨진 계약이니 손해도 착실히 메꿔야겠지."

에퀼리아에 넘기면 되려나.

다른 귀족에게 넘겨도 될 거고.

아니면 내 집에서 더 일해도 되겠네.

그런 말들을 내뱉는 시하.

결국 라나는 울먹이며 말할 수밖에 없었다.

"너... 너굴..."

"더 크게!"

"너굴걸이 처리했으니 안심하라구우우우!"

그 때.

쾅!

시하 저택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 * *

내 강요에 라나가 너굴걸이 되어버린 그 순간 두 사람의 목덜미를 잡고 있는 헤르만이 나타났다.

회색의 작은 귀를 가지고 있는 수인들이었다.

이내 헤르만은 쓰레기를 버리듯 그 둘을 내팽개쳤다.

수인 꼬맹이들은 그 모습을 보고 또다시 긴장한 상태.

"형님. 근처에 쥐새끼들이 돌아다녀서 잡아 왔어."

"뭐?"

"아마도 우리 저택을 감시하고 있었던 것 같아."

역시. 쥐새끼들이 있었군.

서인족.

이들은 주로 요인 감시나 정보전에 자주 고용되는 용병들로, 은신과 도청에 특히나 능한 수인종이다.

게임에서도 그 썩어빠진 용병 길드는 이런 쥐 수인들을 항상 고객들에게 붙여 그 뒷조사를 해왔었다.

하지만 모든 것에는 그 위가 있는 법. 이 정도로는 왕도 최고 수준의 그림자인 헤르만을 당해낼 수 없다.

"그 녀석들은..."

그나저나 저것들이 바닥에서 기절한 척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오히려 잘 된 일이다.

라나의 모습을 차분히 보면 변태 귀족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기엔 부족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나는 최대한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아일라. 저 너구리를 네 방으로 데려가."

"네."

정말이지... 다른 녀석들의 연기는 못봐줄 정도였지만 라나가 열연을 해주어서 다행이었다.

그렇게 아일라와 라나가 방에 들어가고. 나는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것들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왠 쥐새끼들인지는 모르겠지만... 죽여버리는 게 제일 편하겠지?"

움찔.

나는 헤르만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녀석이 말했다.

"죽여서 저택 뒤에 묻을까?"

"그럴 필요가 있나. 태워버리면 그만인 일을."

"하긴 그렇지. 형님이 직접 태워버리는 게 마음 편하겠지."

나와 편하게 대화하는 헤르만.

역시 내 일등조수... 척하면 척이다.

그렇게 몇 마디를 하자 두 쥐새끼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빌기 시작했다.

"사... 살려주십시오!"

"우연히 이곳을 지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 두 사람에게 헤르만이 말했다.

"감히 공작저 부지에 숨어들어서 대화를 엿듣다니.. 사법부에 넘겨도 처형될 일이야."

"저희는 모르고 한 일입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한 번만 기회를 주시면..."

결국 사람을 기만하는 일에 협조하던 놈들일 뿐.

마음 한편으로는 당장 죽여버리고 싶다.

하지만 지금은 살려보내야 한다.

"그렇다면. 너희는 단순 민간인일 뿐이고... 우연히 이 언덕 끝에 도달했다는거네?"

"예... 그저 경치가 좋다는 소문에 그만."

"그래도 보는 눈은 있네. 살려줄까?"

"가... 감사합니다!"

"다만."

나는 손가락 끝에 푸른 불꽃을 피운 채... 손을 그들의 방향으로 향하며 말했다.

"거리에 내 소문이 퍼지면... 그 때는 너희를 죽인다."

"혹시나 왕도를 떠나겠다는 어설픈 생각은 마. 여길 나서려고 하는 순간 너흰 죽는다."

휙.

그들의 머리 위로 손을 천천히 휘젓자...

""히익!""

열기가 공기를 통해 전해지는 듯, 그들은 움찔거리며 숨을 삼켰다.

"알겠습니다..."

"그럼 가봐."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제 기절했냐는 듯 쏜살같이 사라지는 쥐새끼들.

저 족속들은 언제나 저런 식이다.

아무리 용병으로서 돈을 쫓는 게 당연하다 해도 길드 산하의 서인족은 특히나 악질이다.

감시 대상의 앞에서 때로는 친근하게, 때로는 비굴하게 굴며 정보를 캐낸 뒤... 그들의 약점을 서슴없이 길드에 팔아넘기기 때문이다.

지금도 내가 자신들을 살려줬다는 사실은 모르고 멍청한 표류자 귀족놈을 속였다는 것에 뿌듯함을 느끼며 길드에 모든 것을 고하겠지.

하지만 그 편이 오히려 내게 편해지는 길이다.

지금껏 온갖 약혼을 거절해오던 왕실 가정교사. 그가 알고보니 수인 취향이었으며 요주의 대상이었던 클로에 일행을 거두어 들였다.

사실 라나를 보자마자 너굴맨이 떠올라서 한 번 시켜본 일이지만... 대화만 들으면 내가 라나를 계약으로 속인 뒤 몹쓸 짓을 했다고 생각하게끔 말했다.

인간은 다른 이의 추한 모습을 보면 우월감을 느끼며 안심해버리는 존재. 내 기억 속의 용병 길드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를 향하는 경각심은 그리 크지 않겠지.

나는 헤르만에게 물었다.

"그 사람은 보내뒀지?"

"당연하지."

그 사람이란 윤흠서를 말하는 것이다.

쥐새끼들이 용병 길드로 향하거나 길드의 일원들과 접선을 하는지 확실히 파악해두라고 미리 일러두었다.

지금쯤이면 전 모우회의 몇몇은 용병으로 위장하여 길드에 있을테고, 몇몇은 거리에서 길드 간부들을 미행하고 있을 것이다.

"형님. 나 하나만 물아봐도 돼?"

"뭔데?"

"그게... 지파이가 도대체 뭐야?"

"다음에 만들어줄게. 튀김 요리야."

요리라는 말에 똥씹은 얼굴이 된 헤르만.

"... 쥐로 만든 파이같은 건 아니지?"

"푸흡. 그건 먹어보면 알지 않을까?"

"에이씨..."

정답을 일부러 알려주지 않은 나는 소파로 돌아왔다.

라나 역시 거실로 나와 자신의 자리에 착석.

일곱 수인들은 하나같이 겁에 질린 표정이다.

내 연기나 쥐새끼들을 대하던 그 모습이 진짜면 어쩌지, 그런 생각이 눈으로 훤히 보이는 수준이다.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자. 계약서에 적혀있던 한 가지 요청은 이걸로 끝이야."

"네?"

의외라는 듯 답하는 클로에.

또 자기 탓으로 이상한 사람에게 코가 꿰였다는 생각을 하고있었는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그녀였다.

"그 계약은 너희 전체를 향한 거였어. 주어가 클로에 외 6명이었잖아. 방금은 그 쥐새끼들이 들으라고 한 말에 불과해."

"그... 그렇군요."

"그리고 저것들이 날 쫓아온 것 같아?"

평정심을 조금이라도 찾은 클로에는 내 말의 뜻을 이해하려고 생각했다.

그 답은 너무나 쉬운 것이었다.

"설마..."

"수인들이라고 해서 전부 수인 편을 드는 건 아냐. 너희들은 용병 길드를 드나들면서 충분히 느꼈을거야."

"……."

"용병 길드에서 너희를 미행하라고 했겠지. 오늘 아카데미 거리에는 수인들에게 일을 주지말라는 지시가 내려왔더구나."

미샤 베이커리의 주인장에게서 확인한 정보다.

용병 길드는 이 아이들을 자신들의 주 활동 영역인 남문 근처에 묶어두려고 벌인 일이었을테고...

아카데미 상인회는 용병들이 상권에서 활개를 치면 피해를 입을 뿐이니, 그들에게 협조하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금부터가 본론인데...

"헤르만. 미행은 둘 뿐이었어?"

내게 헤르만에게 물으니, 녀석은 끼고있던 반지 하나를 내게 돌려주며 답했다.

"공녀님의 말대로라면 확실해. 나도 저 녀석들을 잡기 전에 주변을 더 돌아보았는데, 수상한 녀석은 없었어."

"그래. 수고했어."

"그 마도구. 엄청 편리하더라. 통신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데 그런 작은 사이즈라니..."

"일대일 통신밖에 안되는데다 둘 다 마력을 사용할 줄 알아야 하잖아. 거기다 거리도 그리 멀지도 않고."

"그래도 그 휴대성 하나로도 충분하지. 오늘 같은 일이 있으면 특히나 좋고.

이 반지는 해방자 저택에 남겨져있던 마도구들 중 하나다. 해방자가 친절히 사용법과 유의점을 라벨로 정리까지 해두었기에 사용은 간편했다.

덕분에 유나와 헤르만이 연계를 펼칠 수 있었고 그 시너지는 상상 그 이상. 쥐 두 마리를 단숨에 잡아내고 이 근처의 색적까지 완료해버렸다.

나는 다시 수인 녀석들에게 시선을 향했다.

"이제 한 가지 질문을 할 차례야."

"... 네."

"오늘 너희가 미행을 당한 이유."

"……."

"아마 너희들의 첫 번째 의뢰 때문이겠지."

순식간에 어둠이 드리운 클로에의 얼굴.

말하기 힘들 것이다.

"나는 그 내용과 과정이 궁금해."

그래도 난 그걸 꼭 들어야겠다.

항상 루이와 넌 그 의뢰의 내용을 숨겼었지.

하지만 상처가 적은 지금이라면...

들을 수 있을 것이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