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화 〉 256. 수인의 귓속말은 잘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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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수인의 귓속말은 잘 들린다.
계약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말한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약간의 신뢰는 얻은 것일까.
클로에는 조금씩.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의뢰인은 북부 변경백인 테크니 가문의 차남. 마크 테크니. 그 사람은 테크니 영지에 붙어있는 시온 자작령의 영주이기도 해요."
"저희는 시온 자작령까지 화물을 운송하는 의뢰를 맡았었죠. 의뢰 조건은 화물을 열어보지 말 것. 지금왓 생각하면 그게 제일 수상했어요."
이 나라에는 국경을 지키는 세 가문이 있다.
소피아. 에피스템. 테크니.
이들 중 테크니는 에퀼리아 합중국과 맞닿아 있는 북부 국경선을 관리하는 가문.
그들은 대대로 자신들의 기술을 갈고 닦아 에우데미아 왕실에 큰 보탬이 되어 왔다.
게임에서는 찬 밥 취급을 받는 가문이었는데... 지금은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데 운송 도중에 재앙의 괴수가 나타났어요. 그건 엄청나게 큰 멧돼지의 형상을 하고 있었어요."
"멧돼지라..."
재앙의 이름은 대부분 어떤 동물이 부정의 심상 마력에 영향을 받았는가에 따라 정해진다.
큰 멧돼지라면 그 이름은 보어.
일전의 하운드와 비슷한 등급이다.
다만 하운드는 인간 자체를 포식하는 부류라면 보어는 떼로 다니며 근처의 식량을 전부 흡수해버린다. 그 존재 자체가 기근이 형상화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보어 정도가 이 아이들에게 해가 되었을 리는 없을 것 같은데...
그것들은 에우데미아에서도 종종 나타나긴 하지만, 수인국에서 특히나 더 많이 출몰하기 때문이다.
완전한 무투파 수인종이 아니더라도 이 아이들 정도라면 충분히 토벌할 수 있었을 것이다.
"보어 정도라면 너희도 쉽게..."
"그런 정도가 아니었어요."
"뭐?"
"그건... 엄청나게 컸다고요!"
참다못해 소리를 지르는 클로에.
다른 아이들의 분위기도 심상치 않았다.
몇몇은 시선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몇몇은 고개를 떨구었으며, 몇몇은 역으로 천장을 멍하니 보고 있다.
당시를 떠올리는 동시에, 그 모습을 다시는 떠올리기 싫다는 듯한 표정,
클로에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엄니는 금빛으로 빛나지만 온 몸은 칙칙한 금속으로 뒤덮여 있었고... 저희들이 무기를 뽑아들던 손톱으로 할퀴던 아무런 소용이 없었어요."
"저희는 완전히 무시당했고, 그건 그대로 짐마차를 덮쳤어요. 마차는 전부 파괴되었고 그 안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찾아 물더니 어디론가 사라졌죠."
"저희가 아는 건 이게 다에요..."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게임에서 이 아이들이 말하는 판타스매터를 잡아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말한 거... 전부 확실해?"
"저희 모두 함께 봤어요."
"목적지까지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재앙이 저희에게 들이닥쳐서는..."
루이와 라나 역시 클로에의 말을 거들었다.
나는 그들에게 다시한번 확인할 수 밖에 없었다.
"금빛 엄니. 온 몸은 검은색의 강철. 타오르는 네 발... 맞아?"
"그걸 어떻게..."
"맞아요. 발도 그 괴물의 이빨과 비슷한 색으로 불타고 있었어요."
그 재앙의 괴수를 이 아이들이 보았다니...
애초에 그건 하급의 재앙이 아니다.
완전한 성체가 된다면 B급에 육박하는 존재.
도시 하나를 쑥대밭으로 만들 부정의 덩어리다.
그 정도면 재앙 경보가 있었어야 정상인 것이다.
"그걸 마주쳤는데도 살아남았다니..."
"그게... 저희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화물에만 집중하고 있었어요."
"너희보다 더 좋은 먹잇감이 그 화물 중에 있었다는 거니까... 하늘이 도운거나 마찬가지야."
"……."
이 아이들이 살아남았다는 건 기적에 가깝다.
그 재앙이 거침없이 부정의 심상 마력을 뿜어냈다면... 이 아이들은 끔찍한 몰골로 미쳐버리거나 그 자리에서 서로를 죽였을 것이다.
그건 그런 판타스매터니까.
"너희가 그 의뢰를 받은 날이 언제야?"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아요. 아마도 반년 전쯤..."
"반년이면 작년 10월 근처인가."
그 시기는 공교롭게도 내가 에코니아에 표류하게 된 날짜와 비슷했다.
나는 헤르만에게 말했다.
"헤르만. 내가 표류한 그 시기에 B급 재앙 경보는 있었어?"
"아버지가 재앙 경보의 급수나 재앙의 종은 말씀해주시는데... 멧돼지 계열 B급은 없었어."
"혹시 모르니까... 지금 바로 등성해서 재앙 경보 기록을 훑어봐줄래?"
"... 알았어."
헤르만은 그 자리에서 연기처럼 사라졌다.
"저기... 이어서 제가 말해도 될까요?"
루이였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의뢰는... 그렇게 실패했어요. 그래도 보고는 해야하니 저희는 목적지인 시온 자작령을 갔어요. 하지만 그 마크라는 사람은... 이상했어요."
"이상하다니?"
"그게... 수인들은 후각이 좋잖아요."
"그렇지."
"기쁨이나 슬픔. 화나 욕정. 그런 감정을 가질 때는 모든 종족이 특유의 냄새를 내요. 물론 그것마저 속이는 사람도 있고, 몇몇 종족의 냄새는 저희도 모르는 게 많아요."
"……."
인간이 감정을 아무리 숨기려해도... 얼굴의 표정이나 근육의 떨림, 식은 땀 등 여러 생리적 현상을 완벽히 없앨 수는 없다.
나 역시 어머니로부터 다른 사람들의 얼굴이나 행동을 보며, 그들의 감정을 간접적으로나마 파악할 수 있도록 배웠었다.
수인들 역시 이와 비슷한 게 가능하다. 코가 좋은 수인들은 상대방에게서 풍기는 냄새를 맡아가며 심리를 조금씩 유추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에코니아에서 다른 종족들이 경험많은 수인 용병들과 교섭을 해야하는 경우, 독한 향수로 자신의 냄새를 가리는 건 상식이다.
"그런데 마크라는 그 사람... 겉으로는 화를 내고 있었지만, 전혀 인족이 화를 낼 때의 냄새가 아니었어요."
"그럼..."
"분명 기쁨... 아니, 조금 더 역한 성적인 흥분에 가까웠어요."
루이가 말하는 정보를 무작정 신뢰할 순 없다.
이건 신뢰의 문제가 아니다.
생리적인 냄새는 종족마다 모두 다른 법. 인간, 수인, 엘프, 마족... 거기서 더 깊게 파고들다 보면 그 분류는 끝이 보이지 않게 된다.
그렇다보니 수인들이 냄새로 타인의 심리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경험이 필수. 이는 게임 속 루이 역시 언급했던 내용이다.
하지만 지금의 루이는 이제야 수인국을 나선 소년... 그가 바깥 세상에서 지낸 기간은 아직 그리 길지 않다. 결국 냄새는 절대적인 지표로 쓸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발주한 의뢰가 실패했는데도 기뻐한다라... 그것도 성적인 흥분은 착각하기 힘든 냄새라고 게임 속 루이가 말했던 것 같다.
거기다 B급 재앙이 나타나 자신의 화물을 전부 탈취한 상황. 그런 중대한 일이 벌어졌음에도 중앙에 알리지 않았다는 점이 너무나 수상하다.
... 조금 더 증거를 모아야 한다.
"말하기 힘든 일이었을텐데... 말해주어서 고맙구나. 이제 걱정할 필요는 없다."
"내 밑으로 들어온 이상. 용병 길드나 그 마크라는 자식은 너흴 쉽게 건들지 못 해."
나는 아이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말했다.
하지만 클로에와 루이, 라나 세 명은 영 불안하다는 듯한 표정.
"왜 그런 반응이야?"
"아니 그게. 계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말했지만요..."
"라나. 내가 말해볼게."
클로에는 라나의 말을 끊고 말했다.
"저희는 결국 변경백의 의뢰를 실패한 건데, 이렇게 쉽게 거두어주시는지 모르겠어요."
"음?"
"에우데미아의 변경백이라고 하면... 그 권위는 사대 귀족 바로 다음이잖아요?"
아...
그게 걱정되었던건가.
얘들은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계약한 걸까.
"... 아일라. 설명은 아직 안 해줬어?"
"죄송합니다. 명령하지 않으셨기에 굳이 밝히지 않았습니다."
"음. 잘 했어. 다음에도 이렇게 해 줘."
"알겠습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는 아일라.
내 이름을 들먹이면서 이 아이들을 데려왔다면 훨씬 편했을 텐데, 굳이 밝히지 않은 것이다.
일처리가 오히려 확실해서 좋다.
나는 수인들을 보며 말했다.
"괜찮아. 명예직이긴 하지만 나도 공작이니까."
"네?"
"내가 이 나라에 정착한 지는 별로 되지 않았어도... 후작인 변경백 가문이 날 쉽게 건들지는 못해."
조운회 토벌 이후 내 주가는 꽤나 상승했다.
예전에는 전투력이 전무해 적당한 자리가 없어 가정교사 직을 맡은 허울뿐인 표류자였다면...
지금은 무력으로도 무시할 수 없다는 평을 듣고 있다.
거기다 지난 축제에서 국왕이 날 공식적으로 인정까지 해주었으니, 그 관계가 깨지지 않는 한 나를 섣불리 건드릴 귀족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뒤가 없는 용병 길드만 조심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라나가 얼굴이 창백해진 채로 중얼거렸다.
"설마. 표류자 왕실 가정교사..."
"라나. 그게 누구야?"
"클로에. 저 분 엄청난 분이야."
귓속말을 하려는 듯 손짓하는 라나.
예절 교육은 미리 시켜둬야겠다.
상대방의 바로 앞에서 귓속말은 좀 아니지.
"왕도 신문에서 봤는데..."
"음..."
…….
나름 귓속말을 한다고 손을 대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수인들의 귀는 머리 위에 뾰족하게 튀어나와 있다.
그러다보니 말소리가 전부 새어나와서 다 들린다.
... 세간에 나는 어떤 평가일까?
귀족들 사이의 평은 꽤나 좋아졌지만, 거리에서는 어떤 평가인지 듣기 어려웠다.
이번 기회에 들어나 봐야겠다.
"도적 소굴에 있던 오백 명을 폭발 마법 한 번으로 터뜨려 몰살시켰다고..."
"오, 오백!"
"거기다 에퀼리아 마탑주들이나 쓸 수 있는 메테오를 땅에다 굴려서 성벽에 박아버리는 무서운 왕실 폭발 가정교사라고 들었어!"
"히익...!"
왕도 신문...
저런 날조 기사를 검열하지 않다니.
언젠가는 내가 꼭 편집자를 폭파시켜 버릴거야.
클로에는 경악한 눈빛으로 나를 흘겨보고 있으며...
그에 반해. 정말로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수인 남자 꼬맹이들은 나를 선망의 눈빛으로 보고 있다.
이 분위기. 부담스럽다.
어서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려야겠다.
"자. 너희 숙소는 오늘 내로 안내해줄게. 그리고 당장에 돈이 없을 거니까... 여기. 당장에 쓸 생활비 정도는 내가 제공해줄게."
"가... 감사합니다!"
이 금빛 고양이의 서로 다른 두 눈에 세로줄이 쳐진 G가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게임에선 이런 수전노 고양이가 아니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 모습보다는 밝아보여서 보긴 좋다.
"그리고 계약서에 적힌대로 너희는 내가 붙여주는 사람 밑에서 전투술을 배워. 진짜 일은 그 이후에 하게 될 거야."
"알겠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공작님!"
용병 길드.
테크니 가문.
정확히 뭘 꾸미고 있는 지는 모른다.
조사를 확실히 마치고 행동해야겠지.
하지만 내 목표에 방해가 된다면...
어떤 수를 써서라도 치워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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