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화 〉 257. 거절할 수 없는 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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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7. 거절할 수 없는 요청.
수인 녀석들을 거두었던 그 날 다급히 등성하여 재앙 경보 자료를 열람했던 헤르만이었지만 역시나 반전은 없었다.
그가 전하길. 내가 에코니아에 표류하기 전까지 B급 재앙이 나타나는 일이 극히 적었으며, 북유럽의 신화에나 나올 법한 그 멧돼지는 확인조차 되지 않았다고.
결국 정보 수집 기간은 점점 길어지게 되었고...
그렇게 시간은 또다시 흘러 4월.
나와 헤르만은 왕실의 호출을 받아 등성 중이다.
"헤르만. 정보 수집은 잘 되고 있어?"
"변경백이 다스리는 도시에 내 직속 부하들을 먼저 파견했는데 전혀 의심가는 부분이 없었어. 테크니 가주는 현명하기로 유명하니 평판도 좋은 편이고."
혹시나 싶어서 변경백을 먼저 조사해두라고 했었지만... 큰 성과는 없었다.
그래도 이건 오히려 다행인걸까.
원작에서도 가세가 기울긴 했지만 영지민들에게는 친절하던 평가가 주였던 테크니 가주다.
벌써부터 확신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적어도 가주가 이 일을 꾸민 정황은 없다는 것 아닌가.
이렇게 되면 의심되는 부분은 하나 뿐이다.
"계속해서 조사를 부탁해. 변경백은 결백할 가능성이 높으니까 시온 자작령을 위주로."
"알았어. 수상한 부분이 보이면 바로 말할게. 그런데 용병 길드 쪽은 괜찮아?"
"후우. 이상한 소문이 도는 것 빼곤 다 괜찮지."
"하하... 덕분에 맞선은 많이 줄었잖아?"
용병 길드가 원인일까.
아니면 그 쥐새끼들이 입을 놀린걸까.
요즘따라 내가 수인 취향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
덕분에 내게 딸을 들이밀던 귀족은 꽤나 줄었으나...
내 스트레스는 그대로였다.
"그럼 뭐 해. 병신같은 놈들이 이젠 아예 자기 딸을 양녀로 들이라는데."
"엥?"
"유나보다 나이도 많은 성인들을 양자로 들이란다. 미친 것들 아냐? 내가 수인 취향이라는 소문이 퍼지니까 오히려 양녀로 들어가면 안전하다고 생각하나 봐."
"참 고생이 많네..."
난처하다는 듯 미소지으며 말하는 헤르만.
요즘은 바빠서 내 저택에 자주 못 오는 녀석이다.
당연히 내 상황을 모르고 있었겠지.
"제 딴에는 대단한 발상이라며 그런 제안을 하는 거겠지. 그런데 뻔히 부모가 있는 애를 내가 왜 양자로 들여? 아이 의사는 물어 본 건가? 애가 수단이야?"
"……."
"제발 좀 귀족이면 귀족답게 살면 안 되나. 그런 쪽으로 신경 쓸 시간에 제 일이나 열심히들 했으면 좋겠다."
"형님. 우리 지금 왕궁이니까 진정..."
"제발. 들으라고 하는 소리야.
실제로 내 말에 지나가던 몇몇은 고개를 황급히 돌리고 자기 갈 길을 가는 척 하는 중이다.
이 정도도 많이 참은 거다.
주말마다 새로운 귀족이 내 집 거실을 차지한 채로 식구들을 더러운 눈으로 스윽 하고 훑는데, 기분이 나쁘지 않으면 그게 사람일까.
그 쓰레기들 눈에는 유나는 동방의 고아, 가정부는 고아의 어미, 내 호위인 아모스와 아일라는 벼락 출세한 서민으로만 보이겠지.
하지만 내 집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런 시선을 받을 사람들이 아니다. 하나하나가 나보다도 훨씬 더 뛰어난 가치를 지닌 사람들이다.
거기다 귀족이라면 최소한의 생각은 해야하지 않겠는가. 내 주변 사람들을 깔보는 것이 곧 나를 무시하는 행위임을 모르는 멍청이들과는 연을 맺고 싶지 않다.
정상적인 귀족이라면 언제나 환영이다만... 날파리만 더 많이 꼬여서 골이 아픈 요즘이다.
* * *
아침부터 온갖 짜증을 내며 도착한 후궁의 응접실.
그곳에는 이미 선객이 있었다.
아셰리아 공주가 국왕 내외와 함께 있었던 것이다.
"음... 저는 잠시 후에 오도록 할까요?"
"리아와는 이야기가 대충 끝나가고 있으니 들어오게."
"알겠습니다."
조심스럽게 입실.
국왕 내외의 맞은 편, 공주님이 앉아 있는 3인용 소파에 앉게 되었다.
이후 국왕이 말했다.
"리아가 다음주면 벌써 12살이라니. 실감이 나지 않는구만."
"그러게. 시간이 참 빨리 간단 말이야."
아셰리아 공주의 생일 이야기를 하고 있었나 보다.
다음 주가 공주님의 생일 파티라고 했었지.
지금껏 알렉산더파 귀족 자제들과의 모임에만 참여해왔던 유나가 처음 참여할 공식적인 행사이기도 하다.
나는 공주에게 말했다.
"공주님 생신이 4월 23일이었나요."
"그렇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올해부터는 이리저리 바빠지시겠네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나를 향해 고개만 약간 숙여 인사하는 공주.
12살이라...
이 나라에서는 꽤나 상징인 나이다.
한 나라의 일원으로서 인정받는 나이.
공식적인 사교 모임에 처음 참가하는 나이.
그게 바로 12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걱정도 약간 생긴다.
"파티 준비는 잘 하고 계신가요?"
"네."
"이상한 것들이 꼬이게 되면 아샤도 있고... 알렉산더나 유나에게 꼭 말씀하세요.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사람이 많으니까요."
"... 알겠습니다."
"뭣하면 저한테 말씀하셔도 됩니다. 그 때는 제가 바로..."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답하는 공주.
옆에서 지켜보던 국왕 내외가 말했다.
"선생님께서도 필레몬과 비슷한 말을 하시네요."
"네?"
"이 사람은 이상한 놈이 꼬이면 당장 영지를 날려버리겠다고..."
"하하!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우리 딸을 이상한 놈에게 보낼 수야 없지!"
하하. 왕비님.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공주님께는 그에 걸맞는 짝이 있어야죠.
집안, 능력, 성격. 셋 중 하나라도 미달이라면 당장에 저도 국왕님을 도와서 그 자식 면상을 터뜨려버릴거에요.
그래도 이런 말을 하기엔 경사스러운 일을 앞둔 시점이 아닌가. 나는 다른 농담으로 적당히 넘어가려고 했다.
"요즘 저도 많이 고생하고 있으니까요. 맞선 요구를 대부분 방치했더니... 이제는 자기 아이들을 양자로 들여 달라고들 하더군요."
"저마저도 이런 상황인데. 아셰리아님께서는 일국의 공주이신데다가 외모까지 참하시니, 저보다도 훨씬 고생하시지 않으실까요."
반쯤 하소연에 가까운 농담.
저번 건국제 파티에서 국왕이 내 후견인을 자처한 셈이다보니, 나와 다리를 놓아달라는 요청은 왕가에도 많이 가고 있다.
그래도 국왕 내외가 내 의사를 알고 있다보니... 국왕이 남성 귀족들을, 왕비가 영애들을 설득하여 맞선 요청을 반려해주고 있다.
그렇기에 평소라면 웃으며 넘어갈 일인데...
두 사람은 내게서 다급히 시선을 돌렸다.
뭐지.
불안한데...
"그나저나... 두 분께서는 어쩐 일로 저를 호출하셨습니까?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나요?"
"에헴...!"
"흐음..."
용건이 무엇이냐는 내 물음에... 난처하다는 듯 목을 가다듬는 필레몬 국왕과 루시아 왕비.
서로에게 발언을 넘기는 느낌이다.
그런 와중...
"그게... 말일세."
국왕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자네. 보은의 훈장이라는 걸 알고 있나."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만... 왕가에서 국가에 큰 공을 세운 공신에게 수여하는 상이지 않습니까?"
"그래. 그 귀한 걸 반납하면서 왕가에 소원을 말하면, 우리는 그걸 최대한 들어줄 수 밖에 없다네."
대하 드라마나 무협지에나 나올법한 설정.
실제로 혜세국을 도왔던 선대 왕이 명월주로부터 우호의 증표 삼아 받았던 가문패에서 시작된 관습이다.
이후 왕실에서는 단 세 개의 훈장을 만들었고, 당시 새로이 에우데미아에 합류한 세 변경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물론 소원이라 해도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달라던가, 작위를 올려달라던가 하는 정치적인 소원은 빌 수 없다.
에우데미아의 왕이 아닌 가문의 수장으로서 내어준 감사패이기에, 개인적인 소원만을 부탁할 수 있는 것이다.
"훈장들 중 두 개는 행방불명으로 압니다만..."
"음..."
"누군가 그걸 찾아서 말도 안되는 소원이라도 빈 건가요?"
워낙에 오래된 훈장이다보니...
누군가는 실제로 국왕에게 소원을 빌었으며,
누군가는 보은을 위해 다른 이에게 넘기기도 했으며,
누군가는 하사받은 훈장을 타인에게 빼앗기기도 했다.
그 결과로 두 개의 훈장은 행방불명.
게임에서 하나는 경매장에서, 또다른 하나는 어떤 소녀가 추위에 떨던 거지를 돕고 받게 된다.
그 둘 중 하나를 누군가가 벌써 찾아낸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국왕이 말했다.
"아닐세. 나머지 두 개를 누군가가 찾아낸 건 아니야"
"그렇다면..."
"동부 변경백인 소피아의 가주가 그 훈장으로 소원을 하나 빌었다네."
원래 역사에서는 없던 일이다. 게임 속 역사에서 소피아 가문은 그 훈장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쓰는 일은 전혀 없었으니까
그나저나 하필이면 소피아 가문이라니...
그 가문은 꽤나 위험한 가문이다.
현 가주의 여식이 추후 가주가 되는데... 그녀가 추후 귀족들을 규합해 아셰리아 여왕에게 반란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런 가문이 도대체 무슨 소원을 빈 걸까.
"자네에게는 미안한 일이네만."
왜 갑자기 나한테 미안해 하는거지?
나는 절로 고개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아셰리아 공주 역시 궁금한 모양.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그녀의 부모를 바라보는 중이다.
"소피아 후작 영애와 자네의 맞선을 주선해달라고 하더군."
"예?"
"일전에 자네가 맞선 요청을 거절하지 않았던가. 이번에는 훈장을 쓰면서까지 부탁하더군. 이번만큼은 거절할 수 없었다네."
소피아 후작 영애.
게임에서도 그녀는 출세욕이 굉장히 강한 사람이었다. 이방인에게 접촉했던 이유도 중앙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서였지.
그런데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하는걸까.
지금의 나는 해봐야 명예 공작일 뿐이고, 가정교사 직책은 아이들이 자라나게 되면 자연스럽게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물론 그 전까지 나만의 지위를 확보할 예정이지만... 지금 당장에 내 입지는 후작 영애가 이 정도로 집착할 수준은 아니다.
설마 무도회에서 댄스 권유를 거절해서 뒤끝이라도...
…….
어질어질하다.
"이번 일만큼은 두 분께서 중재해주실 수 없다는 거죠?"
"그렇습니다, 선생님. 그래도 소피아 가문 정도면 꽤나 상식있는 가문이고... 선생님께서 한 번 만나보시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군요."
"아..."
나름대로 여성 귀족의 중심 역할을 하는 왕비마저 저렇게 말하는 상황이라니...
물론 상식있는 가문이긴 하지.
다른 병신같은 귀족들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불편하다는 건 별개의 문제이지 않은가.
옆에서 공주가 말했다.
"소피아 가문에서 당장 약혼을 하자는 것도 아니오니... 일단 만나보시는 건 어떠십니까?"
"그런가요..."
혹시나 내 편을 들어주진 않을까 싶었지만...
이 응접실에 내 편은 없었다.
슬프다.
뒤이어 공주가 말했다.
"선생님의 마음에 드는 분이라면 약혼을 하시면 되고, 그게 아니라면 맞선에서 끝내시는 거죠."
"리아의 말이 맞네. 자네가 어떤 연유에서 여성을 그리 꺼리는지는 모르네만... 귀족 사회를 살아가려면 어느 정도 사교는 필수라네."
"……."
그래.
맞선이라는 단어를 쓰고는 있지만... 결국 현대 감각으로 소개팅이라는 느낌으로 가면 되지 않을까.
거기다 보은의 훈장은 어떤 변수가 될 지 모른다.
훈장을 회수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느낌으로 가자.
그리고...
설마 애딸린 남자와 진짜 맺어지려하겠어.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맞선 일정은 어떻게 되나요?"
"후작 영애가 후작령에서 소식을 듣고 출발한다면... 일주일 정도 걸리겠군요."
유나의 파티 참석을 돕기도 해야하는데...
허허.
정말 미치겠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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