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왕실의 가정교사-94화 (94/215)

〈 94화 〉 2­58. 이게 바로 행복이지 않을까.

* * *

2­58. 이게 바로 행복이지 않을까.

4월 22일.

새벽 다섯 시.

아셰리아의 하루는 아침 일찍부터 시작된다.

점자리에서 일어나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침상을 정리하는 것.

이어서 방 안에 딸린 세면실로 가 자신의 몸을 씻고 정돈한다.

원래라면 시종들에게 맡기거나 도움을 받으면 될 일이지만, 어린 시절부터 타인에게 의존하기 싫었던 그녀는 이 모든 일을 스스로 하는 편이다.

그렇게 어느 정도 준비를 마치고 나면 일곱 시.

아샤가 찾아오는 시간이다.

"긴 밤 평안하셨습니까. 공주님."

"좋은 아침이에요, 아샤."

처음에는 아셰리아에게 조금 더 수면을 취하고 자신의 시중을 받으며 준비하라 당부하던 아샤였지만... 어느샌가 포기해버린 그녀였다.

대신에 아샤는 한 가지만큼은 무조건 돕겠다며 타협을 했으니, 일과를 보낼 옷을 고르고 입는 것만큼은 두 사람이 함께 한다.

"오늘 일정은 아침 수업 이후 다른 분들과 함께 식당에 가기로 했었죠."

"네."

"음..."

공주의 옷장을 이리저리 뒤적거리는 아샤.

오늘은 아셰리아 공주의 생일을 하루 일찍 축하한다는 의미로 모두가 함께 외출을 하기로 했다.

다음 날 12살의 생일 파티를 하게 될 예정이지만... 그 자리는 엄연히 축하가 아닌 사교를 위한 장소.

왕실의 수업에 참여하는 사람들간에 개인적인 대화를 나누기엔 상당히 부적합한 환경이다.

거기다 성인인 이시하는 참여할 수 없는 자리.

그렇기에 기디언의 제안으로 선생님을 포함한 모두가 모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럼 이 원피스로 할까요?"

아셰리아의 눈동자를 연상시키는 연보라색 원피스.

외출을 할 때마다 자주 입는 옷 중 하나다.

"네. 그걸로 좋아요."

"외출하기 전에 머리 묶을 것도 챙기고..."

어머니의 피를 진하게 물려받은 아셰리아의 은발은 거리에 나서면 특히나 돋보이게 된다.

비공식적인 외출을 하게 될 때는 그 머리칼을 가리기 위해 긴 챙모자와 더불어 머리를 묶는 끈은 필수.

이외에도 비상시를 대비한 약간의 금전과 더불어 몇몇 마도구를 챙기면 외출준비는 끝나게 된다.

이후 아샤의 옷 시중을 받으며 파자마에서 외출용 연보라색 원피스로 갈아입으면... 어느새 여덟 시.

방을 나서 가족이 기다리는 식당으로 향해야 할 때다.

아샤는 방문을 먼저 나서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며...

아셰리아는 자신의 방문 옆에 잠시동안 멈추어 섰다.

그녀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벽면.

자신을 낳아주었다는 친모. 에스더 에우데미아.

에우데미아의 성을 받기 전까지는 에스더 헬레니아.

그녀는 아셰리아의 방문 옆에서 해맑게 웃고 있다.

어머니라고는 하지만... 직접 눈으로 본 적은 없다.

아셰리아가 아직 갓난 아기였을 때, 에스더는 S등급으로 분류된 재앙에 맞서 딸을 지키다 죽었다.

숭고한 희생. 하지만 아이를 지키려 한 어머니의 희생은 주변 사람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그 사건이 어린 아셰리아에게 남은 수많은 감정 가운데 가장 큰 존재감을 보였던 것은 분명... 죄책감.

차마 가족 앞에게 고개를 들 수 없었고, 에스더를 기억하는 자들 앞에서 자신의 말을 할 수 없었으며, 그 누구에게도 온전한 자신의 속마음을 감히 꺼내 보일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자신을 버리고 혼자 살아남았으면 되지 않았나, 이런 삶을 살게 할거라면 왜 자신을 낳았는가, 이런 세상을 보여주려고 자신을 낳았는가, 그렇게 에스더를 비난하고 싶을 때도 있었다.

허나. 그런 발상을 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죄악.

그녀의 죄의식을 한 층 더 깊게 만들 뿐이었다.

하지만 선생님이 오시고 난 이후로 반 년.

고작 6개월이란 시간은 아셰리아의 많은 것을 바꾸었다.

만약 그때처럼. 만약 그때 그대로였다면... 지금처럼 어머니의 초상을 마주할 수 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지금은 말할 수 있다.

아셰리아는 어머니의 초상에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어머님."

모든 이들과 만나게 해주셔서.

이 세상을 보게 해주셔서.

그 날 저를 지켜주셔서.

... 태어나게 해주셔서.

"다녀오겠습니다."

여러 뜻을 품은 인사를 하고.

아셰리아는 방을 나섰다.

* * *

왕궁 정문을 나와 곧장 서쪽으로 가면 귀족 거주구가 있으며, 그 구석에는 한적한 어느 식당이 있다.

카페테리아 고 블링.

셀프라는 요상한 서비스 방식.

겉보기에는 너무나 높게 책정된 단가.

그런 식당을 홀로 꾸려나가는 정체불명의 난쟁이.

그 세 가지 요소가 모여 어떤 손님도 찾지 않는 곳이지만... 시하와 그 일행들은 자주 들르는 곳이다.

식당에 도착한 아셰리아는 주방으로 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주방장님. 오랜만이에요."

"안녕하십니까, 공주님. 가정교사님께 말씀을 듣긴 했습니다만... 생각보다 손님이 많이 오셨군요?"

"그게... 오는 도중에 일이 있어서요."

고블린 주방장의 한 마디에 씁쓸한 미소로 답하는 아셰리아. 늙은 주방장은 그런 아셰리아의 어깨 너머로 다른 일행들이 앉아있는 테이블을 보고 있다.

분명 시하는 식당 예약을 하면서 아이들 다섯 명 정도만 데리고 온다 했었는데... 예상 외로 성인 서너명 정도가 더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헤르만 티오리아.

한나 프로네시스.

요나스트롱 미모스.

이미 성년이 지난 사대 가문의 자제들이었다.

"선생님. 최근 저한테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왜... 왜 그래. 한나."

"진짜 몰라서 그러시는거에요?"

시하를 몰아붙이고 있는 한나.

그녀는 최근 들어 불만이 매우 커진 상태다.

"저는 마법 가르쳐주는 도구일 뿐이죠?"

"그건 아니지."

"그럼 왜 매번 파티같은 걸 할 때마다 저는 쏙 빼놓고 진행하는 거에요?"

"그야. 애들 있는 곳에 너가 와 봐야..."

"저도 사대 가문 자제들 중 하나라구요? 수업은 안 들어도 가끔 파티 정도는 불러줄 수 있잖아요..."

왕실 가정교사의 수업을 받는 건 아직 17세의 성년을 맞이하지 못한 아이들이라고는 해도, 한나 역시 사대 가문의 여식이지 않은가.

친목을 다진다는 의미에서 파티 정도는 충분히 참여할 수 있고, 공주와 친해지고 싶다는 의사도 시하에게 밝혔었던 그녀였다.

거기다 시하의 예법 수업을 진행하면서도 마법을 가르쳐줬었고... 지금은 아일라의 자연 마법 수련도 돕고 있는데 불러주지 않았다니.

한나로서는 서운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거기다...

사실 그녀에에 기름을 부은 녀석은 따로 있었으니.

"매번 파티를 할 때마다... 헤르만 오라버니가 저희 저택을 찾아와서 뭐라 지껄이는 지 알아요?"

"……."

"오늘은 뭘 해줬는데 맛있었다. 저것도 맛있었다. 새로운 식당을 찾았는데 엄청 맛있더라! 매번 그렇게 저를 약 올리는데...!"

"무언가 먹는 이야기 뿐이네..."

"그게 제일 중요한 거죠. 거기다 공주님께 드릴 선물도 준비해뒀는데, 이런 자리에서 주는 게 훨씬 낫잖아요!"

헤르만은 고개를 휙 돌려 못 본 척을 하는 중이었다.

시하는 그런 헤르만에게 말했다.

"헤르만. 할 말 있냐?"

"없습니다..."

"매번 파티가 끝나기만 하면 어디론가 사라지더니..."

"그게... 반응이 재밌잖아?"

"저 망할 오라버니가...!"

헤르만의 한 마디에 다시금 화가 끓어오르는 한나.

그런 그녀의 왼편에서... 유나가 꿀이 잔뜩 바른 빵을 접시에 담아 한나에게 전했다.

"한나님. 오랜만에 뵙네요. 여긴 식전 빵이 꽤나 맛있으니 식기 전에 어서 드세요."

"아. 고마워요."

"별 말씀을요."

냠.

한나가 빵을 한 입 가득 베어물자...

곡물의 고소함과 꿀의 달콤함이 입 안에 퍼졌다.

이내 그녀는 또박또박 끊어가며 말했다.

"내가. 다른 애들 봐서라도. 참아요."

"그래... 고맙다."

한 순간에 십 년은 늙어버린 시하.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던 요나가 시하에게 말했다.

"저도 궁금하긴 했습니다."

"음?"

"... 헤르만 녀석이 매번 치안본부에 들러서는 한나에게 했던 말과 비슷한 말을 저에게 하고선 도망가더군요."

째릿­ 하고. 다시금 헤르만을 째려보는 시하.

이제와서 헤르만은 진땀까지 빼게 되었다.

요나는 전채 요리로 나온 카나페를 맛보며 말했다.

"이곳은 전채를 먹어보기만 해도 그 품격을 알겠네요. 헤르만이 극찬할만 합니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사님."

"이왕 온 거. 요나도 맛있게 드시고 가세요."

"네. 앞으로도 기대되는군요."

아셰리아는 그저 주방 앞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여섯 달 전의 그녀였다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풍경.

이런 떠들석한 파티에는 낄 수 없을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모두 자신을 축하하기 위해 왔다.

그 사실을 떠올리면 왠지 모르게 가슴 속이 간질거린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아셰리아 공주에게 늙은 고블린 주방장이 무언가를 건네며 말했다.

"여기. 공주님의 생신이라고 들어서요."

"아..."

열두 개의 초가 꽂혀져 있는 아담한 케이크.

연보라색 블루베리 크림이 도화지라면, 하얀 색 크림 치즈가 그 도화지를 꾸미고 있는 듯 하다.

아무리 봐도 아셰리아만을 위해 만든 듯 했다.

"이렇게 손님이 많이 오실 줄 알았으면 더 크게 만들 걸 그랬네요."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요. 제 단골고객이신데요. 메인 요리는 제가 직접 내어 가겠습니다. 먼저 가시죠."

"네."

아셰리아는 케이크를 든 채로 잠시동안 지켜보다...

떠들썩한 일행들이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 * *

케이크에 초를 켜고 각자 한 마디씩 축하를 건내고.

고블린 주방장이 연이어 내오는 코스 요리를 맛보고.

각자의 근황이나 허울없는 말을 전하며...

계속되어가던 파티는 어느새 끝을 보였다.

이제 각자의 집으로 향해야 할 때.

왕궁 방향으로 향해야 하는 사람은 여섯 명 뿐이었다.

맨 앞에는 알렉산더와 유나가 이야기를 하며 걷고 있고,

후열에는 헤르만과 아샤가 모두를 호위하듯 따라 붙는다.

자연스레 그 사이에는 시하와 아셰리아가 함께 걷게 되었다.

"선생님."

"네?"

"요즘들어 계속 그런 생각을 합니다."

아셰리아는 마력등 너머의 밤하늘에 시선을 향한 채...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요즘 들어... 제 마음 속을 간지럽히는 느낌이 있어요."

"……."

"이게 바로 행복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 그런가요."

약간은 머뭇거리며 답하는 시하.

그런 그에게 아셰리아는 말을 이어갔다.

"아침엔 아샤가 저를 맞이하러 와주고... 온 가족이 둘러 앉은 자리에서 식사를 해요."

"낮에는 다른 분들과 함께 선생님의 수업을 듣죠. 각자 생각을 가감없이 말하며 서로를 알게 되요."

"선생님 댁을 찾아가서 파티도 하고, 오늘은 한나님과 요나님도 제 생일을 축하하러 와주셨어요."

"거기다 왕궁에서도 저에게 친하게 말을 걸어주시는 분들도 늘어났어요. 주방장님도 마찬가지에요."

그 순간순간을 떠올리듯이.

그 하나하나가 소중하다는 듯이.

아셰리아는 자신의 마음을 정의한다.

"저는 이 순간이 영원히 계속되었으면 좋겠어요."

"영원히..."

아셰리아는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이제야 자신을 둘러싼 이 세상을 좋아하게 되었다.

태어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선생님께서도 쭉 함께 있어주셨으면 해요."

"... 그렇군요."

마음 한 편으로.

선생님께서도 이 세상을 함께 좋아해주셨으면 한다.

분명 선생님께서는 고향에 미련이 없다고 하셨었지.

그렇기에 고향을 그리며 떠나실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을 좋아하게 되는 건 다른 이야기다.

어떤 방식으로든...삶에 만족하며 살아가셨으면 한다.

마치. 지금의 자신이 행복한 것 처럼.

"음..."

시하가 말했다.

"노력은 해볼게요."

"감사합니다."

다른 이라면 못 미더워할 답변.하지만 아셰리아는 만족했다.

가끔 무모한 행동을 하시긴 하지만...선생님께서는 불확실한 대답이나 거짓말은 하지 않으신다.

그렇기에 믿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왕궁을 향해 걸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