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 259. 일단 해보는 건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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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9. 일단 해보는 건 어때?
몇 달 간 꾸지 않았던 꿈을 꾸고 있다.
다행히 그 망할 집구석의 기억은 아닌 것 같다.
이건 아마도 저건 내 대학교 2학년 시절의 기억.
나는 대학 동기인 지후와 술을 마시고 있었다.
"사람 사는 데 의미라는 게 있을까."
"이 새끼 또 다른 애들 없다고..."
"미안하다. 너 앞에선 푸념만 해대서."
"... 우리 아직 파릇파릇한 스무 살 대학생이야. 아직 살 날이 더 많다고."
타인 앞에서는 매번 열심히 사는 척을 하던 나였다만...
지후 녀석은 순진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놈이랄까, 신입생 무렵부터 그런 날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렇게 살면 귀찮지 않냐.'
그게 아마 지후와 친해지게 된 첫 대화였지.
그 후로는 저 녀석 앞에서만큼은 본심을 내뱉었던 것 같다.
"나는 대학에 오면 전부 알게 될 줄 알았거든."
꿈 속의 나는 소주잔을 이리저리 흔들면서 말했다.
"사람은 도대체 왜 살아가야 하는 걸까. 내가 살아야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이걸 알고 싶어서 인문계에 들어왔고, 과도 반쯤은 이걸 알아내기 위해 선택한거야."
"그런데 아무리 배우고 찾아봐도... 이 문제만큼은 도저히 답이 보이질 않더라."
빙글빙글 돌리고 있던 소주를 들이키는 나.
지후 녀석은 내 잔에 술을 따라주며 말했다.
"모든 사회학과 철학은 인간이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기 위한 고민이다... 담당교수님께서도 말했잖아?"
"조금이라도 너가 행복하게 살 고민을 해 봐. 뭐든 좋으니까."
오랜만에 듣네...
첫 개론 수업에서. 내 담당교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세상에 퍼져있는 모든 생각들의 기저에는 행복이라는 가치가 내재되어 있다. 그런 의미를 품고 있는 말이다.
정말이지 간단하지만 많은 생각을 품게하는 문구였다.
하지만 딱 그 정도였다.
정작 나에게는 와닿지 않는 말이었으니까.
반쯤 취한 내가 멍하니 말했다.
"행복을 모르겠는데 어떻게 해?"
"... 다른 건 잘 아는 놈이 왜 이 문제만 나오면 이럴까."
어이없다는 듯 이마를 짚는 지후.
녀석은 잠시동안 고민하더니...
뜬금없는 말을 내뱉었다.
"너. 연애라도 해보던가."
"... 내가 여자에 대해 뭘 안다고."
"허. 나도 너 새끼를 그렇게 생각하던 때가 있었죠."
째릿 하고 나를 째려보는 지후.
녀석은 말을 이어갔다.
"처음에는 네가 정말 여자를 모르나 싶었는데... 넌 여자가 너한테 관심만 보이면 금새 거리를 둬버리잖아?"
... 이거.
그 날의 기억이구나.
"그런데 그게 한두 번이었어야 말이 되는거지."
"그렇지는..."
"아, 예. 변명은 듣지 않겠습니다."
"……."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피하는 건데?"
나를 몰아붙이는 지후 녀석과... 슬쩍 눈을 피하는 나.
저 녀석에게만큼은 생각을 제대로 숨길 수 없었다.
꿈 속의 나는 그 상태로 말했다.
"사랑이 뭔지 모르겠어."
"……."
"연애 관계라는 게 잘 굴러가려면... 사귀고 있는 두 사람 모두에게 사랑이 있어야 하잖아."
참 순진한 생각이었지.
어머니의 가르침을 따라 인간다운 껍데기를 쓰고 있었을 뿐. 결국 내 피의 절반은 그것으로부터 파생된 것.
올바른 연인과 가족의 형태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내가 사랑이라는 걸 잘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했었다.
다른 커플이 생기는 순간을 꽤나 봐왔기에 그런 기색을 짐작할 수는 있었지만... 나는 그걸 피하기로 했다.
사랑을 느끼지 못했고, 사랑할 자신마저 없었기 때문이다.
잠시동안 조용히 있던 지후가 말했다.
"... 그러니까 일단 연애라도 해보는 건 어때?"
"무슨 소리야?"
꿈에서 녀석을 보니, 의도적인 티가 난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짐작도 하지 못했었지.
지금 녀석이 하는 말이... 그녀와의 합작이었다는 걸.
"사랑같은 감정은 둘째치고, 일단 연애를 해보는거야. 나는 너가 분명 잘 할 거라 생각하거든."
"... 연애를 하다보면 사랑이 뭔지 알게 되지 않을까?"
팟 하고.
녀석은 그렇게 덧붙이자...
꿈은 점점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 * *
"아."
이미 해는 중천에 떠오른 상황.
전날 파티에서 알렉산더와 공주님을 바래다 주고 저택에는 늦게 도착했다보니... 늦잠을 자버린 모양이다.
"후우..."
오늘은 4월 23일.
아셰리아 공주의 생일파티가 예정된 날이며,거기다 내 맞선이 있는 날이기도 하다.
... 그런데 하필이면 오늘 그 시절의 꿈을 꿔버리다니. 여러모로 일진이 사나울 것 같다.
"음... 이럴 생각할 때가 아니지."
지금쯤이면 유나가 아셰리아 공주의 파티에 참여할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도울 일이 있으면 도와야겠지.
나는 서둘러 옷을 정돈하고 방을 나섰다.
.
유나의 방에는 이른 아침부터 한나가 찾아와 유나의 복장을 골라주고 있었다.
나는 여자들의 모임에 끼지는 못하고 문 앞에서 기다리는 상황.
안에서 한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나양은 올해 생일을 맞이하면 14세라고 하셨죠. 그 정도 나이라면 프릴은 적은 게 좋아요."
"여기 다섯 벌 정도가 후보겠네요."
"그리고 오늘 파티의 주인공은 아셰리아 공주님이니까... 약간은 튀지 않는 색을 선택해야해요."
"그럼... 여기 하늘색 드레스부터 시착해볼까요?"
"좋아요. 어울릴 것 같네요."
그 옆에서는 사아씨도 거들어주고 있다.
고작 복장을 골라주는데 왜 한나가 오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내 저택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생각해보면 에우데미아 귀족 파티에는 아직 미숙한 사람들 뿐이다.
혜세국 출신의 유나와 사아씨.
평민 출신의 아모스와 아일라.
간접적으로 건국제나 해방제는 겪어 보았어도, 12세 생일 파티라고는 전혀 본 적 조차 없는 나.
그렇다고 오늘 파티의 주인공인 공주님이나 그녀를 호위하는 아샤를 부를 수는 없는 일 아닌가.
파티에 참석한 경험이 많은 여성이 필요했는데... 내 주변에서 그런 사람은 한나가 유일했다.
나는 유나의 방문 밖에서 말했다.
"너가 없었으면 어쩔 뻔 했냐."
"그러니까. 평소에 저한테 좀 잘 하시라니까요."
"알았다..."
한나가 어제 그 파티에 참가하긴 했어도... 마음 속의 '섭섭함'은 아직 덜 풀린 모양이었다.
파티같은 일에 삐져버리는 성격이었다니. 다음부터는 빠짐없이 챙겨줘야하나 싶다.
그나저나 오늘 파티는 유나가 조심해야할텐데.
"유나야. 시간이 없으니까... 갈아입으면서 들어라."
"네, 의부님."
"오늘 파티부터는 주의해야 한다. 지금까지 많이 말했으니까 알고 있지?"
"... 네."
지난 넉 달간 유나는 알렉산더와 기디언이 소개해준 귀족들과 만났었다.
공식 행사에 참가하기 위한 밑거름, 유나의 사회적 토대를 준비하기 위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셰리아 공주의 파티는 여러모로 그 성격이 다르다.
대부분이 공주를 축하하며 왕실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자리지만, 다른 의도를 가진 자들도 오기 때문이다.
그 의도의 예를 들면... 공주의 오라버니겠지.
"다른 귀족들도 문제지만... 너가 특히 신경써야 할 사람이 하나 있어. 서부 변경백 에피스템 후작가의 영애."
"그녀는 올해로 16세. 후작령 안팎의 귀족 영애들을 데리고 다닐거야."
게임에서 아카데미 루트를 탈 경우. 알렉산더에게 집적거리는 '악역 영애'와 비슷한 역할로 출연한다.
물론 작중 어두운 느낌의 알렉산더는 삶에 의욕조차 없는 상황. 그가 연애를 하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
거기다...
"후작 영애는... 성격이 단순해서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저지르는 타입이야. 너로서는 꽤 쉬울거야."
그녀는 '전형적인 멍청한 악녀 캐릭터'
알렉산더 주변의 영애를 쳐내려고 노력하지만, 오히려 그 과정에서 알렉산더의 미움을 사버린다.
그런 성격이다보니 유나가 굳이 큰 공을 들일 필요가 없을 수도 있지만... 준비해서 손해볼 일은 없다.
"에피스템 후작가..."
"나머지 귀족들은 적당히만 상대하면 돼."
"알겠습니다. 주의를 기울이겠습니다."
"그래. 여유가 있으면 공주님께도 잘 해드리렴. 오늘이 첫 데뷔니까."
"네."
유나의 방 안에서 한나가 말했다.
"선생님. 나도 모르는 일을 어쩜 그리 잘 아는거야?"
"그냥? 이리저리 다니다보면 들리잖아."
"나도 그런 걸 들은 적이 없는데?"
"너가 따돌림이라도 당하는 건 아닐까..."
"... 에이. 설마."
사실 한나가 모르는 건 당연한 일이다.
에피스템 후작가의 영애는 부모의 과보호로 인해 영지 밖으로 나오는 건 이번이 거의 처음일테니까.
화제를 돌리려는 듯 한나가 말을 이어갔다.
"그나저나 선생님은 괜찮아요?"
"왜?"
"숙모님... 그러니까 루시아 왕비님께서는 선생님이 여자를 꺼리는 것 같다고 하시던데."
"아... 오늘 맞선 이야기였어?"
"그렇지."
당연히 괜찮지 않다.
마음에도 없는 맞선은 분명 부담되는 일이니까.그래도 다른 이들 앞에서 불편한 기색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선생님은 필로네님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들은 것만 가지고는 모르지. 봐야 아는 일이고. 그래도 결혼이나 약혼을 할 생각은 전혀 없어."
"흐음. 그렇구나. 그나저나 다행이다. 드디어 선생님이 맞선을 봐서."
"무슨 소리야?"
기분 탓인가...꿈에서부터 무슨 소리냐는 말을 계속 하는 것 같은데.
그나저나 왜 한나에게 내 맞선이 다행인 일이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방문 너머의 한나가 말했다.
"저한테 얼마나 많은 귀족 영애들이 들러붙는데요. 왕비님께 말을 못 거는 가문의 영애들은 전부 저에게 온다니까요."
"……."
"그나마 이번 맞선이 끝나면 조금은 덜 그러겠죠? 필로네님은 소피아 후작가의 정식 후계자니까요."
"... 왠지 미안하네."
필로네 소피아.
내 맞선 상대다.
후작가 영애와 첫 맞선을 치루었다는 소문이 세간에 퍼지게 되면 확실히 그런 요청은 줄어들겠지.
그래도 내가 온갖 만남을 거절하고 다녀서 주변에 민폐를 끼친 모양이니 미안함을 표했다.
그에 한나는 방문을 열고 나오며 또박또박 말했다.
"알면 저한테 좀 잘하세요."
"... 그래."
... 지금은 4월인데 왜 주변이 추운 것 같지?
왕비님도 이러더니 프로네시스 가문의 여자들은 다 이런가보다.
한나의 뒤로 유나와 사아씨도 나왔다.
"의부님. 준비되었습니다."
"오..."
유나의 검은 색 머리와 대비를 이루는 하늘색 드레스.
차분한 느낌의 유나와 잘 어울리는 복장이었다.
"멋지게 차려 입었으니까... 잘 다녀오렴."
"네. 의부님도 힘내세요."
"음?"
"지난 한 주 동안 기운이 없어보이셔서요."
아이에게 티가 날 정도였었나...
옛날 일을 생각하지 않으려해도 계속 떠올랐나보다.
오늘 아침에 그런 꿈을 꾼 것도 그 이유였겠지.
"괜찮아. 전부 잘 될 거니까."
"... 네."
"내 맞선보다 공주님의 파티가 일찍 시작하지? 어서 마차를 타고 왕궁으로 출발하렴. 나도 준비해야겠다."
"알겠습니다."
"선생님. 그럼 나도 가볼게. 출근해야하거든."
"그래. 고맙다."
그렇게 한나와 유나는 왕궁으로 떠나고.
나는 맞선을 준비하며 기억을 더듬었다.
필로네 소피아.
그녀는 누군가를 쉽게 사랑할 사람은 아니다.
이 맞선도 다른 이유가 있어서 신청한 거겠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보니...
한 편으로는 안도감이 들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불안감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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