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왕실의 가정교사-96화 (96/215)

〈 96화 〉 2­60. 곤란한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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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 곤란한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원래라면 알현의 장으로 쓰이는 본관의 홀.

그 장소는 건국제에 이어 오늘도 아셰리아 공주의 생일을 맞이해 연회의 장으로 탈바꿈했다.

다시금 개방되어 빛이 쏟아지는 테라스로 탈바꿈한 벽면.

드넓은 홀에 자리잡은 수많은 입식 테이블.

그 테이블을 장식하고 있는 수많은 조화와 다과.

나라 안의 모든 귀족 자제들을 맞이하는 데 부끄러움이 없을 정도였다.

"와. 내가 알현의 홀 테라스에 자리를 잡게 되다니!"

"공주님과 같은 나이라서 다행이야..."

올해로 12세를 맞이한 한 귀족 남자아이의 탄성. 그에 옆에 있던 여자아이가 답했다.

그들은 상대적으로 낮은 지위의 귀족 자제들이었다.

"원래라면 평생토록 홀의 중앙까지 올 일이 없을 텐데 말이야."

"... 이런 날에 그런 이야기는 하지 말자?"

"아... 그렇네. 나도 모르게 그만."

건국제의 목적 역시 서로 다른 지위에 있는 귀족들이 유대감을 키울 기회. 건국제는 지위에 따라 자리를 잡는 게 상식이다.

그렇기에 벽난로 근처나 테라스의 자리는 전부 고위 귀족들의 차지, 하급 귀족들은 홀의 말석을 차지하게 된다.

하지만 건국제와 다르게 오늘은 나라의 미래를 이끌 청년들이 공주의 생일을 축하하는 날.

오늘만큼은 자유롭게 자리를 잡고 즐길 권리가 있다.

테라스 자리에서 들떠있는 귀족 소년이 말했다.

"우리 지위가 낮아서 입장을 먼저 한 건 맞지만... 오늘은 여러모로 그게 더 좋은 날이잖아?"

"왜. 자리가 좋아서 그러는거야?"

"그것도 있겠지만... 정확히는 그게 아니지."

모든 파티에 주인공은 늦게 등장하는 법.

파티의 입장 순서는 그와 비슷한 논리를 따진다.

낮은 지위에서 시작하여 높은 지위를 향해.

이름난 가문의 자제들은 먼저 입장한 다른 소년 소녀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입장하게 된다.

하지만 오늘은 꽤나 이례적인 일이 많은 날이었으니.

"오늘 파티에 누가 참가하는지 알고 있어?"

"... 누군데?"

"하아. 이렇게까지 사교계에 관심이 없어서야... 벌써부터 노처녀가 되지 않을까 걱정스럽습니다."

"비꼬지 말고 설명이나 해 봐."

"알았어. 한 분씩 들어오실 때 설명해줄게."

잠시간의 시간이 흐르고...

식장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이전까지는 지위의 고하만을 기준으로 입장했다면, 마치 미리 짜놓은 순서가 있기라도 한 듯 한 사람씩 입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연스레 입장자의 면면에 주목이 쏠릴 수 밖에 없었다.

"오늘은 공주님의 12세를 기념하는 축일이지만, 공주님 이외에도 주목해야 할 귀족이 셋 있어."

홀의 입구에서 멀리 떨어진 자리에서 세 손가락을 세우며 말하는 소년.

그는 약간 들뜬 채로 옆에 있는 소녀에게 설명했다.

"저 분이 누스 백작가의 안젤라 영애. 화제가 되었던 세 사람 중 하나야."

그의 시선 끝에는 한 소녀가 있었다.

길게 늘어뜨린 분홍색 머리칼.

전반적으로 순한 인상을 지니고 있다.

그녀는 수많은 인파에 둘러싸여 인사를 받는 중이다.

"음... 겉보기엔 다른 영애들과 다른 게 없어 보이는데?"

"너 말이야. 누스 백작가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알고 있어?"

"음... 지금의 변경백 가문들을 중재해 에우데미아로 끌어들인 가문이라는 거?"

"맞아. 분명 큰 공이지만... 특출난 심상 마법은 사용할 수 없는 가문이어서 백작가로 남게 되었지."

에우데미아에서 정식으로 후작위 이상의 지위를 가지기 위해서는 암묵적인 조건이 하나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특출난 마법적인 재능.

그렇기에 에우데미아의 왕족, 사대 귀족, 세 변경백 가문은 각자 특별한 마법적 재능을 보유하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 안젤라 영애에게 엄청나게 특별한 심상 마법이 개화했다고 해."

"엄청나게 특별한 심상 마법...?"

"응."

단순히 개인에게 심상 마법이 개화하는 것은 분명 흔한 일까지는 아니지만... 아예 없는 일은 아니다.

심상은 결국 개인의 삶 속에서 축적된 마음.

만약 개인의 강한 마음이 형체화 될 수 있다면 심상 마법은 자연스럽게 발현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그 심상 마법이 어떤 효과를 가지는지에 따라 세간의 평가는 크게 달라진다.

"안젤라 영애는 주변의 동식물이 자신을 따르도록 하는 심상 마법을 발현했다고 하더라."

"... 그런 마법은 들어보지도 못했는데?"

"그러니까 저 정도 관심이 쏠리는거지."

소년이 옆에 있는 소녀에게 설명하는 동안에도, 안젤라 영애에게 쏟아지는 인사는 끊이지 않았다.

소년은 그 모습을 보며 말을 이어갔다.

"그녀의 심상 마법을 후대에 계승할 수만 있다면 누스 가문이 후작위에 오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런 소문이 퍼지고 있어."

"안 그래도 후작위를 받지 못한 것에 한이 많은 가문이잖아."

"역시. 역사에 관심이 깊다보니 그런 건 잘 알고 있구나."

"당연하지. 누스는 세 변경백을 에우데미아로 편입시킨 일등 공신인데, 백작위에 머물게 되었잖아?"

"그렇지."

그렇게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자... 연회장의 입구에는 또다른 영애 한 명이 등장했다.

나선형으로 빙글빙글 꼬아 놓은 적색에 가까운 주황색 머리.

날카로운 눈매는 기가 센 느낌을 풍기게 한다.

그녀의 뒤로는 영애들이 줄을 지어 따르고 있었다.

"아... 왔구나."

"저 사람은 누구야?"

"에피스템 후작가의 유니스 영애. 올해로 16세이지만... 영지 바깥 행사에는 처음 나오는 사람일거야."

"그건 좀 이상하네."

"그렇지?"

12세의 생일을 맞이한 후로는 지방 변경백의 자제들이라 하더라도 여러 행사를 참가하기 마련이다.

거기다 이번 행사가 16세인 그녀의 첫 행사라면 왕자의 12세 축일에도 불참했다는 것이 아닌가?

여러모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에피스템 후작이 밝힌 바로는 그녀의 몸 상태가 꽤나 안좋았었다고 해. 그래서 요양을 핑계로 자신의 영지에서 쭉 나오지 않았다고 하더라고."

"아. 지병이 있었던거야?"

고개를 갸웃거리는 귀족 소녀.

그 반응을 보며 소년이 말했다.

"하지만 안좋은 소문이 돌고 있어."

"안좋은 소문?"

귀족 소년은 소녀에게 한층 더 다가가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귓속말을 했다.

"유니스 영애의 성격이 여러모로 박살이라는 소문."

"박...살..."

"머리 스타일처럼 주변을 박살낸다고 하더라..."

귀족이 쓰기에는 너무나 저급한 단어.

하지만 세간의 소문을 전하기엔 그만한 단어가 없었다.

다시금 원래의 거리로 돌아간 소년이 말을 이어갔다.

"하나뿐인 오라버니도 포기했다나... 유니스 영애의 뒷편으로 보이는 저 사람들도 에피스템 후작가 내외의 영애들이거나, 아첨을 하려고 모여든 사람들이라 하더라고."

"하아... 주변 영지니까 어쩔 수 없다는 건가."

"그런 셈이지..."

"우린 정말 다행이야. 그나마 소피아 령 근처에 있어서..."

소녀는 필로네 소피아... 소피아 령의 후계자인 그녀를 생각하며 말했다.

그에 동의한다는 듯 소년이 말했다.

"그렇지. 필로네님은 우리에게도 친절한 분이시니까. 오늘은 높으신 분과 맞선도 보신다고 하더라."

"그래?"

"정말이지 사교계에 관심이 없구나. 오늘은 필로네님이 왕실 가정교사님과 맞선을 보는 날이기도 해."

"그렇구나."

"온갖 맞선을 거절하던 가정교사님이지만, 필로네님의 맞선 요청은 받아들였다는 소문이 파다해."

아무리 사교계에 관심이 없는 소녀라도 표류자인 왕실 가정교사 이시하의 소문만큼은 알고 있다.

다른 소문들은 단순한 가십거리에 불과하다면, 표류자라는 존재는 역사에 남을만한 존재가 아닌가.

그런 사람과 맞선을 본다니, 새삼 필로네 영애가 대단하게 느껴지는 소녀였다.

소년 역시 말했다.

"가정교사님은 얼마 전에는 큰 도적도 소탕하셨고, 왕도 내에서는 자선 사업도 하고 계신다 했었지."

"... 필로네님과 이어지면 정말 어울릴것 같네."

"그러게 말이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느라...

그들은 미처 모르고 있었다.

"거기의 두 분. 잠깐."

'성격이 여러모로 박살난 송곳머리 유니스 영애'가 자신들의 바로 눈 앞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어린 소년 소녀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그런 그들에게 날 선 목소리로 말하는 유니스 영애.

"지금 두 분이 계신 자리는 유서 깊은 건국제에서 항상 저희 가문의 자리였답니다. 비켜주시겠어요?"

"... 네?"

두 사람이 자리를 잡고 있던 곳은 홀의 상석으로부터 왼편 4번째 테라스. 그녀의 말대로 에피스템 가문이 건국제마다 사용하는 자리일 수 있다.

하지만 오늘이 무슨 날인가.

건국제가 아닌 공주의 생일을 축하하는 날이다.

오늘은 각자의 자리보다, 자신들과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왕족과 인사를 나누는 게 더 중요하다.

그런데 자리를 비켜서라니...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유니스의 뒷편에 있던 다른 영애들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유니스님께서 말하셨지 않나요?"

"에피스템 후작가를 거스를 생각이신가봐요."

"어디 공작가의 자제분이라도 되시는 건가요?"

"그렇다기엔 본 적 없는 얼굴인데..."

유니스를 앞세웠기에 가능한 험담들이자... 동시에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한 아첨의 말들.

소년은 그 영애들이 하는 말의 의미를 잘 알고 있지만, 달리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실례했습니다."

그저 자리를 비킬 수 밖에 없는 소년이었다.

자신은 유니스 영애에 비하면 한미하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자작가의 장남.

높으신 분과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는 않았다.

소년이 소녀를 이끌고 다른 자리를 찾아 나서려고 하자... 유니스 영애는 그를 멈춰 세웠다.

"멋대로 저희 가문의 자리를 점거하고 있었다면, 그에 상응하는 사과는 받아야겠는데요?"

"뭐라고요?"

이번만큼은 자신도 모르게 대들게 되었다.

아무리 지위의 차이가 있어도 자신 역시 에우데미아의 한 축을 담당하는 귀족가문의 일원.

멋대로 남의 자리를 점거했다는 것 역시 사실이 아니며, 사과를 해야하는 처지는 더더욱 아니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니스 영애는 말했다.

"무릎 정도는 꿇었으면 좋겠는데..."

어느새 주변의 시선은 이곳에 집중된 상황.

소년의 옆에 있는 소녀는 그 시선에 움츠러들었다.

소년은 그녀를 감싸듯 나서며 말했다.

"오늘은 건국제가 아닌 공주 전하의 탄생을 축하하는 자리. 이런 날에 그렇게까지 하셔야겠습니까?"

"말이 많으시네요.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죠."

"거기에 자리가 정해져있다는 것은 처음 듣는 일입니다. 자유롭게 자리를 잡는 것일텐데요?"

"제가 평소 저희 가문이 사용하는 자리에 있겠다는 것도 자유입니다. 사과나 하시죠."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였다.

거기에 대화를 할수록 이곳으로 이목이 집중될 뿐.

그 누구도 소년을 도우려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잠시간의 시간이 흐르고...

"어서. 무릎이나 꿇으세요."

유니스는 소년을 재촉했다.

동시에...

"아... 저 분이 바로..."

"임시 공작이 입양했다는?"

"정말 평민 출신이 맞는거야?"

"옆에는 프라시스 가주의 조카분이시잖아?"

홀 입구 근처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웅성거림은 서서히 소년에게 가까워졌다.

이내 인파는 마치 물결처럼 갈라졌고...

그 사이에서 진청색 드레스를 입은 동방의 소녀가 나타났다.

어울리지 않을 조합이지만 신비한 느낌을 주는 복식.

평생을 에우데미아의 귀족으로 살아온 듯한 우아한 몸동작.

그녀가 드레스의 한쪽 끝자락을 잡고 인사를 건네며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유나라고 합니다."

흑발에 실눈을 한 소년과 함께 나타난 그녀는...

소년과 유니스의 사이에 서서 말했다.

"제 동생이나 마찬가지인 아셰리아의 연회인데... 곤란한 일이라도 있으신건가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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