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왕실의 가정교사-100화 (100/215)

〈 100화 〉 2­64. 맞선의 시작.

* * *

2­64. 맞선의 시작.

영지에서 사흘 밤낮을 달려 찾아온 왕도.

아레트 아카데미를 졸업한 이후로 건국제 축일을 제외하면 왕도에 올 일이 전혀 없다 보니, 봄의 거리를 보는 건 실로 오랜만이다.

가게로의 호객에 여념이 없는 장사꾼들.

각자의 일로 거리를 나다니는 왕도민들.

에코니아 각지에서 온 상인과 여행자들.

수많은 이들이 뒤섞여 있는 활기찬 거리.

... 아버지를 대신하여 내가 영지를 관리하게 된 뒤로 소피아 령이 많이 발전했다고는 하지만, 역시나 왕도에 비할 수는 없다.

"아가씨,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내 시중을 위해 왕도까지 함께 온 시녀장이 물었다.

직책이 가문의 시녀장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어렸던 나를 지금껏 키워온 사람이다.

나에게 있어서는 실질적인 어머니나 마찬가지다.

"별로. 아무 생각도 없어."

"그러신가요."

왕도를 보며 우리 영지와 비교하고 있었다.

시녀장에게 함부로 그런 말을 꺼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평소 말버릇처럼 입에 담는 말을 다시금 할 수 밖에 없었다.

"아가씨. 주제 넘지만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아.

또 시작인걸까.

"이 날을 위해 평소 입지도 않으시던 드레스까지 챙겼고, 마차로 사흘을 달려 왕도에 왔습니다. 조금만 더 노력해보자구요?"

"평소에 드레스를 입지 않는건..."

"아가씨!"

... 언제나의 잔소리를 늘어놓는 시녀장이었다.

내가 평소 드레스를 입지 않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 쓸데없이 비싸기만 하다.

파티에 입는 드레스는 한 벌에 금화 한 장은 기본, 정말이지 터무니 없는 가격이라 할 수 있다.

둘, 영지 활동에 어울리지 않는다.

소피아 령의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나 역시 개인적으로 허브를 재배하거나, 내 애마인 실비아를 타고 이곳저곳 다니기를 좋아한다.

이런 영지 환경에서 농지 점검을 하는 데 장식만 치렁치렁 달린 드레스는 방해물이 될 뿐이다.

위 두 가지 이유만으로도 드레스라는 존재는 지극히 비효율적인 의복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 정도면 합리적인 이유 아닌가.

아, 물론 나는 때와 장소를 가릴 줄 아는 사람이다.

건국제 연회라던가... 아카데미 학생 시절 참가하던 해방제 연회에는 드레스를 꼬박꼬박 입었다.

이 정도만 예의를 지키면 충분하지 않을까.

하지만 내 마음 속에서 울려퍼지는 반론을 듣지 못하는 시녀장은 잔소리를 이어나갔다.

"조금은 웃으셔도 됩니다. 그런 표정으로 계속 있으시면 맞선 상대가 달아나 버릴거라구요?"

"그 표류자 공작이라면 그러진 않을 걸."

"그래도 사람이란 건 모릅니다. 오늘은 아가씨께서 그토록 기대하시던 날 아닙니까."

기대라...

물론 기대를 하고는 있다.

하지만 내가 실제로 품고 있는 기대는 시녀장이 말한 기대와는 엄연히 다른 방향에 있는 것이다.

나는 그 사람에 대한 연심이 두근두근 솟아오른다거나 하는 이유로 맞선을 요청한 게 아니니까.

표류자 출신 왕실 가정교사 이시하.

그를 처음 본 건 건국제 전야의 댄스 파티였지. 마치 합리의 원칙에 따라 행동하는 듯 했다.

타 귀족의 견제에도 무너지지 않는 댄스 동선.

많은 영애를 상대하며 보이는 필수적인 매너.

그 모든 움직임은 자로 잰 듯이 계산적이었다.

목적은 많은 귀족의 호감을 사는 것이었겠지.

상대 영애들에게 감정이 있어보이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마지막이 되어서야 댄스 신청을 해보았다.

그가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내 댄스 신청을 거절해야 하는 순간, 역시나 그는 나를 거절했다.

무척이나 이성적인 판단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그에 대한 조사를 계속했다.

표류한 지 한 달도 채 안 된 시점에 재앙 토벌.

왕도의 슬럼가의 폭력 조직을 뿌리까지 토벌.

프라시스 가의 가주 발람과의 결투에서 승리.

동방에서 들어온 거대 조직을 소탕하기까지.

그가 해낸 모든 것은 얼핏 보면 무리한 일이었지만 성공했을 때의 보상만큼은 분명 확실했다.

왕실의 신뢰를 얻고, 귀족 사이에서의 평판을 얻었으며, 대중들에게 인기를 얻지 않았는가.

예상대로 그 사람은 이 왕국에서 힘을 기르고 있다.

나로서는 그의 정확한 목적까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 합리적인 사람이란 것은 확실하다.

그는 분명 내 제안을 수락할 것이고,

내가 바라던 최고의 반려가 될 것이다.

끼익 ­

어느새 마차는 정지했고,

바깥에서 마차를 세운 마부가 말했다.

"아가씨. 왕궁에 도착했습니다."

도착한 곳은 왕궁의 동관이었다.

왕실에서 내게 편의를 제공해주었기에, 맞선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이곳에서 머물게 된다.

오늘 저녁 만찬도 이곳에서 진행될 것이다.

나와 마주보는 자리에서 시녀장이 말했다.

"아가씨. 이제 배정된 방에서 드레스로 갈아입고, 화장도 다시금 고치고, 할 일이 정말 많습니다."

오늘만큼은 나보다도 활기가 넘치는 그녀였다.

잠시 말을 고르던 그녀는 내 손을 두 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조금은 떨리는 어조로 말했다.

"저는 아가씨의 웃는 얼굴을 좋아합니다."

"부디 이번 맞선을 통해 아가씨께서 사랑을 이루고 행복하셨으면 해요."

…….

웃는 얼굴. 사랑. 행복.

이 단어들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들은 분명 좋은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저 가치들을 위해서는 세상 모든 감정을 배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감정이란 인간의 인식을 방해하기 마련이니까.

감정으로 인해 뒤틀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행동해버린다면 산출되는 결과는 불행 뿐이다.

'그 일'도 정말 웃기는 일이었지.

사랑과 행복이란 감정에 눈이 홀려버린 인간이, 그 감정에 빠져버렸기에 불행해졌다는 것이.

"노력해볼게."

"좋아요. 이번 맞선, 힘내봅시다."

"... 그래."

나는 오늘 진정한 동료를 찾으러 왔으니...

시녀장이 말하는 웃음과 행복을 위해 온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마차에서 내렸다.

* * *

(시하 시점)

나로서는 오랜만에 찾아온 왕성 동관이었다.

알렉산더 왕자와 아셰리아 공주가 후궁으로 거처를 옮긴 뒤로는 올 일이 없었으니까.

원래라면 자신을 만나러 온 상대를 저택에서 지내도록 하며 맞선을 진행해야만 하지만... 아쉽게도 내 저택은 규모가 작고 방도 꽉 차버린 상황.

그렇다고 살고있는 주민들을 내쫓을 수도 없지 않은가. 그에 이 맞선을 중매한 왕실이 나서 소피아 영애에게 왕궁 동관의 손님방을 내주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현재... 부담스러울 정도로 기다란 식탁이 있는 식당에서 상대를 기다리는 중이다.

"헤르만. 주방에 레시피는 전해 뒀지?"

"준비는 엊그제 미리 끝내 뒀어."

"와... 웬일로 너가 그리 바쁘게 움직였대?"

"맞선을 보신다는데, 당연히 내가 노오력을 해야겠지."

"……."

후...

이 녀석. 이런 때만 쓸데없이 부지런하다니.

비록 내가 왕실로부터 장소와 인력을 빌린 셈이지만 디테일한 준비는 내가 관여하기로 했다.

이 자리가 만들어진 과정이 어찌 되었건, 두 사람이 알아가는 자리이니 내가 주도하는 편이 옳다는 왕비님의 의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부담감만 커지는 제안이었지만 그 의도가 정론이다보니 거절할 수 없었다.

"그 레시피라면 어떤 귀족이 와도 만족스럽게 먹을 걸. 요리 선정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래. 그건 다행이긴 한데... 막상 맞선 자리에 나오고 보니 별 게 다 걱정된단 말이지."

"또 뭐가 걱정되는 건데?"

"맞선의 내용 때문에 그래."

게임에서 이방인은 '맞선'을 치루지 않았다.

그 능력 좋으신 주인공은 애초에 귀족이 아니었으니까.

귀족과 연을 맺는다 해도 대부분 실적이 눈에 들어 높으신 분들이 접선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늘 맞선 상대와 친분을 쌓는 루트에서도, 이방인은 그녀에게 힘을 빌려주는 입장에 가까웠다.

그러다보니 맞선에서 뭘 해야할 지 전혀 몰랐는데... 맞선의 내용이 내 상상 그 이상이었다.

헤르만 녀석이 말했다.

"음. 소피아 영애가 원하는 방향으로 맞선을 진행하자고 했었지. 확실히 뭘 요구할 지를 모르겠네."

"하아..."

"영지 귀족이 상대를 맞이하는 입장이라면 영지를 구경시켜주거나 업무적인 이야기도 하거든. 소피아 영애도 비슷한 걸 요구하지 않을까?"

... 그럼 수업 참관같은 걸 요구한다는 걸까.

무언가 민감한 것만 아니었으면 좋겠다.

골머리를 앓는 그 순간, 대기하고 있던 집사장이 말했다.

"영애께서 입장하십니다."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문이 양쪽에서 열리고 내 맞선 상대가 등장했다.

"안녕하십니까. 건국제 연회에 이어 두번째로 뵙는군요. 필로네 소피아라고 합니다."

필로네 소피아.

게임 가이드북의 서술을 빌리자면...

짙은 보랏빛의 머리칼이 물결처럼 내려오고, 심해처럼 깊은 눈동자에는 빛이 감돌고 있다.

아셰리아 여왕의 차가운 분위기와는 또다른 냉철한 분위기를 풍기는, 능력있는 여성 귀족.

그 게임의 원래 역사대로라면 아셰리아 여왕을 몰아내는 쿠데타 세력의 구심점이 되는 인물.

필로네의 난이 성공한다면, 그녀는 알렉산더와 정략 결혼을 한 후 왕비가 되어 나라를 다스린다.

미래를 대비해 적어두던 노트에서 내가 경계해야 할 대상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사람이다.

경계 대상 1호인 뜬금포 흑막 휴브리스나, 먼치킨 캐릭터 이방인에 비하면 훨씬 인간적이지만... 그녀의 합리론은 사람을 끌어들인다. 그 점 하나만으로도 방심할 수 없는 노릇이다.

"왕실 가정교사 이시하라고 합니다.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자리가 준비되어 있으니 앉으시죠."

자리에서 일어난 내가 가볍게 예를 표하며 말하자...

필로네는 자신의 자리, 기나긴 테이블의 한 쪽 끝에 마련되어 있는 곳을 바라본 뒤 말했다.

"음... 거리가 너무 머네요."

"제 자리를 공작님의 바로 옆으로 옮겨도 될까요?"

처음부터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도대체 무슨 의도로 맞선을 신청한걸까.

그녀가 아무 이유도 없이 이런 자리를 요청했을 리 없다.

나는 그런 고민을 하며 답했다.

"영애께서 불편하지 않으시다면, 저는 상관없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집사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녀의 요청에 노집사는 재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새로운 테이블 세트가 내 자리 옆에 순식간에 준비되었고, 필로네는 그 자리에 앉았다.

게임에서는 조금 더 격식을 중시하던 타입이었는데...

그 게임보다 3년 이른 시간대에 있기 때문일까. 내가 알던 그녀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 든다.

"이 맞선을 통해..."

위화감을 느끼며 내가 자리에 착석하자 마자...

필로네 소피아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공작님과 저의 이해가 일치하는지. 알고 싶네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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