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화 〉 265. 형식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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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5. 형식적인
"공작님과 저의 이해가 일치하는지. 알고 싶네요."
역시나.
그녀, 필로네 소피아는 내게 별다른 감정이 있어 맞선을 요청했던 건 아니었다.
그나저나 이해라...
게임에서 그녀가 중시하던 것은 실리. 정말이지 그녀다운 태도라 생각한다.
하지만 왜 하필 맞선이라는 형식을 고른걸까.
필로네가 게임 속 이방인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일 때는 면접과 교섭을 우선했다.
이 부분은 약간 위화감이 느껴진다.
"일단 식사를 준비했으니 만찬부터 즐기도록 하죠. 이야기는 차근차근 나누어봅시다."
"그게 좋겠군요."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식당 문이 열리고 여러 요리들이 차례대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번 만찬의 요리 선정은 제가 담당했습니다."
"아... 그렇군요. 그럼 요리마다 공작님께서 설명도 덧붙여주실 수 있나요?"
"알겠습니다. 그럼 여기 전채부터..."
각 음식에 대해 궁금한 부분을 궁금해하는 필로네.
이름이나 먹는 방법, 조리법을 간단하게 설명하는 나.
그런 형식적인 식사 시간이 이어질 뿐이었다.
그저 원래부터 이런 자리였다는 듯이.
우리 둘 사이에서는 서로에게 잘 보이려는 어떤 미사여구나 행동조차 오가지 않았다.
나로서는 이게 편하지만... 맞선 자리에서 이래도 되는건지 약간의 의문이 들긴 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필로네가 얕은 미소를 띄우며 감사를 표했다.
"정말이지 만족스러운 식사였습니다. 음식을 설명해주시는 모습에서 얼마나 공을 들이셨는지 엿볼 수 있어 더더욱 좋았던 것 같습니다."
"귀한 분을 대접하는데, 이 정도는 기본이겠죠."
"후후. 정말 듣던대로 말씀을 잘 하시는군요."
호로록.
대답을 마친 나는 식후에 나온 차를 마셨다.
그렇게 아무 말도 않고 있자, 필로네가 물었다.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네?"
"제가 왜 공작님께 맞선 신청을 했는지. 말입니다."
…….
한 때 나는 필로네가 아셰리아 여왕의 우군이 되어주지 않을까 기대를 품은 적이 있다. 언뜻 보기에 그녀는 게임 속 아셰리아 여왕과 비슷한 성향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 내 바램은 언제나처럼 배신당했고, 게임 속 필로네 소피아라는 인물이 아셰리아 여왕의 편에 서는 일은 없었다. 그녀와 여왕 사이엔 너무나 큰 차이가 있었으니까.
그런 필로네가 내게 특정한 이해를 기대한다니. 그녀가 무슨 의도로 내게 접근하는지 궁금하지 않았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글쎄요."
"네?"
"방금 영애께서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서로의 이해가 일치하는지 알고 싶다고."
"... 그랬었죠."
"그런 의향이 있으시다면 언젠가 말씀해주시겠지요. 저는 영애께서 추구하고 계시는 이해를 밝히실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상대의 마음을 듣기 위해 필요한 것은 기다림.
인간은 상대방에게 신뢰받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나면 언젠가 마음을 열게 되어있다.
물론 사람에 따라 신뢰를 배신하고 믿어주는 이의 뒷통수를 치는 경우도 있기 마련이지만...
"그렇게까지 말씀해주시다니..."
내가 아는 필로네 소피아는 그럴 인물이 아니다.
"저부터 입장을 명확히 해야겠군요."
자신의 작은 욕망이 오히려 손해를 부를 가능성이 존재함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 이 여자의 성격상 그럴리가 없다.
필로네는 자세를 고쳐앉고 나를 보며 말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소피아 령의 부흥입니다. 하지만 이는 저 혼자서는 이루기 힘든 목표죠."
"그렇기에 저와 함께 해 줄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그 중 공작님이 눈에 보인 것이고요."
소피아 령.
지금으로서는 세 변경백 영지 중 가장 한미한 곳이다.
북방의 테크니 가문은 에퀼리아에 접해 있으며, 기술이나 마법적인 교류를 통해 자신들의 부를 조금씩 축적하고 있다.
서방의 에피스템 가문은 각종 귀금속과 광물의 산지이기에, 채광 기술자를 양성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재력을 확보하고 있다.
게임에서도 필로네는 자신의 영지를 부응시키기 위한 노력을 이어가다 꿈이 더욱 커져버려 쿠데타를 일으키게 된다.
그렇기에 목적 자체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 내 안에 의문은 남아 있다.
"영애께서 원하시는 바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왜 굳이 맞선이라는 형식을 택하신거죠?"
"무릇 사람 사이의 관계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실리를 기반해야만 믿을 수 있습니다."
담담하게.
약간의 진중함을 담아.
필로네는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실례를 무릅쓰고 말씀드리자면... 지금껏 저는 공작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뒤로 어떤 행보를 이어오셨는지 조사했습니다."
"공작님께서 그 끝에 어떤 목표를 가지고 있으신지는 감히 짐작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가지."
"당신은 힘을 축적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리스크가 있더라도 효율적인 길을 추구하고 있으시죠."
저 대답이 그녀가 생각하는 내 이해겠지.
자신의 추론을 모두 펼쳐낸 필로네는... 마른 침을 삼키며 내 확인을 기다리는 듯 했다.
긴장하고 있는건가.
"영애의 말씀이 맞습니다."
"그런가요. 다행이군요."
"하지만 왜 맞선이란 형식을 고르셨는지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 그건 간단합니다. 제가 공작님과의 교섭에 걸 수 있는 것이 달리 없으니까요."
그 순간.
아침에 느꼈던 불안이 내 마음 속에 일어났다.
"그 전에 공작님께 여쭐 것이 있습니다. 공작님의 궁극적인 목적. 그것은 무엇입니까?"
"... 다른 건 아닙니다. 왕실의 안위. 그것 뿐입니다."
이 질문은 굳이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는 곧바로 그녀에게 답했다.
필로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말을 이어갔다.
"그렇군요. 공작님의 답변이 사실이라고 가정한다면 저희 이야기는 진행이 빠르겠군요."
"공작님께서는 모든 혼담을 피하고 계시더군요. 좋은 선택이십니다. 옆자리를 비워두시면 많은 귀족들이 그 자리를 노려올테니까요."
음.
저건 약간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내가 약혼을 하지 않는 것은 상대로 오는 귀족들이 머리가 텅텅 빈 것이 가장 큰 이유다.
거기다...
사실 나는 자신이 없다.
누군가와 함께 행복해질 자신이.
그 검증만큼은 이미 끝낸 지 오래다.
그런 생각이 들었을 즘, 필로네는 고했다.
"시하 공작님의 작위는 분명 임시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방법이 하나 있죠. 저와 혼인하시면 소피아 후작가를 저와 함께 이어받게..."
"그만하시죠."
"... 네?"
왜 불안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 걸까.
내 앞의 이 사람은 언젠가 내가 스스로 걷고 후회한 길을 다시금 권유하고 있다.
내 제지에도 불구하고, 필로네는 예상 밖의 상황에 당황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저희 후작령은 재정적으로 다른 변경백 영지보다 뒤떨어지긴 하지만, 무력이나 정치력만큼은 아직 건재합니다. 저와 혼인만 하셔도 당신이 추구하는 목표에 큰 도움이 될 거에요."
"분명 소피아 령의 힘은 제게 도움이 되겠죠."
"그래요. 거기다 소피아 령의 부흥은 당신의 목표인 왕실의 안위와 양립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이 여자는 게임에서도 이런 식이었다.
감정을 철저히 배제한 채 내리는 합리적 판단.
항상 그것이 행복을 가져오리라 굳게 믿고 있다.
하지만 이 세상은 그렇게 규칙적이지 않다
"그럼 뭐가 문제죠?"
"형식적인 혼인 따위, 원하지 않습니다."
내 단호한 대답에, 플로네는 초조한 듯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라면 이 제안을 받아들일거라 생각한걸까.
... 분명 매력적인 제안이긴 하다.
아직 내 지위는 충분하지 않으니까.
내가 아무리 돈이 많아도 결국 지위가 없으면 이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에 개입할 수 없다.
지금도 가정교사라는 직무에 막혀 테크니 령에 적극적인 조사조차 못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상황에서 소피아 후작가의 권위를 등에 업는다면 내게는 충분한 이득이 된다.
하지만 그 작은 이득에 눈이 멀어 이 제안을 받아들이면 나는 분명 후회할 것이다.
이미 나는 후회했던 사람이니까.
고민을 마친 필로네가 담담하게 말했다.
"형식적인 혼인. 그게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제 몸도 기꺼이 드리겠습니다."
어찌 되었건 그녀의 각오는 내 상상 이상.
어떻게 보면 너무나 그녀다운 모습이었다.
"영애. 왜 그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저희 둘의 수완이라면. 이 나라에서 못할 게 없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게 어떤 가치를 본 것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게임에서 다른 멍청한 귀족들은 실패한 쿠데타를 유일하게 성공시키는 인물이다.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지. 저 정도 자존감은 충분히 가질만한 사람이다.
동시에, 저런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기에 종국에는 파멸을 맞이하는 사람이기도 했지.
나는 작게 쉼호흡을 한 뒤 말했다.
"영애. 아직 일정은 사흘이나 더 남아 있습니다."
"……."
"이 이야기는 추후에 나누도록 하죠. 지금으로선 당신의 제안에 따를 수 없습니다."
"... 알겠습니다."
일단 맞선 자체는 진행해야 하니 말은 이렇게 했지만... 나는 그녀의 제안에 따를 생각이 없다.
결국 내 대답은 정해져 있다.
"추후 맞선 일정은 영애께서 정하기로 되어 있는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공작님께서는 당신의 일정을 따르세요. 저는 그에 참관하는 방식으로 하겠습니다."
"...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내일은 왕실 가정교사로서 수업이 있는 날이군요. 동관의 집사장에게 전해두겠습니다."
식당의 창문 밖을 보니...
이미 밖은 어둠으로 가득한 시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오늘은 시간이 늦었군요. 전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내일 뵙도록 하죠."
그렇게 짧은 작별 인사를 건내고...
나는 곧장 동관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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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왜 제안을 거절한거야?"
"... 너까지 왜 이러냐."
"이번엔 그냥 순수하게 궁금해서 그래. 형님에게는 분명 이득이 되는 제안이잖아."
... 어떻게 보면 헤르만 녀석은 특정 상황에서 정략 결혼을 보내기 위해 준비된 말 신세.
그렇기에 이런 쪽으로는 별 생각이 없나 보다.
"사람 마음은 알 수 없는 법이거든."
"음?"
"그냥 그런거야. 너도 특히나 조심해."
"하아...?"
감을 못 잡고 있는 헤르만.
그럴만도 하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를 일이니까.
그렇게 헤르만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걷다보니 어느새 왕궁 중앙 정원을 지나는 중.
"저런 형태로 시작하는 인연은 여러모로... 아."
"안녕하세요. 선생님."
"공주님. 이 밤에 어쩐 일로..."
내 앞에 아셰리아 공주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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