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왕실의 가정교사-102화 (102/215)

〈 102화 〉 2­66. 피하기만 해서는 알 수 없다.

* * *

2­66. 피하기만 해서는 알 수 없다.

"공주님. 이 밤에 어쩐 일로..."

아셰리아 공주의 뒷편에는 아샤도 있었다.

오늘은 공주님의 생일 파티였었지...

파티는 방금 끝난 모양인지, 어둠이 깔린 밤인데도 화려한 드레스를 그대로 입고 있다.

"맞선은 어떻게 되셨나요?"

…….

굳게 다문 입술.

경직된 얼굴 근육.

힘이 들어간 양 주먹.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공주는 내 맞선을 긍정적으로 생각했었지.

그런 그녀가 긴장을 하고 있다라.

나로서는 마냥 좋지 않은 말을 할 순 없었다.

"음. 아직 끝난 건 아니라서 잘 모르겠네요. 일단 후작 영애와는 내일도 뵙기로 했습니다."

어린 아이를 속일 수는 없는 노릇.

거짓말이 되지 않는 선에서 적당하게 답했다.

아직 맞선 일정이 끝난 것도 아니고, 필로네와는 내일 보기로 한 것도 사실이지 않은가.

이에 공주는 내 얼굴을 뚫어져라 보다가...

"그런가요..."

내가 잘못된 답변을 하기라도 한 걸까.

내 앞의 소녀는 고개를 숙이며, 한 층 더 풀이 죽은 목소리로 답했다.

이대로 맞선 이야기를 계속 하는 건 나에게도 아셰리아 공주에게도 좋지 않은 일로 느껴져 화제를 전환하기로 했다.

"오늘 생신 파티는 어떠셨나요?"

"……."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던 건 아니죠...?"

"그런 건 아닙니다."

내 걱정에 단호히 답하는 아셰리아.

파티에서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면 왜 이러는걸까.

정말 난처하네...

내가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고 있자, 아셰리아 공주가 마지못해 말했다.

"파티는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귀족들의 인사도 잘 받아내었고, 유나 언니께서 많이 도와주셨기에 큰 사고 없이 진행되었습니다."

"정말 다행이네요. 다시한번 생일 축하드립니다. 이제 정식으로 12살이 되셨네요."

"... 네."

분명 즐거운 날이어야 할텐데.

영 그러지 못한 모습이다.

그렇다고 원인을 아는 것도 아니니 내가 무언가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 때 헤르만이 말했다.

"근데 형님. 벌써 시간이 열 시야. 저택에 가면 열한 시는 될 거라고."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된거야?"

... 혹시나 공주는 피곤한 게 아닐까.

어제도 아셰리아 공주의 생일을 축하하자며 우리만의 파티를 했었지. 그 피로가 덜 풀린 채로 파티를 치룬 지금이라면 피곤할 만도 하다.

"공주님. 시간이 많이 늦었네요. 내일은 수업도 있으니 이만 쉬시는 게 어떠신가요?"

내 제안에 아셰리아 공주는 고개를 떨구었고, 두 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꾹 쥐었다.

그 모습이 안쓰럽다.

무엇이 이 아이를 이렇게 괴롭게 하는걸까.

알 수만 있었다면 어떻게든 도와줄텐데...

괜한 넘겨짚기는 더 큰 상처를 줄 수도 있음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함부로 물을 수는 없다.

이내 작은 공주님은 다시금 고개를 들고 내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내일 수업에서 뵙겠습니다."

"네. 공주님도 내일 뵈요."

아셰리아 공주는 후궁의 방향으로.

나는 왕궁의 정문 방향으로.

짧은 작별을 주고받은 우리는 서로 갈 길을 향했다.

"헤르만. 공주님께서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신걸까."

"... 형님이 모르면 내가 어떻게 알아."

"그런가."

정말이지...

필로네 소피아에 이어 아셰리아 공주님까지.

오늘은 여러모로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날이다.

이 세상에 다른 사람의 속마음을 속속들이 파악할 수 있는 마법은 없는걸까...

* * *

(필로네 소피아 시점)

자신의 학생들... 왕족들과 고위 귀족 자제들 앞에 선 이시하 공작이 수업 내용을 예고한다.

"저번 시간까지는 에퀼리아의 헌법과 그에 따른 사회적인 인식을 배웠었죠. 오늘부터는 다른 나라로 넘어가봅시다. 헬렌 교국입니다."

저 사람이라면 내 제안을 받아들일 줄 알았다.

자신을 향한 평판을 높이고 힘을 축적하는 것.

왕실 가정교사 이시하는 그 목표를 위해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그런 의향이 있으시다면 언젠가 말씀해주시겠지요. 저는 영애께서 추구하고 계시는 이해를 밝히실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어제 만찬이 끝나고 그가 했던 말조차, 나에게는 불필요한 말을 삼가는 것으로 들려왔다.

쓸모없는 수식은 올바른 판단을 방해할 뿐. 그 역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건 아닐까.

사고가 거기까지 흘러가버린 나는 그에게 내 속내를 모두 드러내는 실수를 해버렸다.

감정에 휩쓸리지 않기로 결심했었던 내가... 비슷한 사람을 만났다고 들떠버린 것이다.

"헬렌 교국에는 왕이 없습니다. 헬레니아 교의 수장인 교황이 모든 결정을 전담하며, 그가 이끄는 교황청이 모든 행정을 전담합니다."

"산하 기관으로는 일반 성직자들의 모임이라 볼 수 있는 주교회가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합니다. 그 외에는 성당 기사단과 성녀회가 있죠."

그는 도대체 왜 내 제안을 거절한걸까.

정치적인 이유나 가문간의 관계를 위해 혼인을 하는 것 따위, 흔한 일이지 않은가.

'형식적인 혼인이 싫다'라니... 어딘가의 철부지 영애들이나 입에 올릴법한 말이다.

정말 그런 이유로 내 제안을 거절한 것이라면 내 눈에 단단히 잘못되었던 것이다.

"자. 여기서 질문입니다. 저는 항상 각국의 역사를 가르치면서 건국 이념을 강조해왔어요. 그렇다면 헬렌 교국이 추구하는 가치는 무엇일까요?"

…….

그저 우연의 일치인걸까.

그게 아니면 의도적으로 이 수업을 준비한걸까.

그의 물음에 알렉산더 왕자가 답했다.

"헬렌 교국은 초대 교황이 초대 성녀의 행적과 언행을 모아 책으로 엮어, 그를 성서로 만들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그 성서에서 헬렌 교국의 지도층이 가장 중시하는 구절이 무엇일까요?"

"음..."

약간의 고민에 빠지는 알렉산더 왕자.

하긴, 너무나 뻔하고 유명한 문장이다 보니... 교국의 인간들이 오히려 그 문장을 가장 중시한다는 사실은 모르는 이가 많다.

공작은 슥­ 하고 교실을 한 번 훑어보더니...

내 옆에 서있는 덩치 큰 남자에게 물었다.

"아모스. 뭔가 아는 기색인데. 너가 답해 볼래?"

"예? 그래도 되는거요?"

"당연하지. 내가 물어본건데."

"... 모든 인간을 사랑하라. 성당에 봉사하러 갈 때마다 대주교님께서 가르쳐주셨소. 헬레니아 성서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문구라 하셨지."

"모범적인 답안이야. 잘 했어."

시조님의 반려를 욕하는 꼴이라 대놓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나는 헬렌 교국의 교리를 싫어한다.

모든 인간을 사랑하라니.

그 얼빠진 소리가 인간의 멍청함을 한 층 더한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한 말이다.

재학 중일 때도 그쪽 인간들이 얼마나 멍청했었는지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었으니까.

"방금 아모스가 답했듯이 헬렌 교국은 사랑을 중시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해석하는 방법도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죠. 이는 교황청 산하 기관 두 곳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음... 성당 기사단은 군부니, 나머지 두 단체인 주교회와 성녀회인가요?"

"맞습니다. 기디언."

프라시스 가문의 조카에게 답을 들은 공작은 칠판에 이리저리 표를 그리기 시작했다.

주교회 ­ 교서 만능 주의.

사랑에 대한 교리로서의 합의.

사랑에는 목적이 있다.

성녀회 ­ 사랑의 실천.

사랑에 대한 개개인의 고찰 중시.

사랑은 그 자체로 존귀하다.

"주교회는 사랑을 통해 세상을 밝힐 것을 주장합니다. 거대한 목적을 위한 수단. 그 중 가장 중요한 게 사랑이라는거죠."

"그들은 초대 교황이 성녀의 행적에 대해 기록하고 해석을 덧붙인 교서를 신봉합니다."

"하지만 성녀회는 선출된 성녀 개개인이 사랑 그 자체를 고찰하며, 그들이 각자 자신의 사랑을 실천하려고 노력합니다."

"여러분에게 어느 쪽이 훨씬 그럴듯한가요?"

그의 물음에 학생들은 고민에 빠졌다.

나로서는 사랑 자체가 한심한 것이라 생각하지만... 일단은 주교회의 손을 들어줄 것 같다.

사랑에 대해 고민해보았자 얻을 게 없다. 적당히 수단 정도로만 보지 않는다면 분명 불행해진다. 멍청한 그 사람을 보고 배우지 않았던가.

거기다 주교 출신들은 그나마 말이 통했지만, 성녀회 출신 멍청이들은 전혀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것만 생각해봐도 쉽게 결정할 수 있다.

내 생각이 이쯤 이르렀을 때, 은발의 공주 ­ 왠지 내 눈치를 슬쩍슬쩍 보는 것 같은 ­ 아셰리아 에우데미아가 말했다.

"선생님. 무언가 이상합니다."

"어떤 점이 이상한가요?"

"선생님께서는 감정을 감히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없다고 하셨어요. 사랑 역시 마찬가지이지 않을까요?"

저 인간이 그런 말을 했다고...?

저 사람이 그런 감상적인 말을 했다니...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다.

건국제 연회만 생각해봐도 그렇다.

저 사람은 시종일관 모든 귀족 영애에게 똑같은 미소를 지으며 대하고 있었다.

상대에게 호감을 표하는 미소가 아닌 원활한 관계와 최소한의 예의를 위해 만든 미소.

그 날 보았던 그 미소가 아니었다면, 이시하 공작에게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 그 표정은 나와 똑같은 것이었으니까.

"선생님. 저는 주교회의 논지는 오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다른 모든 이의 감정을 한 문장으로 정의하는 건가요. 차라리 성녀회의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해요."

"좋은 의견입니다. 주교회의 논지를 깊게 파고들어야 제대로 알 수 있겠지만, 확실히 그런 감이 있죠."

공작은 공주에게 답하고 수업을 이어갔다.

"그 증거로 헬렌 교국의 성직자들의 주요 심상은 사랑이지만 성녀들만큼은 각자 다른 심상 마법을 사용해요.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분명 사랑의 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왕 이야기가 여기까지 흘렀으니... 오늘은 성녀회의 여러 해석에 대해 공부해보기로 하죠. 주교회의 교리 해석은 다음 수업에서 다루겠습니다. 다들 이걸로 괜찮나요?"

…….

나도 모르는 사이 한 손이 올라가있었다.

"필로네님. 왜 그러시나요?"

"결국 지금 헬렌 교국을 이끄는 것은 주교회입니다. 성녀회는 이미 30년 전에 힘을 잃었지 않습니까."

"그렇죠."

"그런데 왜 성녀회를 굳이 다루시는건가요? 30년 전 그 사건을 모를 리 없으실거라 생각합니다만."

공작은 내 물음에 잠시간 고민하며, 눈으로 교실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학생들의 기색을 살피는 듯 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한 이름을 또박또박 천천히 말해냈다.

"최악의 성녀. 일리아드 헬레니아."

"30년 전 교수대에 오른 그녀는 수많은 이들을 홀려 한 주교구를 궤멸 수준으로 몰고갔죠."

"필로네님.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게 되어 죄송합니다만... 그런 사람이 왜 탄생한걸까요."

왜 탄생했냐니.

이딴 질문따위, 답은 이미 정해져있다.

"감정 그 자체를 존귀하다 생각하다니요. 인간이 한낱 감정에 매몰되었으니, 그런 참사가 일어난 게 아니겠습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네?"

그의 대답은 너무나 빨랐다.

내가 이런 대답을 할 것을 알았다는 듯이.

"인간은 감정을 소중히 생각하고, 그에 대한 고찰을 멈추지 않아야만 그에 매몰당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의 표정은 그저 담담하기만 하다.

"또한 감정은 알기 위해서는 마주해야 하죠."

마치...

내 삶을 품평하는 듯이.

내 생애에 판결을 내리는 것처럼.

"피하기만 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는 마지막 말을 고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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