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왕실의 가정교사-103화 (103/215)

〈 103화 〉 2­67. 음식은 됐습니다.

* * *

2­67. 음식은 됐습니다.

공작의 수업이 마친 직후

나는 동관에 배정된 내 방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내 머릿속의 의문은 떠나가지 않는다.

"도대체 왜 그런 말을 했던 걸까..."

감정을 피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그것과 마주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

"... 주제 넘는 말을."

그 인간이 내 삶에 대해 무엇을 안단 말인가.

알고 있다 해도 그 여자의 소문 뿐이겠지.

그 여자는 우리 가문에 있어 수치일 뿐이다.

한낱 사랑이란 감정에 눈이 멀어 자신의 보장된 행복을 내팽개친 사람이다.

거기다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다.

왜 그런 생각없는 여자를 사랑했던 것인가. 왜 감정에 매몰되어 우를 범한 것인가.

그 일로 깨달았다. 사랑이란 쓸모없는 것이며, 다른 수많은 감정 또한 마찬가지다.

그것들은 인간에게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

내가 살아온 삶도 이 명제의 증거이며, 지난 역사 속 수많은 사례들도 이를 뒷받침해준다.

그러니 나는 올바른 삶을 살아온 것이다.

언제나 충분한 근거를 찾았고, 합당한 이유를 찾아가며 세상을 이성적으로 살아왔다.

분명 그럴 것이다.

…….

분명 그럴 것인데...

나는 오늘 왜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을까.

"아가씨.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 그런 것 같아?"

"입기 싫어하시는 드레스를 입으신 채로 침대에 뛰어드셨으니, 당연히 그리 보이죠."

그러고 보니... 나는 시종일관 불편하기만 한 옷차림 그대로 누워 있었다.

침대에서 일어난 나는 시녀장의 도움을 받아 편한 옷으로 환복하기 시작했다.

"만남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으신겁니까?"

"... 응."

"그렇군요."

내 대답에도...

시녀장은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할 뿐이었다.

시녀장은 가끔 이런 식이다.

"시녀장."

"네?"

"왜 더 물어보지 않는거야?"

시녀장은 평소 나에게 잔소리만 늘어놓는 사람이지만... 가끔씩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때가 있다.

마치 지금처럼.

평소에는 별 생각없이 받아들인 일이지만, 오늘따라 의문이 생긴다.

"무슨 뜻인가요?"

"평소에는... 이런저런 소리를 늘어놓잖아."

시녀장은 옷을 갈아입혀주던 손을 멈추더니, 잠시간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얕은 한숨을 쉬고 말했다.

"아가씨께서는 표정이나 태도에서 다 드러나니까요."

"무슨 뜻이야?"

"지금은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조금은 우울해요. 그럴때마다 자책하고 계신다는 걸 뻔히 알고 있으니 따로 말씀드리지 않는거죠. 거기다. 어가씨께서는 평소 엄청나게 노력하고 계시잖아요."

"……."

"자. 옷부터 갈아입고 쉬세요."

시녀장은 다시금 손을 분주히 움직이며 나를 실내복으로 갈아입히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의 손짓에 맞추어 팔을 벌리고 옷을 잡아당길 뿐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내 감정이... 그렇게 잘 드러나?"

"... 다른 분들 앞에서는 확실히 태연하시죠. 하지만 제가 누구인가요."

제가 아가씨 기저귀도 갈던 사람입니다.

그런 부끄러운 과거까지 말하는 시녀장.

그녀는 말을 이어갔다.

"저는 항상 아가씨 편이고, 항상 아가씨를 보고 있었습니다. 척 보면 척이죠."

"... 왜 그렇게까지 하는거야?"

"당연히 아가씨가 소중하니까요."

"……."

시녀장의 즉답.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제가 잔소리를 늘어놓는 건 아가씨께서 소홀히 하시는 일에 국한된 겁니다. 이런저런 소리라니요. 약간은 서운합니다?"

약간은 연극을 하는 말투로.

시녀장은 잠시동안 멍해져서 말문이 막힌 나에게 푸념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마지막에 말했다.

"아가씨께서 고민해도 답이 안나오는 일이라면 저에게 말씀해주세요. 큰 힘은 되어드리지 못하지만... 듣는 것 정도는 해드릴게요."

* * *

(시하 시점)

수업을 마치자 필로네는 일정을 진행하기엔 피곤하다며 숙소로 돌아가버렸다.

아마 내 말에 적잖이 당황했을터다.

게임 속 필로네 소피아의 행보를 다시금 떠올려보니, 그녀가 어떤 식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가 추론할 수 있었다.

그녀는 평생토록 감정을 저주하는 인물.

내가 감히 타인을 공감할 순 없지만, 그 심정을 이해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다.

어린 시절의 나 역시 온 세상의 감정에 증오를 품고 살아가던 때가 있었으니까.

그녀는 아마 나를... 한없이 이성적일 수 있는 사람으로 보았던 게 아닐까.

물론 그 생각에 이른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녀에게 무엇이 보였는지 모르니까.

하지만 적어도, 어제 그녀의 모습에서 어린 시절의 나를 떠올릴 수 있었다.

어린 시절 게임 속 '아셰리아 여왕'의 삶에 홀려 그녀를 동경하던 내 모습을.

물론 그녀가 나를 동경했다고 말하는 것은 약간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과의 동반을 원하다는 게 올바른 표현이겠지.

하지만 어느 방향이던 그녀의 안목이 매우 유감스럽다는 것은 변치 않는다.

애초에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

오히려 나는 감정을 무서워하는 사람이지, 그녀의 이상형은 절대 아니다.

"선생님."

"네?"

"그게..."

잡념에 빠진 채로 수업의 뒷정리를 하고 있자, 공주님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손을 모으고 꼼지락꼼지락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다.

"알고 계십니까?"

"네?"

"소피아 령은 산과 임야가 많아 주요 산업도 그에 최적화되어 있습니다."

"음... 그렇죠. 제가 알기로 허브 재배나 낙농업, 양봉도 활발하구요."

갑자기 왜 이런 말을 하는걸까.

그나저나 허브, 낙농업, 그리고 양봉이라...

소피아 령에서 꿀을 싸게 얻어 제빵에 쓰면 미샤 베이커리가 더 흥하지 않을까.

그렇게 사업을 확장시켜 다른 거리까지 분점을 내게 되면 나도 은퇴 수익이...

당장은 내 수익이 안정적이지만, 나중을 생각하는 건 분명 바람직한 일이다.

사대 가문도 각자의 사업이 있는 판에, 나도 하나쯤은 가져봄직하지 않은가.

"선생님께서 소피아 령에 가게 되시면 고된 일을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오... 농가 체험인가요. 그런 것도 참 재밌죠."

대학 생활 도중에는 농활도 많이 갔었지.

과가 여초인데다 어머니와 단 둘이 살다보니 군대는 가지 않았어도... 과 행사는 꾸준히 참여했었다.

땀 흘려 밭일을 하고 수확을 하는 것.

말로 표현만 해도 꽤나 좋은 느낌이다.

그나저나 아셰리아 공주는 왜 소피아 령의 산업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까.

방금 교실에 필로네가 와서 그런가?

"공주님. 갑자기 이런 이야기는 왜..."

"……."

"공주님?"

"아닙니다."

아셰리아 공주의 미간이 좁아졌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의 반응.

원래 있던 세계에서는 한량한 일반 시민일 뿐이었던 내가, 왕족인 아셰리아 공주의 감성에 맞지 않는 대답을 해버렸나 보다.

하긴 아무리 어려도 일국의 공주님인데 농촌 체험이라니. 거기다 이 세상의 중심인 에우데미아의 1왕녀이지 않은가.

그나마 사제 관계에 있기에 말이 어느정도 통하는거지, 아직 대학생 감각을 전부 버리지 못한 나로서는 격의 차이가 존재한다.

그나저나 어떻게 해야하나... 공주는 어제 밤부터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인다.

고민을 하고 있을 때 공주가 말했다.

"선생님."

"네?"

"소피아 령은 혜세국과 그 경계를 맞대고 있습니다."

"그렇죠."

그야 변경백의 영지니까.

한때는 에우데미아의 제후국 취급을 받던 소피아 령이다.

에우데미아 왕국의 중앙 집권화가 진행되면서 후작령으로 통합되었지만, 그렇다고 국경이 변하진 않았다.

소피아 령과 혜세국의 사이를 청룡 산맥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선생님께서 소피아 령에 체류하고 계시다가 전쟁이라도 벌어진다면, 그 여파에 휘말리실 수도 있습니다."

"그렇긴 하죠. 하지만 오히려 그 편이 낫지 않을까요?"

"네?"

전쟁이라.

에우데미아 왕국과 혜세국 사이에 전쟁이 벌어질 가능성은... 유나의 존재가 들킬 정도의 대사건이 일어나지만 않는다면 없다.

그래도 아셰리아 공주가 전쟁을 걱정한다니. 나는 그녀가 안심할 수 있도록 말했다.

"소피아 령은 방위전에 특히 뛰어난 곳이잖아요. 제가 거기서 군대를 전부 막아내서 공주님께는 개미 한마리도 얼씬 못하게 해드릴게요. 전쟁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

실제 에우데미아의 방위 플랜 중 하나기도 하다.

혜세국이 대규모 침공을 해올 경우 소피아 령이 시간을 벌고, 중앙에서 소집된 비상군이 청룡 산맥으로 전진하는 것.

소피아 령은 이런 말도 안되는 작전을 가능케 할 정도로 뛰어난 전투의 요충지이다.

그런데 이걸 공주가 모를리가 없을텐데.

무언가 걱정되는 일이라도 있는걸까.

"그리고 공주님. 전쟁은 국왕님과 왕비님께서 계신 한 절대 일어나지 않아요."

".... 그렇겠죠."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히려 밝은 면을 생각해보자구요."

"……."

다른 곳으로 이야기를 돌리자.

소피아 령...

혜세국이라...

아.

이거면 공주도 좋아하지 않을까.

"공주님. 혜세국의 음식 문화는 제가 살던 세계와 비슷한 편입니다."

"... 그런가요."

"네. 만약 소피아 령에 요청해서 혜세국에서 생산되는 식재와 양념을 수입하도록 하면... 공주님께 제 세계의 음식을 대접해드릴 수도 있겠네요."

알렉산더가 저택에 찾아올 때 가끔 아셰리아 공주도 동행하는 경우가 있다.

찰기가 가득한 쌀.

간장, 된장, 고추장을 비롯한 수많은 장.

그런 걸 혜세국에서 수입하면 사아씨가 혜세국 요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다 내가 고향요리를 직접 하게 되면 두 가지 요리를 대접하는 셈이지.

표류자 가정 교사인 내 음식을 먹게 되면 아셰리아 공주님께서는 대만족.

오랜만에 먹는 요리에 유나 역시 만족. 유나의 고향 요리에 알렉산더도 만족.

본실력을 발휘해 혜세국 요리를 그토록 만들고 싶어하던 사아씨 역시 만족.

아아... 모두가 행복한 세상의 완성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공주님을 돌아보니...

내 기대와는 다르게 공주님의 표정은 어두웠다.

"공주님...?"

쭉 튀어나온 입.

푹 숙여버린 고개.

드리운 머리칼이 낯빛을 어둡게 한다.

그 상태로 공주님은 말했다.

"음식은. 됐습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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