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화 〉 268.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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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8. 해주세요.
오늘 일정을 필로네... 소피아 후작 영애에게 전하자, 그녀는 나에게 동행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녀가 내게 기대한 모습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준 셈이었는데, 생각보다 회복이 빠르구나 싶다.
어제의 반응을 생각하면 하루정도 고민하다 영지로 돌아가버리거나, 맞선 일정만 대충 채운 뒤 끝낼 것이라 생각했었으니까.
"그래서. 이 베이커리가 공작님께서 후원하시는 사업장인거죠?"
"그렇습니다."
"생각보다 아담하군요..."
"이곳에서 이름을 알린 뒤에는 왕도 각 거리에 진출시킬 예정입니다."
"그렇군요."
오늘 일정은 미샤 베이커리.
내 옆에서 수행원 자격으로 따라온 아일라가 말을 걸어왔다.
"공작님. 아모스와 아이들을 불러올까요?"
"아냐. 그 녀석들도 시킨 일을 하고 있겠지. 일단 들어가서 우리 일이나 하자."
"알겠습니다."
사실 녀석들의 동태를 확인하기 위해 온 것도 이유 중 하나긴 하지만...
미샤 베이커리의 현 상황을 확인하고 주인장에게 아카데미 거리의 분위기를 전해듣기 위해 온 것이다.
내가 앞장서서 Closed 푯말이 걸린 빵집 안으로 들어서자, 빵집의 부녀가 나를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어서오십시오... 아! 공작님. 안녕하십니까!"
"공작 아저씨, 아일라 언니 안녕! 오늘은 왠 이쁜 언니가 한 분 더 왔네!"
"안녕하세요. 안녕 미샤."
... 아저씨 소리 안 듣는 건 포기한 지 오래다.
언젠가부터 주인장 역시 포기한 상황.
그런데 왜 필로네는 언니 소리를 듣는걸까. 나와 나이차이가 있어도 두셋밖에 나지 않을텐데...
나는 주인장에게 물었다.
"오늘 오전 장사는 어떠셨나요?"
"하하!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요. 그런데 거기 숙녀분은..."
"소피아 후작 영애이십니다. 현장을 보고 싶다 하여 따라오셨어요."
"소피아 령... 변경백... 후작 영애... 높으신... 분이시군요..."
내 소개에 필로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자, 주인장은 부담감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그런 그에게 필로네가 말했다.
"부담가지지 않으셔도 됩니다. 공작님께서 후원하시는 곳의 점주라면 존중받아 마땅하니까요. 저는 적당한 자리에 앉아 지켜보도록 하겠습니다."
"배려 감사합니다. 어서 마실 것을 내오도록 하겠습니다!"
부담가지지 말라고 하면 더 부담을 갖기 마련. 주인장은 쏜살같이 달려가 차를 준비했다.
... 이곳의 주인장이야말로 나와 엮이게 되면서 가장 큰 고생을 하는 사람 중 하나가 아닐까.
각국의 귀하신 분들의 자제들이 주요 고객층인 아카데미 거리에 와서 사대 귀족과 왕족까지 상대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만큼 벌이도 몇 배로 뛰었겠지만, 마음 고생 역시 몇 배로 뛰었으니 힘들어야 정상이다.
나는 주인장이 약간이라도 마음의 짐을 덜길 바라며 필로네를 창가 좌석으로 안내했다.
"영애. 이곳에 앉으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의자를 빼주자 정돈된 자세로 앉는 필로네.
나는 그녀의 맞은 편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공작님께서는 이곳에 무슨 일을 하러 오신거죠?"
"음. 메뉴 개발...? 정도죠."
"... 다른 귀족들과는 많이 다르시네요. 대부분의 후원이라면 금전만 제공하고 일절 간섭하지 않는 편이니까요."
"하하... 후원하게 된 계기가 남달라서 말입니다."
"……."
나는 한때 이곳의 부녀를 아모스의 감정을 부추기는 도구로 이용했다. 당사자인 그들은 모르고 있지만, 그 사실만큼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그 보상으로 이렇게 돕고 있긴 하지만, 결국 이 역시 내 죄책감을 가라앉히기 위한 수단일 뿐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렇게 잠시간의 침묵이 흐르고... 주인장이 차를 내어왔다.
"차를 우려내는 재주가 없어서...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영애. 저는 주방에 들어가 살필 게 있어서... 실례지만 잠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저는 애시당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러 온 것이니까요. 괜찮습니다."
그 후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분명 Closed 푯말이 걸려 있었던 문에서 얕은 종소리가 들려왔다.
"지금은 영업 준비 시간... 억?"
그런데 주인장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내 자리에서는 손님이 누군지 보이지 않아 조금 자리를 옮기자... 그곳에는 아셰리아 공주님이 계셨다.
공주님과 비슷한 차분한 분위기를 내는 귀족 소녀와 아샤를 대동한 채였다.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인사를 건냈다.
"음... 안녕하세요?"
"우.연.히. 여기서 뵙게 되었네요, 선생님."
어제는... '음식은. 됐습니다.' 라는 중압감이 느껴지는 말을 또박또박 남긴 뒤 자신의 방으로 사라진 그녀였다.
무언가 내가 잘못 말한 것이라도 있던 걸까. 그런 걱정을 하며 인사를 건넸지만 공주의 태도는 평소와 같았다.
"어쩐 일로 이곳에..."
"... 이쪽은 제가 이번 생일 파티에서 새로이 사귀게 된 아르멜님이십니다."
공주의 소개에 귀족 소녀가 답했다.
"안녕하세요오... 라리사 자작령의 차녀. 아르멜 라리사라고 합니다. 소문으로만 듣던 공작님을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아아..."
"아르멜님께서 아카데미 거리의 명물, 미샤 베이커리에 들리고 싶다 하셔서 안내차 찾아뵙게 되었어요."
약간은 낯이 익다 했더니... 일전 보았던 아네모네 라리사의 여동생이었다.
라리사 자작가의 장남이 파문된 직후 아네모네와 함께 영지를 다스리는 인물이다.
그나저나..
게임 속 역사대로라면 아샤 외에는 곁에 두는 이가 없었던 공주였다. 아니, 그 누구도 그녀에게 가까이 갈 수 없었다는 게 올바른 설명이겠지.
그랬던 그녀에게 친구가 생기다니! 의외라는 생각과 함께 약간의 안도감 비슷한 것이 느껴졌다.
그런 와중 주인장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오전 영업이 방금 끝나서 대접할만한 것이 없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공작님?"
베이커리 내부에 남은 음식이 전혀 없었다.
아침 영업이 막 종료한 상태이다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공주님에게 말했다.
"그럼 적당한 자리에서 기다려주실래요? 제가 주인장과 함께 적당한 음식을 내오겠습니다."
"... 알겠습니다."
"아르멜이라고 하셨었죠?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아... 네!"
* * *
"아... 안녕하세요 필로네님!"
"안녕하세요, 아르멜. 정말 오랜만이네요. 옆에 계신 분은..."
"엊그제 생일을 맞이하신 아셰리아 공주님이십니다! 공주님, 여기 계신 이 분은 소피아 후작 영애이신 필로네님이셔요."
아, 이 아이가...
필로네는 그런 생각을 하며 아르멜로부터 소개받은 뒤 예를 갖춰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소피아 후작령의 장녀. 필로네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아무리 소개를 받았다 한들, 아무리 왕족이라 한들. 인사를 받았다면 그에 대한 메아리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하지만 돌아오는 말은 극히 적었다.
필로네는 자연스레 공주에 대한 소문을 떠올리고... 역시나, 라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감정마저 얼어붙은 얼음공주. 그 소문에 들어맞는 반응이었기 때문이다.
공주는 인사에 이어 말을 이어갔다.
"... 아르멜님. 서로 구면이시라면 소피아 후작 영애님과 동석하는 게 어떨까요."
"아... 필로네님.합석해도 괜찮을까요?"
아셰리아 공주는 싸늘한 시선으로 필로네를 바라보며 합석을 제안했다.
필로네로서는 예상 외의 일이었다.
자신과 할 이야기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고, 호의적인 분위기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절할 명분이 있는 것도 아니었던 필로네는 제안에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네, 그럼요. 두 분 모두 앉으세요."
네 개의 좌석이 놓여있는 테이블.
이 자리에서 가장 높은 이는 아셰리아였기에 그녀가 한 편을 차지하게 되었고, 필로네와 아르멜이 한 편에 함께 앉게 되었다.
이후...
종종 아르멜이 두 사람 간에 말를 붙여보려 했으나, 결국 그들은 시하가 나타날 때까지 이렇다할 대화는 전혀 나누지 않았다.
형식적인 질문.
형식적인 답변.
오직 그 뿐이었다.
* * *
시하가 기다란 바게트 빵에 간단히 재료를 얹어 피자빵 비스무리한 것을 만들어 나오자, 그곳에는 오직 고요함만이 멤돌고 있었다.
그리고 고요함에도 존재감이 있는 것일까.
자연스레 시하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영 어색해보이는 조합... 아르멜 라리사, 필로네 소피아, 거기다 아셰리아 공주님까지. 세 사람이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아샤는 공주의 뒷편에서 침묵을 지키는 중.
... 왜 저런 분위기지.
시하는 조심스레 쟁반을 들고 나아갔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최대한 빨리 내어올 수 있는 걸로 준비했는데,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네요."
""…….""
"감사합니다아아..."
두 사람은 침묵.
아르멜만이 감사를 표했다.
... 왜 이러는거야?
잠시 그런 의문은 접어두고, 시하는 빵이 놓여있는 쟁반을 테이블 중앙에 둔 뒤 남아있는 자리인 아셰리아 공주의 옆에 착석. 테이블 한 켠에 놓인 앞접시를 하나씩 꺼내 이 피자빵을 적당한 크기로 나누었다.
딱딱해서 맛없는 부분은 자신에게.
비교적 촉촉한 안쪽은 세 사람에게.
분배를 마친 시하는 말했다.
"다음 주부터 팔게 될 신메뉴입니다만, 세 분께 처음으로 대접하게 되었네요."
"설마. 공작님께서 직접 만드신 건가요?"
"네. 제가 원래 살던 곳에 있던 요리랍니다."
"와아!"
꼬박꼬박 대답을 해주는 아르멜에게 감사를 느끼는 시하.
하지만 두 사람은 아직 침묵이었다.
이 자리에서 가장 높은 이는 왕족인 아셰리아.
그녀가 이 음식에 손을 대지 않는다면 나머지 세 사람 역시 쉬이 움직일 수 없다.
이 상황에서 시하가 조심스레 물었다.
"공주님...?"
"네."
"한 번 드셔보시겠어요?"
빵을 멍하니 보고 있던 아셰리아는...
시하를 바라보며 자신의 왼손을 들었다.
그 손목에는 하얀 면이 덧대어져 있었다.
"엊그제 생일 파티 도중 손목에 염좌가 생긴 것 같습니다."
"아프진 않으신가요? 어디 한 번..."
시하는 걱정을 표하며 손을 뻗었지만...
아셰리아 공주는 자신의 손을 치워버렸다.
"조금만 닿아도 약간 아파서요. 나이프를 제대로 다룰 수 없겠네요. 소중한 음식을 두고... 죄송합니다."
"아뇨. 아프시면 무리하지마세요. 그나저나 어떻게 해야하지..."
아샤에게 식사 시중을 맡겨야 하나?
시하가 그런 생각을 하는 그 순간.
아셰리아 공주는...
"선생님."
"네?"
"선생님께서 조금씩 썰어서 먹여주시면 안될까요?"
선생님의 학생으로서.
시하를 따르는 아이로서.
곁에 있어준다는 약속을 받아낸 이로서.
"부탁드립니다."
"해주세요."
그의 맞선에 훼방을 놓을 최선의 수를 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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