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화 〉 269. 각자의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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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9. 각자의 행복
예상치 못한 아셰리아 공주의 요구.
그에 시하는 최대한 미소를 유지했다.
'자리가 넷 뿐인데다 간격도 그다지 여유로운 편이 아니라서 그러는건가?'
우연히 자신이 제일 마지막으로 자리에 합류하게 되어 정해진 배치였다.
아르멜 라리사가 아셰리아의 옆에 앉았다면 그녀에게 부탁하지 않았을까.
어리긴 해도... 사리분별이나 타인을 배려하는 감수성은 뛰어난 공주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시하는 말했다.
"자리 배치가 이렇게 되었으니 어쩔 수 없겠네요. 아셰리아 공주님은 제가 보살필테니 여러분도 어서 드세요."
"네, 감사합니다!"
"흐음..."
아르멜은 별 다른 생각 없이 승낙했지만... 필로네에게는 이상한 상황이다.
자신에게 표정의 변화조차 없이 쌀쌀맞게 대하고 있던 아셰리아 공주였다.
그랬던 공주가 '먹여달라'는 낯부끄러운 부탁을 한다니... 이는 쉬이 납득할 수 없는 광경이다.
단순히 생각하면 그 '얼음공주'가 타인에게 얼굴을 붉히며 부탁했다는 사실에 어이가 없었고, 나아가서 생각해보면 약간 부아가 치미는 부분도 있다.
'얼굴에 약간의 홍조가 떠오른 채로 공작의 손길을 피했던 공주'는 지금, 자신이 있는 방향을 흘깃 쳐다보고 있으니까.
사교계에 갓 데뷔하게 된 왕녀라 해도, 그 모습은 마치 자신의 행동이 의미하는 바를 명확히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애써 자신의 감정을 외면하려는 필로네지만, 그녀 역시 한 사람 인간이다. 이런 상황에서 고민과 함께 화가 치미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고민하고 있는 필로네에게 시하가 말했다.
"필로네. 식기 전에 드셔야 맛있습니다. 어디 불편하신 곳이라도 있으신가요?"
"아... 그런건 아닙니다."
"약간 맛이 강할 수도 있습니다. 에퀼리아 풍에 가까운 요리니까요."
맞선 상대라는 시하는 자신에게 몇마디 말을 건낸 후, 별 거리낌도 없이 아셰리아 공주를 대신하여 빵을 썰고 있다.
그 모습을 보던 필로네는... 감히 정의하지 못할 감정을 맛보며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서걱서걱.
사각사각.
"와아... 에퀼리아 음식에 관심이 깊어 여럿 먹어보았는데, 공작님의 음식에 비할 바는 못되네요. 특히 이 소스가 환상적이에요!"
"칭찬 감사합니다. 소스는 에퀼리아 음식에 정통하신 분께 약간 도움을 받았습니다."
"혹시 그 분이 100년 전 표류자님의 제자이신가요?"
"맞습니다. 어떻게 아셨나요?"
"파티에서 공주님께서 말씀해주셨어요!"
"그 분도 오늘 오실거에요. 잠시 기다리시면 만나실 수 있을겁니다."
옆에서는 여러 대화가 오가고 있으나... 필로네의 신경은 온통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있는 아셰리아 공주를 향하고 있다.
하지만 신비한 느낌을 주는 은발자안의 아셰리아 공주는 시하의 포크와 나이프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있을 뿐. 그 어떤 내색도 하지 않고 있다.
"공주님, 여기. 드세요."
시하의 말에 작게 썰린 빵조각을 받아먹고는 냠냠 먹기 시작하는 아셰리아.
방금 느꼈던 그 시선은 기분탓일까...
분명히 이쪽을 본 것 같았는데.
필로네의 내면은 여러모로 복잡해졌다.
그 때, 아일라가 시하에게 다가와 말했다.
"공작님. 아모스와 아이들이 도착했습니다."
"아... 벌써?"
"네.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랬었지. 잠깐만 기다려줘."
아일라에게 답한 후 아셰리아 몫의 빵을 조그마한 크기로 썰어낸 시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따로 일이 있어서요. 아샤, 지금부터 공주님은 맡길게요?"
"하아. 오랜만에 꿀빨고 있는데."
"... 밖에서는 적당히 좀 해라. 필로네님. 잠시 바깥에 다녀오겠습니다."
그 말에 필로네가 밖을 바라보니, 그곳에는 덩치 큰 남성과 어린 수인들이 모여 있었다.
필로네에게 있어... 에퀼리아 정복을 입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에퀼리아는 어느 나라보다도 수인과 마족을 억압하는 데 앞장섰던 나라. 수인들이 저런 옷을 입고 인족과 함께 한다는 건 생소한 일이기 때문이다.
취미가 고약한 에퀼리아의 대부호가 수인 용병들을 고용해 억지로 옷을 입힌 게 아닐까. 그런 궁금증이 생긴 필로네는 아일라에게 질문을 던졌다.
"저 사람들은 누구인가요?"
"공작님께서 직접 고용한 직원들입니다."
"직원...이요?"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또다시 예상 외였다.
바로 어제 시하의 수업을 참관했던 그녀다.
이 세계의 상식은 충분히 습득한 공작이 이런 처사라니... 이해가 가질 않는다.
"어쩌다 수인들을..."
"충분히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필로네가 말을 흘리자, 얌전히 한 손으로 포크를 들고 있는 아셰리아 공주가 입을 열었다.
"수인들이 왜 하필 에퀼리아의 옷을 입고, 어찌 인족의 말을 얌전히 따르고 있을까."
"필로네님께서는... 지금 저 모습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하고 계셨던 게 아닌가요?"
정곡.
필로네는 공주에게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 필로네 너머로 보이는 색을 관찰하며, 아셰리아 공주는 말을 이어갔다.
"저들도 처음에는 저 의복을 꺼려했습니다. 당연한 일이었죠. 수인들이 가장 경계하는 에퀼리아의 복식이라니."
"하지만 선생님께서 한가지 이유를 강조하시며 말씀하시자... 저들은 두말없이 따랐습니다."
수인들을 납득하도록 만든 이유라니.
어떤 거창하고 합리적인 이유일까.
공주의 말에 빠져든 필로네가 물었다.
"그건 어떤 이유였죠?"
"수인국의 드높은 장벽 밖으로 나온 수인이기에 더더욱 깔끔한 복장을 입어야한다. 이것뿐입니다."
"네...?"
정말이지 어이없는 이유였다. 고작 그것만으로 고집 쎈 수인들을 납득시킨다니. 말이 안되는 일이다.
은발의 공주는 덧붙였다.
"사실 이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애초에 선생님은 저들의 어려움을 해소해준 은인이었으니까요. 선생님의 휘하에는 하나같이 그런 사람들 뿐입니다."
보은이란 잘 알고 있는 개념이다.
애초에 시하와의 맞선을 성사시켰던 교섭 재료가 보은의 훈장이었으니까.
은혜를 베풀었다면 받고,
은혜를 입었다면 갚는다.
그런 간단한 논리가 아닌가.
"은혜를 지우고 갚도록 했다. 그런건가요?
"은혜를 지운다라... 그것과는 다릅니다."
"……."
"선생님께서는 저들의 불행을 덜어내고, 각자가 중시하는 행복을 추구할 기회를 마련해주셨으니까요. 은혜를 지운다는 그런 작은 개념으로 설명하기엔 너무나 큰 것이죠."
자신의 선생님은 대단한 사람이다.
어깨를 펴고 미소를 지으며 선생님을 치켜세우는 아셰리아 공주였다.
하지만 필로네는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한 묘인족 소녀가 꼬리를 흔들며 자신이 마친 일의 보고를 하고 있다.
마치... 자신이 원한 일이라는 듯. 상대가 자신을 인정해주길 바란다는 듯 하다.
각자가 중시하는 행복. 그를 추구할 기회.
불현듯 필로네의 뇌리에 시녀장이 했던 말 한마디가 스치듯 지나갔다.
'감정이 사람을 멍청하게 할 때가 있는데... 그게 오히려 좋을 때가 있더라구요.'
'마치 제가 필로네 아가씨의 곁을 십 년이 넘는 시간동안 지키고 있는 것처럼?'
* * *
"두목님, 두목님!"
"두목이라 하지 말랬지..."
"거리 청소를 열심히 하니까 상점 주인 아저씨들이 이렇~게나 많은 걸!"
내 말을 아주 가볍게 무시해버리고 자기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클로에.
이 금발 고양이의 양 손에는 상점 주인들에게 받은 선물로 한가득이다.
이건 이거고...
아모스는 날 보스라 부르고, 수인 꼬맹이들은 두목이라 부른다.
어질어질하다.
"그래서. 거리 청소랑 상점에 민폐부리는 진상 손놈들을 잘 치웠다 이거지?"
"맞아요!"
"보스 말대로 우리 평판이 꽤나 좋아졌소. 아마 다음 일을 진행해도 될거요."
내가 이 녀석들에게 부탁한 일은 청소.
세 달 전부터 시작해 꾸준히 해온 일이다.
미래에 용병 길드를 뿌리뽑게 된다면, 내가 직접 운영할 모험가 길드를 세울 생각이다.
그 시기가 왔을 때 일어날 반발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주변의 평판이 매우 즁요하다.
사실 모험가 길드는 이전에도 존재했다.
지금은 망하긴 했지만, 이백 년 전 용병 길드의 횡포를 방관할 수 없었던 해방자가 고여버린 용병들을 척살하고 모험가 길드를 세웠던 것이다.
기나긴 악인기의 끝에 해방자는 근원으로 승천해버렸고, 전쟁 속에서 영웅이 되어버린 용병들이 다시금 용병 길드를 일으켜 세워버렸으니까.
하지만 이는 대외적인 이유일 뿐, 모험가 길드가 망해버린 이유는 이외에도 여럿 존재한다.
자선에 가까운 수칙이 많았다던가. 다수결을 따르는 의결로 인해 파벌이 생겨버렸다던가.
... 영웅이 아닌 한 명 인간으로서 해방자를 평가하자면, 머릿속이 꽃밭인 남자. 그런 인간이 설계하 길드였기에 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사람과는 다른 인간이다.
굳이 직접 길드를 만드는 목적은 왕도 내부의 여러 인력들을 내 관리하에 두는 것.
내가 그리는 미래에 도움이 될 자는 보호하고, 해악이 될 자는 그 싹을 미리 쳐낸다.
이를 위해 여러 요소들을 준비하고 있다.
"다음 단계는 아직 때가 아니야. 일단 너희가 하는 일에 집중해."
"알겠소."
'부정부패를 일삼으며 본분을 잊은 용병 길드'
'일찍이 해방자가 세웠던 모험가 길드의 부활'
'해방자와 같은 출신의 표류자 왕실 가정교사'
'왕도시민들에게 꽤나 평판이 좋은 임시 공작'
이 모든 요소들이 모였을 때, 내 발언력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공작님.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순간. 기색을 숨긴 채 다가온 하얀 천 덩어리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내가 아는 것이었다.
"아... 주방장님이신가요?"
"예. 식재를 다루는 데 있어 제 피부를 보이면 안 좋게 볼 사람이 많지 않습니까? 장을 볼 때도 이렇게 다닙니다."
초록색 피부를 가지신 요리의 신은 두 손마저 흰 면장갑으로 꽁꽁 싸매고 계신다.
에퀼리아 경제를 움직이는 역군이니 밑바탕이니 하는 종족이라도, 감히 요리를 한다는 이유로 이런 시선을 받아야 한다니.
정말이지 부조리한 세상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어쩐 일로 이 노인을 이런 번화가로 부르신건지요?"
"저번에 도움을 주셨던 소스로 만든 완성품을 맛보여 드리려구요. 거기다 제안드릴 일도 있습니다."
"호오... 기대가 되는군요."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이후 나는 아모스와 수인 아이들을 퇴근시켰고, 고블린 주방장을 베이커리 안으로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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