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화 〉 272. 해방 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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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 해방 교단
내가 이곳에 와서 중점적으로 배운 것은 각 나라의 전반적인 학문이나 문화, 사회정치 구조. 여기에 한나로부터 배운 기초적인 귀족 예법을 제외하면, 문화 쪽의 상식은 취약한 편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는 결국 이 세계에 온 지 겨우 6달밖에 안 된 표류자에 불과하니까.
그런 나에게 `헬레니아식 인사`라니. 내가 아는 헬레니아란 단어의 의미는 초대 성녀가 아레트에게 선사 받은 성씨라는 것뿐이다.
... 아마 초대 성녀와 관련된 인사가 아닐까.
궁금증이 동한 나는 필로네에게 물었다.
"이 인사는 어느 상황에 하는 거죠? 제가 문화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요."
"으으음! 사교계에서 하는 일반적인 인사와는 다르게, 개인적인 영역에서 행하는 인사에요. 친구나 가족 사이의 친근감을 뜻해요."
"그렇군요. 설명 감사합니다.
속사포처럼 설명을 쏟아내는 필로네.
설명만 들으면 내가 필로네의 `친근한 친구` 정도는 되었다는 거구만.
내가 살던 세계에도 지역마다 뺨을 비빈다거나 포옹을 하는 인사법도 있지 않았나. 비주나 바초라고도 부르던데... 에우데미아나 헬렌 교국은 남부 유럽의 문화와 비슷한 나라이다 보니, 그것과 비슷한 인사가 존재하나 보다.
"아. 조건이 있다면 말이죠. 성인들이 주로 이런 인사를 합니다."
마지막 설명을 덧붙이는 필로네. 그나저나 그녀 역시 헬레니아식 인사에 익숙하지는 않은 듯, 호흡이나 맥박이 상당히 불규칙적이고 홍조가 피어오르긴 했다.
하긴... 워낙에 공적인 친분만을 과시하고, 개인적인 인연은 크게 만들지 않으려 했던 인물이다. 그런 사람이 이런 인사를 건넬 사람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 옆을 슥 보면 얼굴이 붉혀진 아셰리아 공주가 두 손을 꾹 쥔 채 부들거리며 우리 둘을 보고 있다. 역시 갓 열두 살이 된 아이에겐 방금 그 인사법이 꽤 이른 모양이다.
에코니아는 내가 살던 세상보다는 미디어가 발달하지 않은 세계. 그렇다 보니 이쪽 아이들은 키스나 성관계 정도를 우습게 취급하는 저쪽 아이들보다 훨씬 순수하다.
일전에 알렉산더를 놀리던 때도 재밌었지
나는 공주에게 말했다.
"제가 예전에도 말했잖아요. 어디 안 간다고. 만약 잠시 떨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공주님이나 다른 분들과 함께 있으려고 하는 거라고요."
"……."
"공주님이 다 크실 때까지 꼭 옆에 있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 네에"
어딘가 불만족스러운 듯한 대답.
이 아이가 자신을 스스로 가두었던 알을 깨트린 사람이 나여서일까.
가끔 아셰리아 공주는 나와 관련된 일에 불안해하는 경향이 있다. 원래부터 감수성이 뛰어난 아이라는 걸 고려해도, 유독 나에게 심한 것 같다.
이 아이가 나를 그만큼 믿고 의지하고 있다며 쉬이 넘겨도 될 일이지만, 사실 내 처지에서는 그렇게 달갑기만 한 일은 아니다.
아이는 언젠가 어른이 되어 부모에게서 독립해야 하며, 학생은 언젠가 자기 스승으로부터 졸업해야만 하는 법.
이는 아셰리아 공주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이 아이가 스스로 행복했으면 한다. 자신이 즐길 수 있는 일을 찾고, 자신에게 맞는 자리를 찾고, 자신을 사랑해줄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났으면 하는 것이다.
옆에 있어 주겠다고는 했지만, 그 약속이 깨지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당장 나만 하더라도... 어머니께서 아무런 예고도 없이 떠나셨지 않나.
…….
그래도 벌써 지금 이런 걸 생각하기에는 이른 시점이겠지.
아직 게임의 본편은 시작하지도 않았다. 걱정은 나중에 해야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더니 정원 입구 근처가 소란스러워졌다.
"시하 형님 여기 계신... 엑"
헤르만이였다.
녀석은 정원 입구에 쓰러져있는 메이드 좀비... 아샤를 발견해버렸다.
"아... 아샤. 왜 그러고 있니?"
"으... 으어어..."
"여동생아. 뭘 적고 있는 거니. 어디 보자..."
아샤 녀석은 정원 잔디에 엎드린 채 손가락을 지면에 대고 무언가를 끄적이자... 헤르만은 그걸 한 글자, 한 글자 읽기 시작했다.
"범인은... 이... 시하..."
다잉 메시지였다.
어휴, 마력 좀 닳은 걸로 호들갑은...
적어도 기절은 해야 큰일이지.
"형님. 이거 무슨 일이야?"
"저 녀석. 내가 필로네 양의 대화하는 걸 엿들으려다 내 마력에 당했어."
"뭐... 뭐라고!"
화들짝 놀라는 헤르만.
하지만 그 얼굴에는 장난기가 엿보인다.
녀석은 아샤 옆에 쪼그려 앉더니, 자기 여동생에게 당당하게 선언했다.
"하하! 시하 형님은 내 감청 마법을 계속해서 막아내는 수련을 거쳤다고. 동생아, 너는 나에게 진 거나 다름없다."
"으... 으윽. 망할 놈."
"어허. 오라버니에게 욕을 하는 나쁜 동생은 그대로 누워서 더 쉬어라."
... 헤르만 저 나쁜 놈.
사실 아셰리아 공주의 옆에는 항상 아샤 녀석이 있을 게 뻔하니까. 혹시나 해서 엔크라테아의 검집에 손을 올렸던 나였다.
아니나 다를까. 잔디 블럭 너머에서 흘러나오는 마력 줄기가 있었고, 그에 대항하여 마법을 펼쳤더니 아샤 녀석은 그걸 오기로라도 뚫어보겠다고 발악을 하다가 탈진해버린 것.
저 녀석의 아셰리아 공주를 향한 충성심이 높은 건 알겠는데, 최근 기디언이 알렉산더를 보좌하는 것처럼 사리 분별은 해주었으면 한다.
나름대로 걱정이 되긴 하는데... 그래도 티오리아 가문 특유의 심상 마력을 보유하고 있는 녀석이니, 자연 마력 탈진으로 큰 문제는 생기지 않겠지.
나는 쓰러져있는 여동생을 계속 놀려대고 있는 헤르만을 불렀다.
"헤르만. 무슨 일이야?"
"아... 그때 맡긴 일 있잖아."
그때 맡긴 일. 헤르만은 필로네와 공주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아마 마크 테크니가 다스리고 있는 시온 자작령에 대한 정보일 것이다.
둘만 있을 때라면 정확히 말했겠지만... 여긴 듣는 귀가 많지 않은가.
특히 필로네와는 어느 정도 말이 통하게 되었다고는 해도, 왕실 중앙에 속해 있는 내가 변경백 차남의 영지를 조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면 꽤 귀찮아질 수 있다.
그렇기에 나는 헤르만의 근처로 향하며 두 사람에게 양해를 구했다.
"사적인 업무와 관련된 내용이라서 잠시 이야기 좀 나누다 올게요?"
"그러세요."
"... 네."
무언가 필로네는 의기양양한 표정이고, 아셰리아 공주님은 풀이 죽어 있는데...
후.
내 신용도는 어떻게 올려야 하나 싶다.
* * *
나는 헤르만과 함께 동관 정원을 나와 왕궁 중앙 정원을 향했다. 유동 인구가 꽤 많긴 하지만, 이런 곳에서 차음 마법을 펼치고 이야기하는 편이 훨씬 안전하다는 헤르만의 의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사람 사이에 숨기는 게 제일.. 뭐 그런 느낌인가. 아무튼 헤르만 녀석이 이쪽으론 전문가이니, 그의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그래서. 진척은 좀 있었어?"
"형. 좋아 보이는 쪽 이야기를 먼저 할까. 나빠 보이는 쪽 이야기를 먼저 할까."
"그게 뭔 개소리야."
"형님. 그거 견인족 차별 발언이야."
"... 참 좋은 거 배웠다."
한 방 먹였다고 좋아죽는 헤르만이었다.
그나저나 흔한 전개대로라면 `좋은 소식 vs 나쁜 소식`, 그게 아니라면 `나쁜 소식 vs 덜 나쁜 소식`이 정상이지 않나.
좋아 보이는 쪽과 나빠 보이는 쪽이라니... 정말 애매한 표현이었다.
"네가 설명하기 편한 순서대로 말해줘."
"그래. 그럼 먼저 나빠 보이는 쪽 이야기를 먼저 할게. 시온 자작령에 원인 불명의 기근이 발생했다고 해."
"원인 불명의 기근이라. 클로에가 말했던 멧돼지와 관련 있는 거 아냐?"
"B급 재앙인 힐디스비니가 나타난 징조는 전혀 없었어. 부정의 심상 마력도 전혀 잡히지 않았고. 그래서 내가 나빠 보이는 쪽이라 한 거야."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탐식의 대재앙, 힐디스비니.
클로에 일행이 보았다던 그 거대한 멧돼지 괴물의 이름이다.
"형님. B급이면 대재앙 취급이잖아. 그 탐식의 대재앙이 나타났다면 아마 국왕님과 기사단장님이 출격하셨겠지."
"혹시 모르잖아. 그 아이들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고."
나에게 익숙한 건 힐디스비니라는 몹의 이름 뿐, 탐식의 대재앙이라는 어마어마한 수식은 이곳에 와서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시 들어도 그 돼지에게 정말이지 어울리는 이명이다.
마력적인 소질이 부족한 사람들은 재앙이 내뿜는 마력에 쉽게 중독당한다. 마치 내가 처음 그 늑대들에게 쫓긴 날, 내 옆에 있던 청년이 구토하던 것처럼.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하급 재앙이라 그 정도에 그친 것일 뿐, B급 이상의 타이틀을 달게 되면 그때부터는 모든 몹들이 내뿜는 디버프가 각자의 특색을 가지게 된다.
클로에와 친구들이 정말 힐디스비니를 만난 게 사실이고 그 재앙이 부정의 마력을 발산했더라면... 그 수인 꼬맹이들은 서로를 죽이며 그 살점을 뜯어먹었을 것이다.
"우리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고. 부정의 심상 마력이 탐지되지 않았는데 그런 게 나타난다니, 이상하잖아. 그 아이들이 헛것을 본 걸 수도 있어."
"조심해서 나쁠 건 없어."
"어휴..."
헤르만의 이런 반응도 이해가 된다. 대재앙은 도시 하나를 궤멸시킬 수도 있는 크나큰 위협이니까. 거기다 지금까진 경보도 없이 그런 재앙이 출몰한 적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에코니아 아포칼립스`의 본편 시간대에는 재앙 경보가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나중 가서는 경보도 없이 그 족같은 재앙들이 튀어나오는 일이 빈번해지니까.
그 시기가 언제부터 시작될지 모르니... 나는 언제나 경계할 수밖에 없다.
나는 헤르만을 재촉했다.
"다음 이야기나 해봐. 좋아 보이는 쪽이 남았지?"
"그래. 자작령에 기근이 들었다고 했잖아. 그런데 무슨 교리를 들먹이는 사람들이 나타나서는 무보수로 그곳 주민들을 구제해주고 있대."
"헬레니아 교라도 되는 거야?"
"그게... 나도 처음 듣는 종교야."
"뭐?"
무보수로 주민들을 구제하는 종교.
그것도 이 대륙과 역사를 함께 한 헬레니아 교가 아닌 또 다른 종교.
마음속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이름만 들으면 꽤 괜찮게 들리던데..."
설마 그 교단은 아닐 것이다.
그 사이비 집단은 본편이 시작되고 나서도 1년의 세월이 흘러서야 등장한다.
그런데 너무나 불안하다.
그 쓰레기들도 이곳 사람들이 상당히 좋아할 만한 단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내가 위화감을 느낀 그 순간...
헤르만은 갸웃거리며 말했다.
"해방 교단. 이었나?"
왜 안 좋은 예감은 항상 들어맞는 걸까.
본편까지 아직 한참의 시간이 남아있었기에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신경 쓰지 않고 싶었다.
힘을 충분히 비축해둔 뒤 고민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며 미뤄 왔었다.
해방 교단.
한 차례 에코니아를 구원했던 해방자와 같은 이름을 공유하지만...
그 단어가 담고 있는 의미만큼은 전혀 다른 사이비 집단의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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