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화 〉 273. 한 단어의 여러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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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3. 한 단어의 여러 의미.
"왕궁부 그림자들의 기록을 아무리 뒤져도 해방 교단은 찾아볼 수 없었거든. 그렇다고 다른 나라에서 들어온 종교도 아닌 것 같아."
역시나... 아직 그 이름은 알려지지 상태구나.
해방 교단.
에코니아 아포칼립스의 몇몇 루트에서 주적으로 등장하는 미쳐 먹은 사이비 집단이다.
헤르만이 조사한 정보가 확실하다면, 그 미친놈들은 최근에서야 모습을 드러낸 거겠지.
내 옆에서 헤르만이 말을 이어간다.
"겉보기엔 자작령을 돕고 있으니 별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이 종교가 도대체 어느 땅에서 갑자기 솟아난 건가... 이게 수상하단 말이지."
촉이 좋다고 해야 할까, 나쁘다고 해야 할까.
별문제가 아닌 건 맞다.
사실 너무나 큰 문제니까.
그 게임이 배드 엔딩뿐인 망겜이긴 해도, 해방 교단이 출현하는 루트는 특히나 뒷맛이 좋지 않다. 그들은 재앙... 판타스매터들을 몰고 다닌다는 느낌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이다.
재앙을 자유자재로 다룬다는 건 아니다. 그 멍청이들도 재앙에 먹혀버리는 일이 잦으니까.
허나 그 사이비들이 공작을 시작한 지역에는 곧이어 큰 재앙이 나타나고, 재앙 경보는 그 의미를 잃어버린다. 이방인을 비롯한 여러 등장인물은 그걸 막기 위해 동분서주했었지.
해방 교단은 워낙 밝혀진 정보가 없다 보니, 게임에서는 놈들에게 끌려만 다닌 느낌이다.
내가 그 사이비들을 지금 단계에서 배제했던 이유도 미리 대비할 수 없다는 점이 컸다.
그 교단의 목적이라도 알면 좋을 텐데, 그 망겜은 중요한 단서를 전부 숨겨 두었으니...
내 고민을 모르는 헤르만은 내 앞에서 속 편한 소리를 내뱉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해방`이라는 단어를 대고 있으니까 왠지 모르게 믿음이 가기도 하고..."
그래...
이게 에코니아의 일반적인 인식이지.
대중에게 해방이란 단어의 이미지가 너무 좋은데, 이건 전부 다 그 사람 때문이다.
해방자.
200년 전의 악인기... 수많은 악인이 일어났던 그 시기를 잠재운 표류자 영웅.
창세 신화 속의 창조주가 기거했다던 `근원`으로 나아가 모든 것을 해방한 자.
내가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접했던 곳은 분명 공주님과 방문했던 도서관이었다.
처음 그의 업적을 들은 당시에는 `한국인이 참 대단하다.`라는 인상이 전부였지만, 여기서 생활하며 피부로 체감하게 된 그의 인기는 내 예상을 아득히 초월한 수준이었다.
당장에 연도를 새는 기년법마저 해방력, 마치 내 고향에서는 예수의 탄생을 기원년으로 삼듯, 이곳에서는 그가 근원으로 향한 해를 `해방력 0년`으로 정해놓지 않았나.
거기에 그가 근원으로 향했던 날을 해방제라 부르며, 그날은 전 세계에 축제가 벌어진다.
이쯤 되면 그의 존재는 가히 하나의 신앙, 공통된 역사라 정의해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헤르만."
"왜?"
"해방자는 확실히 영웅이지?"
"그렇지. 당연한 걸 묻고 있어."
하지만 나에게는 한 가지 의문이 있다.
이 의문은 내가 이 세상의 외부자... 그와 똑같은 표류자이기에 가질 수 있는 것. 지금 당장 내 마음속에 있는 중요한 질문 중 하나다.
나는 그 질문을 헤르만에게 던졌다.
"그럼 해방자는 도대체 뭘 해방시킨거야?"
"뭐?"
"해방자는 근원에서 모든 것을 해방 시켰다며. 그 모든 것이 뭐냐는 거야."
"그게 뭐냐니. 당연히..."
내 물음에 헤르만은 잠깐 고민하더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자신의 답을 말했다.
"인간을 악인기로부터 해방... 아닌가?"
"너 왜 말투에 확신이 없냐?"
"너무 당연한 걸 물어봐서 그렇지... 도대체 이런 건 갑자기 왜 물어보는 건데."
"나한텐 중요한 이야기야. 해방자는 무엇을 해방 시켰는지, 해방은 도대체 무엇인지."
대부분의 역사서 역시 해방자가 `악인기를 끝냈다`는 것에 큰 의의를 두고 있을 뿐, 내 의문에 대해서는 답을 내려주지 않았다.
이거라도 정확히 알아야 해방 교단의 정체성을 확실히 정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럴 수가 없으니 매우 답답한 상황이다.
"혹시... 그 교단이랑 관계라도 있는 거야?"
"간접적으로는. 확실한 건 아냐."
"으음. 해방이라..."
나와 마찬가지로 고민에 빠진 헤르만.
그는 잠시 후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이 손가락을 탁 하고 튕기며 말했다.
"국왕님이나 왕비님께서는 알고 계시지 않을까?
"두 분이?"
"왕가에만 전해져 내려오는 비고가 있거든."
왕가에만 전해지는 비고가 있다니.
나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헤르만은 설명을 이어간다.
"나도 정확히는 몰라. 어릴 적에 아버지가 지나가듯 말씀해주신 게 다거든. 에우데미아의 이름을 받지 않으면 그 문을 열 수조차 없대."
"에우데미아의 이름... 왕족이 아니면 안 되는 거야?"
"그런 셈이지. 그래도 그 비고가 아니어도 왕비님은 무언가 알고 계실 수도 있잖아. 왕비님께서는 프로네시스 가문 출신이니까."
해방자 저택을 보러 갈 때 한나가 말했었지.
병에 걸린 해방자를 거둔 게 샤크티 프로네시스. 나를 이 세상에 떨군 마녀였었다고.
그럼 헤르만의 말대로 국왕 내외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도 괜찮은 생각인 것 같은데...
잠깐.
그런데...
해방 교단에 대해 어디까지 말해야 할까.
그전에. 국왕 내외에게 말해도 될 일인가.
이 세상에서 `해방`이란 단어가 얼마나 무거운 가치를 지니는지 알고 있다 보니... 어렵다.
혹시나 믿어주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 말이 허황된 것으로만 들리지는 않을까.
지금껏 쌓아 올린 신용이 무너지진 않을까.
여러 걱정이 앞선다.
……
"내가 소설 주인공 같은 고민이나 하게 된다니..."
"뭐?"
"아무것도 아니야."
정말 웃기는 일이다.
처음 아셰리아 공주와 만났던 때에는 이런 고민 따위 하지도 않았었는데. 지금 와서는 `잃을 것`이 생겼다는 이유로 고민이나 한다니.
... 하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내게 `잃을 것`은 없다. 아직 내 주변 사람들의 행복은 확정된 것이 아니니까.
지금 해야 할 일에만 집중하자.
해방 교단이 아직 큰일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해도, 그들과는 언젠가 대치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아직 전면전은 이르겠지.
나는 그들이 어떤 짓을 저지르고 다니는지만 알 뿐, 그들의 정체성도 목적도 모르니까.
게임에서는 재시작이라는 좋은 시스템이 있었기에 이벤트를 정리할 수 있었다지만... 지금의 내게 이곳은 현실. 결국 나는 그들에 대해 알고, 행동을 예상해야 하는 입장이다.
그러니 국왕 내외에게 해방 교단의 실체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대신 `해방`의 의미에 대해 조금만 물어보고, 내가 시온 자작령으로 향할 수 있도록 허락만 구할 생각이다.
굳이 해방 교단의 실체를 말하지 않는 것은 왕실이 믿든 안 믿든 내 손해가 크기 때문.
믿어준다면 섣불리 교단을 자극할 우려가 있으며, 아니라면 내 행동에 제약이 생긴다.
결국... 지금은 이게 리스크가 가장 적은 동시에 기댓값은 가장 큰 선택지다.
결정을 내린 나는 말했다.
"헤르만, 시온 자작령에 직접 가보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
"직접? 교사 일은 어떻게 하려고."
"음... 장기 휴가 같은 건 없을까. 나 그래도 반년 동안 엄청 열심히 일하지 않았냐."
"이 인간이..."
나를 실눈으로 째려보는 헤르만.
거... 왕실 가정교사는 장기 휴가 없나?
지금껏 내가 자발적으로 쉰 기억은 딱히 없는데.
수업을 쉰 기억이라 해봐야...
타라스 마을에서 재앙을 때려잡은 다음 날, 앓아누워버려서 수업을 못 나갔던 일.
건국제나 아셰리아 공주의 생일처럼 큰 행사를 준비해야 한다기에 쉬었던 일.
조운회 섬멸 작전을 진행해야 했기에 국왕 내외의 허락을 받고 왕성에 나섰던 일.
전부 내가 멋대로 쉬려 했던 게 아니다.
오히려 명시된 업무 내용 외의 다른 일을 하기 위해 쉬었던 거지. 고로 난 합법이다.
이런저런 잡념에 빠져있었더니, 헤르만 녀석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왕실 가정교사의 휴가에는 조건이 둘 있어."
"조건?"
휴가에 조건이라...
휴가에 기한이 따로 있다거나.
잔업은 끝내야 한다는 그런 건가?
헤르만은 손가락 하나를 세우며 말했다.
"하나. 왕도 밖으로 휴가를 나갈 경우, 안전을 위해 왕실 사유지에 머물러야 한다."
"휴가지 제한이라니. 그건 좀 너무하잖아."
"이 부분은 걱정하지 마. 시온 자작령의 바로 근처에 왕실 사유지가 있거든. 작은 호수를 끼고 있는 곳이라 별장도 크게 지어져 있어. 자작령까지 쉽게 왔다 갔다 할 수 있을 거야."
오...
이것만 들으면 이득인데?
왕실 사유지에 있는 별장.
시설은 굉장히 좋을 것 같다.
그런데...
`이 부분`이라니?
헤르만의 말에 위화감을 느낀 그 순간, 헤르만은 손가락 하나를 더 올리며 말했다.
"둘. 왕실 가정교사는 휴가를 가더라도, 그 학생들과 함께해야만 한다."
…….
거짓말이지?
"뭐?"
"왕실. 가정교사는. 꼭. 휴가를. 학생들과. 함께. 왕실의. 사유지로. 가셔야 합니다."
나는 믿기지 않아 헤르만에게 되물었으나...
돌아오는 답은 한결같았다.
* * *
시온 자작령.
지금은 훤한 대낮이기에 영주관의 침실은 밝아야만 하지만, 그곳에는 거대한 커튼이 드리워져 있어 어둠만이 가득하다.
남녀 간의 정사는 때를 가리지 않으니까.
한 쌍의 남녀가 나란히 누워있는 침대에서, 새하얀 머릿결을 단발로 기른 여자가 말했다.
"다른 형제님께서 큰 실수를 하신 바람에 곤란하던 차였는데... 마크 형제님 덕분에 제가 큰 은혜를 입었네요. 감사합니다."
"감사라..."
나른한 목소리로 답하는 남성.
사실 그는 여성에게 실컷 쥐어짜인 터라 대답할 기력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옆에 있는 여성이 어떤 자인지 너무나 잘 알기에, 그녀를 잡기 위해 필사적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이라도 더 `사랑`을 남겨야만, 이 여성을 조금이라도 더 점유할 수 있으니까.
당장이라도 잠이 들 법한 몽롱한 의식 속에서... 마크는 지금 동원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이성을 짜내어 도출해낸 말을 입에 담았다.
"사랑하는 사이에. 그런 말은 필요 없습니다."
"후후..."
나름대로 멋들어진 말이라고 생각했건만, 막상 상대에게선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저 루비와 같은 붉은 눈이 빛날 뿐이다.
여인은 변함없는 눈길로 마크를 바라보다... 최대한 몸을 밀착하며 그를 꼭 끌어안았다.
"사랑은 정말 멋지죠. 그나저나 마크 형제님께서는, 피곤하신가요?"
"전혀..."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애써 버텨내는 마크.
자신은 조금이라도 더 오랜 시간을 함께하고 싶다는, 자신은 여성을 소중히 하고 있음을 알아달라는, 나름의 발악이다.
하지만 여성에게는 너무나 흔한 일이었다.
아무리 멋들어진 말을 하더라도 결국 남자들의 사랑이란...벗겨놓으면 하나같이 전부 거기서 거기니까.
그런 속마음은 숨긴 채, 여성은 마크의 머릿결을 서서히 넘기며 속삭였다.
"제 앞에서는. 강한 척하지 않으셔도 되요. 한숨 주무시고 나면... 괜찮을거에요."
"아..."
마크의 낮은 탄식.
집안에서는 언제나 느껴보지 못했던 안락함을 나의 성녀님께서는 항상 제공해주신다.
그렇기에 그는 사랑할 수밖에 없다.
"감사합니다... 일리아드님."
끝까지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마크는 일리아드의 품에서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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