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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왕실의 가정교사-110화 (110/215)

〈 110화 〉 2­74. 당장 가죠.

* * *

2­74. 당장 가죠.

필로네와 아셰리아 공주를 방치한 채로 시간을 너무 쓰면 안 될 일이니, 나는 일단 헤르만과 함께 동관의 정원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왠지 분위기가 묘한 게...

두 사람은 티테이블에 앉아 있긴 하지만, 필로네는 옆을 슬쩍슬쩍 보면서 웃음기를 띄우고 있고, 아셰리아 공주는 볼이 잔뜩 부풀린 상태로 차를 들이켜고 있었다.

... 필로네가 공주를 놀리기라도 한 건가 싶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셰리아 공주가 저렇게 볼을 부풀리고 있으니 그 모습이 마냥 새롭게만 보였다.

나를 발견한 필로네가 말을 건넸다.

"두 분, 대화는 끝나셨나요?"

"아, 네. 감사합니다. 작별 도중에 일이 생겼네요. 갑자기 자리를 비워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그런데 호기심이 동하네요. 혹시 무슨 일인지 여쭈어도 될까요?"

안 그래도 수상했던 변경백 차남의 영지에 사이비 놈들이 포착되어 시찰을 나가려고요.

라고 어떻게 말하겠나.

다른 가문이긴 해도 내 눈앞에 있는 필로네 역시 변경백의 여식인걸.

아셰리아 공주의 옆자리에 앉으며... 나는 약간의 거짓을 보태어 말하기로 했다.

"저번에 보신 수인 아이가 말해주기를... 북쪽의 시온 자작령 근처에 기근이 들었다 하더라구요. 마침 휴가를 낼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곳도 들려보려 합니다."

"기근... 인가요?"

내 대답을 들은 필로네는 고민에 빠졌다.

수인 아이가 말해준 건 의뢰 내용뿐이지만, 다른 건 전부 맞는 말 아닌가.

휴가를 `고민하는 것`도 확실하다.

휴가를 학생들과 함께 가야 한다니... 그 사실이 날 여러모로 고민하게 만들기 때문.

다시 생각해봐도 어이가 없네.

그게 왜 휴가야.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 내 직업인데, 학생들과 함께 가면 그건 휴가가 아니지...

거기다 아이들을 데려가면 어떤 일이 생겨날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공주님과 아샤는 얌전한 편이니 전혀 걱정이 안 되지만... 그 왕자 녀석이 문제다.

시온 자작령의 소식을 들은 알렉산더 녀석이 `왕족의 의무`를 지키겠다며 나설 테고, 유나와 기디언이 그를 따라나선다면...?

망한다.

분명 망한다.

해방 교단이 왕족에게 어떤 처지인지도 모를뿐더러, 그곳에서 무슨 목적으로 구제 활동을 벌이는지도 모르는 상황. 마크 테크니라는 놈에 대한 정보도 확실치 않다.

오직 확실한 건 기근이 있다는 것뿐.

이 상황에 알렉산더가 난입한다면, 시온 자작령을 둘러싼 실태를 파악할 틈도 없이 백성들을 구제하자며 날뛸 것이 뻔하다.

그 순간, 해방 교단과 마크 테크니를 조사하겠다는 내 목적은 물 건너 가버리겠지.

거기다 유나를 데려가면 윤흠서가 이끄는 세력의 활동 범위가 엄청나게 제한된다.

여러 이유가 있어 유나에게는 모우회 세력의 존재를 숨긴 상황이기 때문이다.

윤흠서 역시 내 방침에 동의했으며, 그를 비롯한 전 모우회 세력은 함부로 공주 앞에 나서지 않겠다고 약속까지 나누었다.

... 사실 이런저런 생각을 제하고도, 아이들은 안전한 곳에 얌전히 있어 줬으면 한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이것이 내 결론이다.

"아."

고민을 마친 필로네가 손뼉을 쳤다.

그리고 내게 의외의 제안을 해왔다.

"그럼 저희 소피아 령의 잉여 생산물을 원조품으로 쓰시는 건 어떠신가요? 좋은 목적으로 쓰이는 것이니 싸게 드릴게요."

"아... 정말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저희 영지는 작년 수확량이 괜찮았거든요. 농작물을 운반할 때가 되면 저도 겸사겸사 찾아뵙는 걸로..."

소피아 령은 에우데미아 최대의 농업 생산지. 분명 상황에 큰 도움이 되겠지.

내 본 목적이 마크 테크니와 해방 교단의 조사이긴 하지만... 결국 기근을 명목으로 시온 자작령을 방문할 것이니 나도 구제 활동은 어느 정도 해야만 할 것이다.

나는 별 고민 없이 제안을 수락했다.

"아직 휴가가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원조를 하러 가게 된다면 소피아 령의 농산물을 제가 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그럼 공작님의 휴가가 확정될 때까지는 왕도에 남아야겠네요."

"영애를 번거롭게 해버렸네요. 죄송합니다."

빙그레 미소 짓는 필로네.

그 순간 내 바로 옆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던 아셰리아 공주가 나를 불렀다.

"... 선생님."

"왜 그러세요. 공주...님?"

슥 돌아다보니...

국왕의 엄근진 페이스와 루시아 왕비의 쌀쌀한 미소가 동시에 떠오르는 표정.

이것이야말로 유전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가정환경으로부터의 학습인가.

어느 쪽이든... 무섭다.

"당장 가죠."

"네?"

"휴가. 가시죠."

"갑자기 그리 말씀하셔도..."

분명 봄인데 말이지.

누가 기온 조절 마법을 썼나...

춥다.

공주는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시온 자작령 근처라면 메디아 호수에 왕족 사유지가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왕실 가정교사이시니 그곳을 이용하셔야겠죠."

"그... 그렇죠."

…….

어떻게 거기까지 알고 있는 거야.

공주는 빠른 속도로 설명을 덧붙인다.

"곧 5월입니다. 메디아 호수의 별장은 봄이 늦어 지금이 한창 꽃이 만개할 때죠. 당장 가야 그 모습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하하. 사실 왕도 바깥 구경을 나가는 게 본 목적이긴 한데..."

황급히 말을 돌려보지만...

소용없었다.

아셰리아 공주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나를 계속 올려다보며 말했다.

"왕도 내에만 있다 보니 너무 답답하네요. 오랜만에 메디아 호수에 가고 싶습니다. 선생님께서 함께 가주신다면 더더욱 좋겠고요."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지이이잉 ­

눈에서 레이저가 나오는 것만 같다.

그 순간...

내 대답은 이미 정해져 버렸다.

"네에..."

* * *

"그래서. 아셰리아가 선생님께 메디아 호수로 휴가를 가자고 제안했다는 건가요?"

"아... 원래 휴가를 신청하려고 했었습니다. 그 이야길 공주님께서 들으신 거고요."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국왕 내외와 마주하고 있었다.

동관 정원에서 내가 아셰리아 공주의 기세에 밀려 힘없이 대답해버린 직후. 그녀가 나를 거의 끌고 가다시피 하여 국왕 내외가 있는 집무실로 향했던 것.

... 아직도 어질어질하다.

보폭도 작은 공주가 어쩜 그리 빠른지. 따라잡는다고 고생깨나 한 것 같다.

나에게 국왕이 물었다.

"그나저나 자네. 맞선은 어떻게 된 건가? 오늘이 마지막 날이지 않나."

"그게... 잘 마무리했습니다.

"오호. 그건 다행이군."

사실... 잘 마무리한 건지 모르겠다.

나오면서 얼핏 본 필로네의 표정은 어느새 험악하게 변해 이를 가는 듯 했는데.

내가 전 여친 이야기까지 해가며 선을 그었으니 따로 호의 같은 걸 바랄 리는 없고... 제대로 된 인사를 못 해서 그런가?

정말이지. 오늘은 영문 모를 일투성이다.

그런 와중에 왕비가 물었다.

"그런데. 선생님께선 갑자기 무슨 일로 휴가를 신청하려 하신 건가요?"

"그게... 제가 고용한 녀석 중 하나가 시온 자작령에 기근이 들었다며 온갖 걱정을 하더군요. 그래서 바깥바람도 쐴 겸, 그곳에 자선을 약간 하고 오려 합니다."

클로에. 미안하다.

되지도 않는 거짓말에 널 이용해버렸다.

그래도 급여나 복지는 내가 넉넉히 해주고 있으니까, 원망은 하지 말아주렴...

휴가를 청하기엔 궁색한 사유였지만, 왕비는 갸웃거리다 스스로 납득한 듯 말했다.

"뭐... 선생님께서 이곳에 오신지 벌써 반년이 지났으니까요. 왕도 바깥을 마주하고 싶으실 수도 있겠다 싶군요."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휴가 조건은 들으셨나요?"

"네, 헤르만에게 들었습니다."

그렇게 왕비와 대화하고 있었더니, 필레몬 국왕이 옆에서 끼어들더니...

"그나저나 메디아 호수라. 참 그립구먼. 루시아, 우리도 가는 건 어ㄸ... 읍!"

꼬집혔다.

원래 내 앞에서는 루시아 왕비가 필레몬 국왕을 몰래 꼬집는 편이었는데, 요즘은 아주 대놓고 허벅지를 꼬집어버리신다.

"이 인간이 일이 얼마나 쌓여있는데 내빼려고. 우린 곧 있을 아카데미 토너먼트에도 얼굴을 내밀어야 하잖아?"

"그러니까 오히려 지금 가야... 으읍!"

"그 뒤에 있을 해방제 준비도 해야지."

이후 루시아 왕비는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요즘 들어 이 사람이 놀 생각 말고는 없어서 말이죠."

"하하... 괜찮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일을 벌이는 허들이 상당히 낮아진 것 같은데... 그래도 이런 건 내가 없는 곳에서 해줬으면 한다.

보는 입장에서는 정말이지 깨가 떨어지는 광경이라, 속이 느끼해지기 때문이다.

뭐. 필레몬 국왕이야 아프겠지만.

내 알 바는 아니다.

그러고 보니 해방제 준비를 해야한다라... 떠오른 게 있어 국왕 내외에게 물었다.

"두 분께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뭔가?"

"해방이란 정확히 무엇인지요?"

"흐음..."

필레몬 국왕은 자기 턱과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되물었다.

"그건 갑자기 왜 묻는 건가?"

"제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의미가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그 물음을 갖게 된 원인이 있을 듯한데."

역시나... 평소에는 팔불출을 연기하고 있어도, 중요한 대목에서는 직감이 날카로운 필레몬 국왕이었다.

역사를 보며 느낀 의문이라 해야 할까.

그게 아니라면...

지금 당장 이들의 앞에서 해방 교단의 이름만을 말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

... 이들이 해방 교단의 존재를 알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도 하나의 길이겠지.

"시온 자작령의 기근에 최근 해방 교단이란 단체가 나타나 자선을 하고 있다더군요. 거기다 영웅의 이명 역시 해방자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궁금증이 생겼을 뿐입니다."

"그런가."

"제 세계에서는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를 뜻합니다만, 혹시나 다른 뜻이 있나 싶어서요."

"흠..."

국왕 내외의 기색을 살펴보면...

그저 질문의 의미를 생각하며 진지하게 고민해준다는 느낌뿐, 별다른 반응은 없다.

아직 이들도 해방 교단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더니, 사색을 끝낸 국왕이 말했다.

"사실 에코니아의 대부분 사람들도 그렇게 말할 거야. 억압으로부터의 자유."

"허나 에우데미아의 왕족에게는 그 단어가 매우 특별하다네. 알렉산더와 아셰리아 역시 언젠가 이해하게 되겠지."

왕족에겐 특별하다.

갑자기 국왕이 이런 식으로 말해줘도 짐작이 가질 않았다.

"감이 잘 안 오는군요."

"그게 자네에겐 당연한 걸세. 그래도 내가 조금의 실마리를 주자면..."

국왕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자네 세계와 이 세계의 가장 큰 차이점이 하나 있네. 그걸 잘 생각해보게나."

내 머릿속에 의문만을 가득 남겼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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