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화 〉 275. 적당한 약속
* * *
275. 적당한 약속
국왕 내외와의 알현 바로 다음 날.
나는 지금 마차 특유의 덜그럭덜그럭거리는 탑승감을 느끼며 메디아 호수를 향하고 있다.
역시 왕가의 힘은 대단하다고 해야 할까.
내가 휴가를 간다고 말한 지 단 하루 만에 왕실에서 메디아 호수의 별장까지 타고 갈 마차들과 호위 병력을 지원해준 덕이다.
마차 한 대에는 네 명의 학생 알렉산더, 아셰리아, 아샤, 기디언 이 탔고. 나머지 한 대에는 우리 집에 사는 식구 넷 나, 유나, 사아씨, 헤르만 이 타게 되었다.
드르렁 쿠울
내 마차에서는... 반대편에 앉은 헤르만 녀석이 호위 병력도 있다며 안심하고 퍼질러 자는 중.
사실 나로서는 이해가 안 간다.
얼마나 피곤해야 이런 덜그럭거리는 마차에서 저렇게 잘 수 있는 거지.
물론 왕실의 최고급 마차이다 보니 내부에 여러 마법이 걸려있긴 하지만, 이전 세계에서 타고 다니던 버스만도 못한 승차감이 너무나 거슬린다.
그러고 보니 게임에서는 에퀼리아 갑부들이 타고 다니는 마차는 조금 더 기술력이 뛰어나다는 서술이 있었는데...
…….
뭐. 사실 내가 잠들지 못하는 이유는 승차감 외에도 따로 있지만.
"후우..."
바로 전날. 왕궁 집무실에서 국왕이 해준 조언이 너무나 거슬린다.
내가 살던 세계와 에코니아의 가장 큰 차이라니, 너무 두루뭉술한 조언이지 않은가.
당장에 떠오르는 것은 마법이나 마력, 관습이나 정치, 여러 종족 정도인데...
그중 해방이라는 주제와 관련된 것을 생각해보려니 여러모로 골이 아프다.
"의부님.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
한창 고민에 빠진 내 한숨이 신경 쓰였는지, 유나가 물어왔다.
…….
이 아이도 혜세국의 1공주였으니까 어느 정도 알지 않을까.
필레몬 국왕은 에우데미아의 왕족에게 특히 중요하다고 하긴 했지만, 혜세국의 명월주 역시 한 나라의 지도자니까.
그런 희망을 품고 유나에게 물었다.
"유나야. 넌 해방하면 뭐가 떠오르니?"
"해방. 말씀이신가요?"
"그래."
"의부님께서 일반적인 것을 물으실 리는 없으실 테고. 조금 다른 시각에서 봐야겠군요."
곰곰이 생각에 잠긴 유나.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여러 가지 있겠죠. 저로서는 해방자가 먼저 떠오르네요."
"너도 그렇지?"
"네. 그 외에도 수인 해방운동이나 초대 마왕이 벌였던 마족 해방운동도 떠오릅니다. 특히 마족 해방운동이 더 기억에 남네요. 당시 명월주님께서 초대 마왕과 절실한 사이셨으니까요."
"그건 또 처음 듣는 이야기네."
"사실 혜국의 실록에만 남아 있는 역사랍니다. 명월주의 자리에서 내려오신 선주께서는 후일 초대 마왕과 혼인을 맺으셨어요."
"호오..."
일반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은 지식이 지금 이 순간 늘어버리다니. 평소라면 흥미를 느꼈겠지만, 지금은 그리 마음이 동하질 않는다.
... 그래도 유나의 말에 일리는 있네.
이 세계에서 수인들과 마족들은 피땀 흘려 차별과 맞서왔으니까.
그 역사야말로 해방일 것이다.
하지만 국왕은 에우데미아의 왕족에게 특별한 뜻이 있다고 했는데... 이건 수인들과 마족들에게나 특별한 의미이지 않은가.
그렇게 나는 내 마음속에서 여러 종족이라는 단어를 살포시 치워냈고, 이후 남은 단어는 마력이나 마법, 정치나 관습.
하지만 정치나 관습도 아닌 것 같다.
에코니아 오 개국의 정치 구조는 하나같이 지구의 역사 속에 있었거나 현존하는 것들이니까.
거기다 국왕이 가끔 내 수업을 참관했었다 하더라도, 그가 저쪽 세계에 대해 잘 알 리가 없지 않은가. 오히려 그런 부분은 100년 전 표류자에게 여러 이야기를 들은 고블린 주방장이 훨씬 더 잘 알겠지.
그가 아는 것이라곤 오직 `표류자의 세계에는 마력이 없다`라는 사실 뿐.
... 그렇다면 역시 마력인가.
나는 그 단어를 입에 담아보았다.
"마력의 해방. 마력 해방..."
무언가 마법사의 옷이 번쩍거리며 마법 피해량이 증가할 법한 울림이지만...
그래도 잘 감이 오지 않는다.
한 구절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창조신은 마력으로 모든 것을 만들고, 마력으로 모든 것을 엮었다.`
이 명제는 이 세상에서 마법을 쓰기 위해 필수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며... 이 세상을 마주하는 데 필요한 것.
"도대체 뭘 해방한다는 거야?"
이런 세상에서 마력의 해방이라고 되뇌니, 나로서는 너무나 두루뭉술하고 피상적인 단어로만 느껴져 버린다.
"어지럽네..."
해소되지 못한 의문과 함께.
마차는 덜그럭덜그럭 거리는 소리를 내며 나아갔다.
* * *
시간은 어느새 밤이 되어
끼익
마차가 한 곳에서 정차하게 되었다.
그리고 바깥에서 말을 탄 청년 기사가 다가오더니 창문 너머로 말했다.
"공작님. 야영 캠프에 도착했습니다."
메디아 호수의 별장까지는 마차로 대략 이틀거리. 오늘 아침에 출발했으니 내일 저녁쯤이 되어서야 도착할 예정이다.
도중에 야영을 하거나 마을 여관에 묵어야만 했는데, 아셰리아 공주가 `왕족의 행차에 주민들이 불편을 겪을 수 있다.` 라는 의견을 냈기에 야영을 하기로 했다.
나는 기사에게 말했다.
"그럼 아이들이 쉴 수 있는 천막부터 만들어 주세요."
"알겠습니다."
이내 기사가 내 지시를 전달하자, 인부들이 짐마차에서 여러 부품을 꺼내 야영 준비를 시작했다.
... 그나저나 사람 참 많네.
호위 병력만 해도 30에 달하는 수준이고, 마부나 인부들 역시 비슷한 숫자.
휴가를 갈 뿐인데 반백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함께 출발한다니. 왕족의 행렬이기에 가능한 일이겠지.
나에게 사아씨와 유나가 말했다.
"공작님. 저도 미리 내려 저녁 식사 준비를 시작하겠습니다."
"네, 부탁드릴게요. 사아씨."
"의부님. 저는 그럼 다른 아이들에게 가보아도 될까요?"
"그럼 같이 가자. 나도 모두에게 할 말이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유나는 말 없는 어른들 사이에 있다 보니 좀이 쑤신 모양.
딱 저 때는 친구들이랑 놀아야지.
우리 세 사람은 곤히 잠든 헤르만을 남겨둔 채, 마차를 빠져나왔다.
* * *
풀이 자라나지 않은 너른 공터.
모닥불이 있었음을 보이는 탄 자국.
의자 대신 사용할 법한 통나무까지.
어딘가 익숙해 보이는 야영지였다.
게임에서도 야영지는 전부 이런 식으로 디자인되어있었으니까. 이제는 그런 디테일에도 그리 놀랍지 않다.
남성용과 여성용.
기사용과 인부용.
인부들은 재빠르게 천막을 설치했고, 그 안에 쓸만한 가구를 적절하게 배치했다.
거기다 몇몇은 노숙을 할 생각인지, 야영지 곳곳에 깔개를 펴 자리를 잡는 모습.
대충 정리가 되고 난 뒤, 나는 아이들을 천막에 불러놓고 말했다.
"이번에 제가 휴가를 낸 이유 중 하나는 시온 자작령에 대기근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이미 나와 국왕 내외의 대화를 들었던 아셰리아 공주를 제외하면 다들 의외라는 반응.
하긴 워낙에 급하게 정한 휴가다 보니, 그저 바람 쐬러 간다는 말만 전해 들었나 보다.
알렉산더가 말했다.
"그럼 스승님께서는 시온 자작령을 도우러 가시는 겁니까?"
"네. 아마 메디아 호수에 도착하고 나서 하루쯤 쉰 다음엔 자작령을 매일 왕복할 것 같네요."
"저희도 무언가 도울 게 있는지요."
역시나. 알렉산더는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내게 물어왔다.
하지만 안된다.
그 사이비 새끼들이 너희들을 본다면 도대체 어떤 짓을 저지를지 모르거든.
나는 마차를 타고 오는 내내 생각해왔던 말을 알렉산더에게 전했다.
"알렉산더. 왕족이 지방 영주의 땅을 방문할 때는 사전 통보가 필요합니다."
"그럼 저희 측에서 통보를..."
"거기다. 굶주린 백성들 앞에 왕족이 나서면 질서 유지에 어려움이 생겨요."
"아..."
다행히 별다른 설명 없이도 알렉산더는 본인이 가면 어떤 일이 생길지 알아챈 모양.
그래도 이 녀석은 자신이 돕지 못한다는 사실에 불편함을 느낄 것이 뻔하기에...
"만약에 여러분들의 조력이 필요해지면 제가 그때 부를 테니까, 일단은 메디아 호수에서 편히들 쉬고 있으세요."
"반년 동안 그래도 열심히 공부도 했고, 알렉산더와 아셰리아는 집무도 도와야 했잖아요? 저도 반쯤은 쉬러 온 거니까, 다들 지금만큼은 부담감을 내려놓으세요."
나는 지금껏 준비해온 멘트를 쏟아냈다.
`도움이 필요해지면 말하겠다.`
이 말을 듣고 밝아진 알렉산더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스승님을 믿고 당분간 별장에서 쉬고 있겠습니다."
후우...
이렇게 가장 큰 고비 하나는 넘겼다.
알렉산더가 따라온다고 말하는 순간, 기디언과 유나 역시 따라온다고 할 것이 분명하기에 정말 중요한 순간이었다.
우리 왕자님이 얌전히만 있어 준다면 이번 휴가 동안 나는 완전 안심이지.
내가 마음 놓은 순간, 공주가 말했다.
"선생님. 헤르만 님이나 다른 분들께 일을 맡기시고, 선생님께서도 쉬시면 되는 일 아닙니까."
지금은 곤히 잠든 누구 씨가 들으면 또 자신만 부려 먹는다고 펄쩍 뛸 제안.
물론 공주의 말에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번 일은 평범한 빈민 구제 사업 따위가 아니다.
`모두가 행복한 미래`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될 수 있는 해방 교단. 그 실체를 파악하는 것이 이번 목표이며, 나는 많은 것을 쏟아부을 작정이다.
왜냐하면 지금 시온 자작령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은 에코니아에서 해방 교단이 `공식적으로는` 처음 벌이는 활동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
물론 그 사이비 자식들은 아직 자신들의 발톱을 숨기고 있겠지만... 그건 동시에 그들이 나를 쉬이 건들 수 없다는 뜻.
또한 놈들은 내가 자신들의 민낯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니, 지금이야말로 놈들의 실태를 파악할 적기라 볼 수 있다.
거기다 다른 이들에게 맡기기엔... 각자가 해줘야만 하는 임무가 있다.
결국. 내가 직접 나서야만 한다.
나는 공주에게 말했다.
"저는 왕도 바깥에 처음 나오는 거니까요. 다른 영지는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서 경험 삼아 갔다 오고 싶네요."
"그렇다면 굳이 이번이 아니어도... 왕도와 가까운 영지에 가시면 저도..."
"왕실 가정교사가 왕도 밖으로 나가기 힘들다는 것 정도는 공주님도 아시잖아요."
"……."
공주는 말이 없었다.
... 또다시 그 표정이다.
내가 왕궁의 동관에서 독립해 나가려 할 때에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의 그 표정.
혹시라도 내가 필로네와 함께 소피아 령에 가버리진 않을까 걱정하던 그 표정.
저 표정을 볼 때마다, 가슴 속에는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통증이 느껴진다.
…….
사람은 만나고 헤어진다.
동시에 헤어진 뒤 만난다.
영원한 이별이 아님에도,
이 아이는 불안할 것이다.
... 이 아이는 아직 다른 이와의 관계를 잃는다는 사실이 너무나 두려울 테니까.
당연한 일이다.
이 아이는 이제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세워나가기 시작했고, 아직 이별을 직접 경험해본 적은 없다.
하지만 이별이 두려울 것이다.
국왕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모친과의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의 문을 닫았었으니까.
그렇기에 이별이 더 두려울 것이다.
마음을 연 상대가 사라질 수 있다.
그게 얼마나 슬픈지는 알고 있다.
하지만 자신은 겪어보지 못한 일.
이만큼 두려운 상황이 또 있을까.
…….
이런 순간이 가장 어렵다.
해결 방안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고를 수 있는 말은...
"최대한 빨리 돌아올게요. 얼른 돌아와서... 공주님께서 말씀해주신 꽃구경이나 같이 가죠."
언젠가 나누었던 대화 속 한 단어를 이용해
한참 뒤의 미래를 담보로 한 위안을 만들고
확신시켜 줄 수 없는 적당한 약속을 건넨다.
이외에는 전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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