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왕실의 가정교사-112화 (112/215)

〈 112화 〉 2­76. 우리 애 보는 눈은 있네.

* * *

2­76. 우리 애 보는 눈은 있네.

내 말에 아셰리아 공주는 마지못해 수긍하는 분위기였고, 이후로는 사아씨가 마련해준 저녁을 먹고 각자의 천막에 흩어져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시간은 지나 어느새 새벽.

"으슬으슬하네..."

어느새 식어버린 공기가 바람을 타고 와 내 잠을 깨운다. 새벽이라 야영지 주변의 풀 내음도 조금씩 나다 보니 기분이 나쁘진 않다.

문제가 있다면 종일 마차를 타고 왔기에 온몸이 뻐근한 와중에 잠자리마저 불편했다는 점 정도. 나는 천막 밖으로 나가 굳어버린 몸을 풀기로 했다.

천막 밖으로 나서자...

"교사님. 일어나셨습니까?"

"레온. 벌써 일어나계시네요."

"하하. 교사님이야말로 더 주무셨어도 되셨을 텐데요."

"영 몸이 뻐근해서 말이죠."

금발 미남 기사 한 명이 나를 맞이해주었다. 처음 내가 에코니아에 떨어졌을 무렵, 알현실 경계를 맡고 있던 기사 레온이다.

에우데미아 사람치고 짧게 기른 머리와 훈훈한 얼굴이 건실한 느낌을 주는 이 사람은 이번 행렬의 호위 단장 역을 맡고 있다.

알현 당시에 다른 여기사가 아셰리아 공주에게 친근히 대하는 모습을 보고 의아한 감이 있었는데, 나중에 가서 알고 보니 그 두 사람이 기사단장님의 양자였다고.

레온은 넉살 좋게 대화를 이었다.

"그러고 보니 교사님께서는 첫 야영이겠군요. 저도 처음엔 적응하느라 꽤 애먹었습니다."

"기사단에서 처음 겪으신 건가요?"

"아뇨. 아버지께서 제가 7살이 되자마자 사냥을 가르쳐주겠다고 하셨거든요. 누님과 함께 아레트 산에 틀어박힌 채로 맹수 여럿을 잡고서야 내려왔습니다. 하하!"

"7살..."

기사단장...

역시 그는 스파르타다. 스파르타.

가끔 나를 단련시켜줄 때도 엄한데, 레온은 아예 그런 기사단장의 밑에서 자랐다 보니... 훈남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터프한 모습을 보일 때가 있었다.

마치 지금 어거스트 기사단장과 완전히 닮은 호탕한 웃음을 내는 것처럼.

... 역시 가정환경은 중요해.

그러고 보니 야영하니까 떠오른건데... 그 게임은 야영 시스템도 있었다.

보초를 잘못 세우면 좀도둑에게 짐을 다 털리거나, 플레이어보다 강한 세력에게 습격당하면 바로 배드엔딩이었지.

거기다 불침번을 많이 설수록 이성 수치가 떨어지는 디테일 때문에 초보들은 적응하느라 고생깨나 하게 되어있었다.

웬만해서는 각 마을의 여관에 머물 것. 이 간단한 수칙이 초보들을 위한 팁에 언제나 들어가 있었을 정도.

사실 여관도 그리 안전하지만은 않았지만... 알렉산더 루트만 깨고 싶어 하는 초보들에겐 여관이 최고였지.

나는 너털웃음을 치는 레온에게 물었다.

"밤새 별일은 없었나요?"

"네. 10명씩 3교대로 불침번을 섰습니다만, 별다른 위협은 없었습니다."

"다행이네요."

"뭐, 갑자기 상위 재앙이 나타나는 일이 아니고서야 위험은 없겠지만요."

하긴. 여기 붙어있는 기사가 몇 명인데.

예외가 꽤 많긴 하지만, 에우데미아 기사 편제의 기초 단위인 파티는 전위·중위·후위 각각 둘씩으로 구성되어 총 여섯 명이다.

지금 이 행렬에는 기사가 서른 명이니 다섯 파티가 붙어있는 셈. 중급 재앙 정도까지는 이들만으로도 충분히 토벌할 수 있다.

거기다 아직은 재앙 경보가 멀쩡한 때니까. D급 이상의 재앙이 갑자기 출현할 일도 없고 말이지. 위협 요소는 전혀 없다고 봐도 된다.

레온과 이런저런 대화를 하고 있자, 아셰리아와 아샤가 묵고 있는 천막의 입구가 들썩거리더니, 아담하신 공주님께서 나왔다.

"좋은 아침이에요. 공주님."

"별로 안 좋습니다."

"하하..."

"……."

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어제부터 찬 바람이 쌩쌩 분다.

공주님은 조용히 내 옆으로 오더니, 허공에 한 점을 응시하며 침묵만을 지키고 있다.

어린아이가 토라졌다고 생각하면 참 귀여운 구석도 있구나 싶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웃어넘기진 못할 노릇이었다.

이 아이가 얼마나 똑똑한데. 게임에서는 그 아셰리아 여왕이 되어버리지 않았던가. 나중에 잊지 않고 복수할지도 모른다.

`해방력 197년 4월 31일. 선생님께서는 휴가지에서 저를 떼어놓은 채 어딘가로 사라져 버리셨습니다.`라고 하면서.

... 설마 진짜 그러겠어.

지금이야 태양을 바라보는 해바라기처럼 나를 따르고 있지만, 이 아이가 청소년기에 접어들면 `선생님의 잔소리가 싫습니다!`라며 도망갈지도 모른다.

이것도 내가 받아들이기엔 나름 슬픈 미래지만, 조금은 더 낫지 않을까.

그렇게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레온마저 우리 눈치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길가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사람들의 방향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말했다.

"저쪽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레온, 왜 이렇게 소란스러운 걸까요?"

"제가 얼른 가서 확인해보겠습니다."

"... 저도 같이 가죠."

레온. 나를 버리고 가려 하다니.

이 원한은 절대로 잊지 않을 테다.

일단 공주는 돌려보내는 게 좋겠지.

나는 아셰리아 공주에게 말했다.

"공주님. 저희는 저곳을 확인하러 갔다 올게요. 새벽에 찬 바람이 부니까 들어가셔서..."

"따라갈래요."

…….

내가 침묵하고 있자, 아셰리아 공주는 다시 한번 쐐기를 박듯 고했다.

"시하 선생님. 레온. 어서 가죠."

* * *

레온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아셰리아 공주는 아직도 찬바람이 쌩쌩.

그런 두 사람과 함께 길가로 향했더니... 그곳에는 남자 기사 둘과 여자 기사 하나, 그들 너머로는 은발의 여성 한 명이 얼핏 보였다.

하지만 영 분위기가 이상했다.

원래라면 지나가던 행인을 잡고 늘어질 일은 없을 텐데, 행인 하나를 두고 기사 세 사람이 서로 싸우고 있었다.

"이분께서 잠깐 들렀다가 가신다고 하지 않습니까. 물 정도야 대접해도 되겠죠."

"... 너희들 미쳤어? 우리가 지금 누굴 모시고 있는지 알고 말하는 거야?"

"당연히 잘 알고 있죠. 알렉산더 왕자님과 아셰리아 공주님. 이시하 임시 ㄱ..."

"너..."

정확히는... 젊은 남기사 두 사람이 여성 한 명을 야영지 내로 들이려는 듯했지만, 여기사가 그걸 막고 있는 상황.

남기사 둘은 여기사보다 나이가 젊고, 그녀의 하급자로만 보인다.

…….

저놈들은 대가리가 비었나?

내 이름이야 둘째 쳐도, 왕족인 아이들의 이름을 외부인 앞에서 하나하나 까발렸다.

거기에 더해 상명하복이라니.

그 꼴을 보고, 호위 단장을 맡은 레온이 씩씩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헨리! 토드! 뭣들 하는 거야!"

"아. 단장..."

"여기 헬렌 교국의 성직자분께서 저희 캠프를 잠시 들르고 싶다고 하셔서요."

레온을 뒤따라가니 두 기사의 뒤에 선 여성의 모습을 더 정확히 볼 수 있었다.

머리 전체를 뒤덮는 반투명한 순백의 베일. 그 베일에 가려져 있긴 하지만, 얼핏 보이는 그녀의 은색 머릿결은 연보랏빛이 감도는 듯한 그 느낌이 아셰리아 공주의 그것과 상당히 닮았다.

옷은 헬렌 교단의 성녀들이 자주 입는 법의를 입고 있는데... 내가 아는 성녀들의 복장과 다른 점이 있다면, 약간 타이트한 사이즈라 그녀의 몸매를 강조하듯 착 달라붙어 있어 부담스럽다.

게임 속에서 본 일반적인 성녀들은 엄청 널널하게 입었는데 말이야. 조금 더 자세히 보니 법의의 몇몇 부분은 천 너머에 속살이 내비치는 지경.

솔직히 내 눈엔 전혀 성직자로 안 보이고, 노출증 환자가 코스프레라도 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입고 있는 옷이 너무 고급스러운데다 자연스러워 보이니 `그런 쪽` 의상은 아닌 것 같고...

거기다 이 세계에 코스프레는 없잖아.

저 정도로 별난 인간이라면 게임에 나올 법 한데, 내 머릿속에도 없는 사람이다.

얼굴이 벌게진 여기사가 답답함이 새어 나오는 어조로 레온에게 하소연했다.

"레온! 이 녀석들. 여기 이 여자가 오니까 갑자기 눈이 돌아가서는 내 지휘는 하나도 안 듣고 고집이나 부리고 있잖아. 이래서 갓 들어온 평기사 새끼들은..."

"진정하고. 일단 저 사람은 누군데?"

"지나가는 성직자라는데, 어떤 성직자가 호위도 없이 혼자 다니는 건데! 아무리 봐도 수상해서 가던 길이나 가라니까 저 애새끼들이...!"

"진정하라니까. 너까지 이러면..."

"조장님. 말씀이 심하십니다. 이분께서 어떤 분이실 줄 알고 수상하다는 겁니까!"

"토드. 넌 입 닥치고 있어!"

여기사는 지금 상황에 열불이 나서 하소연을 하고 있는데, 그마저도 젊은 기사 놈이 끼어들어 레온의 성질마저 돋우고 있다.

말 그대로 난장판.

레온에게 일임하고 구경만 하고 있다간 상황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아 발걸음을 옮기려 하니... 뒤에서 작은 손길이 나를 잡아당겼다.

"선생님."

"공주님, 왜 그러시나요?"

... 조금 전까지의 그 무표정한 얼굴이 아닌 창백한 얼굴.

갑자기 공주님이 왜 이러는 거지.

"저 사람. 무서워요."

"네?"

"그게..."

말끝을 흐리는 아셰리아 공주.

... 사실 나로서는 별것도 아닌 일이지만, 아셰리아 공주에게는 저 비상식적인 성녀(??)가 이상하게 보일 법하지.

나는 공주에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공주님. 제가 얼른 가서 쫓아내 버릴게요."

저 노출증 환자는 아이 교육에 해가 된다.

그런 마음을 품고 앞으로 나서는데...

아셰리아 공주가 다시 한번 나를 당겼다.

"같이 갈래요."

"무섭다고 하셨잖아요."

"... 네."

아셰리아 공주는 무언가 큰 결심이라도 한 듯, 침을 꿀꺽 ­ 삼키면서 말했다.

무섭다면서 같이 가겠다고 한다니.

이걸 어떻게 해야 할까.

멀찍이서 지켜만 봐도 되는 일이지만, 굳이 오지 말라 할 일은 아닌 것 같고...

말린다고 들을 것 같지도 않았다.

나는 고민하다 말했다.

"그럼 제 뒤에 딱 붙어있으세요."

"네."

이번에야말로.

등 뒤에 아셰리아 공주를 딱 붙인 채.

언제나 검을 뽑을 수 있도록 마음을 다지며

나는 노출증 성녀의 앞으로 나아가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이 캠프의 상급자인데, 어떤 일로 찾아오신 건가요?"

"아하... 안녕하세요."

가까이서 본 여인의 눈동자는 마치 새빨간 루비가 들어있는 것만 같았다.

그런 눈길로 나를 슥 ­ 하고 훑어보는데...

시선이 상당히 끈적하다고 해야 할까, 마치 나를 품평하는 듯해서 영 불편했다.

이윽고 그 묘한 시선은 천천히 내 뒤편의 아셰리아 공주에게까지 향했고...

"어머나. 정말 귀여운 아이네요."

…….

노출광이긴 해도 우리 애 보는 눈은 있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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