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화 〉 277. Eliahld Hele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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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7. Eliahld Helenia
헬렌 교국의 성녀는 사랑을 궁리한다. 그리고 수많은 고민 끝에 도출해낸 그 사랑을 실천하고자 노력한다.
이는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교국이 낳은 최악의 성녀라 불리는 일리아드 헬레니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에게도 자신만의 사랑이 존재했으며, 그것만을 위해 살아가고 있었다.
물론, 지금은 잊은 지 오래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누군가 그녀에게 '사랑'이란 목적을 잃어버린 게 아니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라 답할 것이다.
아니, 정확히는 '지금이야말로 사랑만을 위해 살아간다.'라고 대답하겠지.
육신을 잃었던 그녀는...
다시 태어나고도 사랑에 진심이다.
* * *
이른 새벽.
시온 자작령에서의 일을 모두 마친 일리아드는 에우데미아의 왕도로 향하던 중 어느 야영지를 발견하게 되었다.
'어림잡아 세기에 50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묵고 있는 듯한데...'
이 정도 인원이 단체로 야영한다는 것 자체는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에퀼리아를 오가는 상단이나 하인을 동반한 귀족이 야영하는 경우가 있으니까.
특이한 점이 있다면...
꽤 장비가 좋아 보이는 기사 세 명이 직접 보초를 서고 있다는 것.
에코니아라는 드넓은 세계에서 여행할 때 가장 위협적인 것은 돌발적으로 출몰하는 하급 재앙. 그 괴물들을 물리치는 데 유의미한 전력을 지닌 자들은 좋은 대접을 받기 마련이다.
그들의 컨디션이 무너지면 집단의 생존은 운에 맡겨야 하는 것이 되어버리니까.
원래라면 저 정도 되는 기사들이 직접 경계를 서는 일은 없으며, 비전투원이나 일반병들이 보초를 담당하는 게 상식이라면 상식이다.
이런 세상에서 저런 기사들이 경계를 선다는 건... 호위 대상이 그만큼 고귀한 신분을 가지고 있거나 돈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이겠지.
호기심이 동한 일리아드는 야영지를 지키고 있는 기사들에게 나아갔다.
"잠깐."
"지나가실 수 없습니다."
그런 그녀를 막아서는 두 남기사.
'이걸 어찌 해야 할까...'
이들의 상급자로 보이는 여기사는 뒤에서 일리아드를 바라보고 있긴 하지만, 이 정도로 외부인을 경계하는 걸 보면 자신의 예상이 맞아떨어진 듯하다.
"도로 방향으로 돌아가십시오."
"말이... 안 들리는 건가?"
이 남자들을 꼬드기는 건 일도 아니다.
한쪽은 자기 복장에 벌써부터 헤벌쭉 입을 벌리고 있고, 다른 한쪽은 다른 곳을 힐끗힐끗 바라보며 시선을 피하고 있으니까.
전형적인 남자들의 반응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저 뒤에 여기사인데... 소란은 피워 다른 이들을 불러내면 큰 문제는 되지 않을 것 같다.
일리아드는 머릿속에서 셈을 마쳤다.
"... 그래. 그거면 되겠네."
""?""
그녀가 내뱉은 영문을 모를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두 기사.
일리아드가 그 기사들에게 자신의 심상 마력을 조금씩 흘려보내니, 그들은 한층 더 멍한 표정이 되었다.
"길을 지나던 교단의 성직자입니다만, 안쪽에 만나 뵙고 싶은 분이 계셔서요."
"아."
"음."
일리아드는...
들어주길 바랄 때 들어주고, 상대를 띄우는 말을 건네고, 모든 일을 이해하고 위로하고, 사랑을 말하는.
한 사람의 성녀로서 강요당해왔던 모든 언행을 '남성'에게서 도리어 받아낸 순간, 더 큰 사랑을 알았다.
거기에.
가련한 몸짓으로 마음을 자극하고, 당신만 보라는 듯 몸을 드러내고, 같은 침대에서 온기를 나누기까지.
여성으로서 처음 맛보았던 '진정한 사랑'을 끊임없이 행한 결과, 일리아드는 새로운 심상을 습득해냈다.
그때가 바로 반세기 전.
그 후에 일리아드는 늙지 않았으며, 모든 남성에게 사랑받았고, 품은 모든 이들의 전부를 알게 되었다.
지금 이 기사들에게 행한 것마저, 그녀가 보유한 심상 마법의 일면에 불과하다.
일리아드의 마력에 침식당한 기사들은 이내 여기사에게 허락을 구하려 했고, 그대로 소란이 나버렸다.
여기까지는 계획대로다.
캠프 내의 사람들은 조금씩 깨어날 것이고, 점점 소동을 키워나간다면?
이들을 이끄는 자가 나올 것이다.
하지만 기사들의 입에서 나온 대화는...
"... 너희들 미쳤어? 우리가 지금 누굴 모시고 있는지 알고 말하는 거야?"
"당연히 잘 알고 있죠. 알렉산더 왕자님과 아셰리아 공주님. 이시하 임시 ㄱ..."
"너..."
일리아드의 예상마저 뛰어넘은 것이었다.
자신이 왕도로 향하는 이유 중 하나...
아니, 정확히는 둘이 바로 눈앞에 있다니.
마음이 조금씩 벅차오르는 그 순간, 캠프 안쪽에서 다른 이들이 나타났다.
"헨리! 토드! 뭣들 하는 거야!"
"아. 단장..."
단장이라 함은 기사단장이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일리아드가 소리의 진원지로 눈을 돌렸더니, 방금 막 기사들이 말했었던 존재들로 보이는 자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왕실 가정교사. 이시하.
왕녀. 아셰리아 에우데미아.
일리아드는 그들을 확인하고 싶었다.
* * *
이시하와 아셰리아를 알아챈 그 순간부터, 일리아드는 기사들 따위 안중에도 없어졌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오직 두 사람.
자신의 시선을 기사들이 가로막고 있기에 제대로 볼 수는 없다. 그저 조금이라도 더 자세히 보려고 노력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리아드에게 이시하가 다가왔다. 등 뒤에 아셰리아를 숨긴 채.
"안녕하십니까. 이 캠프의 상급자인데, 어떤 일로 찾아오신 건가요?"
"아하... 안녕하세요."
밝은 미소와 함께 답하는 일리아드.
'이 사람이 그 일을 망쳤다던 표류자...'
이윽고 그녀의 시선은 시하의 뒤편에 숨어있는 아셰리아를 향했다.
'그리고 저 아이가...'
전해 듣기로, 자신이 죽고 난 다음 세대의 성녀 후보가 탈선하여 에우데미아의 국왕과 결혼한 뒤 낳은 딸.
성스러운 피를 얼마나 이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교국으로 모녀를 호출했으나, 재앙의 습격에서 살아남은 것은 오직 딸아이뿐이었다지...
"어머나. 정말 귀여운 아이네요."
일리아드는 말 한마디를 하고도 아셰리아 공주를 뚫어져라 보게 된다.
아셰리아 공주는 그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내 뒤에 한 층 더 숨어버린 상황.
시하는 약간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거야 맞는 말입니다만. 저희 캠프에는 무슨 일이 있어서 들르고 싶다고 하시는 건가요?"
"네?"
"다시 말씀드리죠. 무슨 일로 이 캠프에 오신 겁니까?"
일리아드에게는 이상한 일이었다.
이 남자도 지금쯤 저쪽에 난동을 피우는 기사들처럼 홀려야만 했다.
분명 주변에 마력을 흘리고 있었으니까.
'효과가 부족한 건가...'
매혹은 기본적으로, 상대가 자신에게 관심이 있어야만 효과가 생기는 마법.
그 관심을 끌어내기 위해, 일리아드는 베일을 드러내고 얼굴을 드러냈다.
지금껏 봐온 남자들은 자기 외모만 보아도 알아서 호감을 표했으니까. 일리아드는 그런 자신감을 가지고 말했다.
"이 일행의 상급자라고 하셨었죠."
"그렇습니다."
"……."
"왜 그러십니까."
하지만 효과는 미미했다...
오히려 그의 어조는 더 차가워졌다.
'조금 눈이 높은 남자인가 보네...'
마력의 출력을 조금 높이고, 일리아드는 '남자를 홀리게 하는 7가지 자세 중 하나'를 사용할 준비를 했다,
약간 수줍은 듯 다른 곳을 바라보며.
목선과 귀, 쇄골이 드러나는 게 포인트.
싱그러운 미소는 덤으로 장전한다.
슬쩍 머리카락 쓸어올리기 !
"하하. 교단의 성직자인데, 길을 지나는 도중 이곳 야영지를 발견해서요."
"네."
"... 식사라도 함께할 수 있을까 해서요."
"흠."
그녀의 말에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시하.
그는 소란을 듣고 찾아온 시종에게 말했다.
"여기 계신 행인분께서 배가 시장하신 듯하군요. 보존식을 내오세요."
"알겠습니다, 공작님."
"죄송하지만, 함께 식사하기엔 무리 같군요. 귀하께서 입고 계신 법복이... 여러모로 아이들 교육에 안 좋아서요."
효과는 미미했다...
원래라면 자기 옷을 훑어본 뒤 약간이라도 관심을 가져야 정상이고, 그 상태에서 매료의 마력에 노출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눈앞의 이 표류자는 일리아드의 마력에 그 어떤 반응도 하지 않는다니.
거기다 오히려 옷을 나무라고 있다.
'내가 입고 있는 옷이 어때서...!'
자존심에 금이 가는 순간이었다.
"음식... 여기 있습니다."
"……."
일리아드가 속으로 분을 삭이는 동안, 심부름을 보냈던 시종이 도착해버렸다.
시종은 조심스런 동작으로 일리아드에게 건량과 육포 한 뭉치를 건네왔다.
절로 한숨이 나오는 상황.
"후우..."
"모시지 못해서 죄송합니다만, 식사를 하고 싶으시다면 야영지 내의 비어있는 공터를 사용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저기. 잠시만요."
일리아드 헬레니아는 대성녀 시절을 떠올리며 시하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약간 키가 크네... 그렇다면.'
자존심 회복을 위한 마지막 시도.
"왜 그러십니까."
"감사 인사 정도는 드리려구요."
"네?"
남자의 마음을 여는 비술 중 하나.
그건 바로 성녀의 이름을 딴 인사법.
얼굴을 좁힌 채 숨결을 교환하다보면 마음은 절로 동하기 마련이다.
일리아드는 발꿈치를 약간 들고, 눈은 살포시 감은 채 입술을 내미는데...
"죄송합니다."
그 입술에 닿은 것은... 손가락.
일리아드의 비술 중 하나, '헬레니아식 인사'는 시하의 검지와 중지에 가로막혔다.
당황한 그녀에게 시하가 고했다.
"아이 교육에 안 좋네요. 돌아가 주세요."
첫 번째 생애에도 느껴보지 못한 굴욕.
'캠프를... 당장 쓸어버릴까...'
일리아드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고,
마지막 승부수를 던지기로 했다.
두 팔을 법복의 치맛단에 올린 채로 고개를 계산적으로 숙이며 말했다.
"배려. 감사합니다."
"예에. 살펴가십쇼."
"……."
슬쩍 가슴골을 보인 일리아드였으나...
시하는 마지막까지 철벽 그 자체였다.
* * *
이후 일리아드는 가던 길을 재촉했다.
아직 왕도에 일이 남았기 때문.
하지만 그녀의 화는 아직 가라앉지 않았다.
'내 것은 아니어도 살짝 맛만 보려 했는데... 성불구자, 아니면 동성애자야?'
아름다운 외양에 걸맞지 않게, 일리아드는 말라비틀어진 육포에 화풀이하듯 질겅질겅 씹어대며 머릿속으론 시하를 씹는다.
'10년 동안 준비해둔 일도 그 남자가 망쳤고... 거기다 아셰리아 공주는...!'
아셰리아 공주.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확실히 닮았었지..."
길가에 우두커니 멈추어서서... 일리아드는 옛 생각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아셰리아 공주는 자신이 아는 누군가의 어린 모습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뒤편에 숨어 세상을 보는 그 모습까지, 너무나 그녀를 닮아 있었다.
"……."
하지만 마음 약해질 틈이 없었다.
잠시 후 그녀는 되뇌었다.
"이런 생각 하지 마."
자신이 왜 다시금 수욕(??)한 건가.
못다 이룬 사랑을 다시 이루기 위함이다.
과거와 약간 다른 점이 있다면...
오직 사랑의 정의가 바뀌었다는 것뿐.
"어차피 죽여야 하니까..."
이 세상 모든 사랑을 해방시키자던 '그 사람'의 제안에 응했을 때, 이미 각오한 일이다.
어떤 일이라도 하겠다며 맹세하지 않았나.
잠시 멈추어 섰던 그녀는 다시금 왕도로 발걸음을 옮기며 낮게 읊조렸다.
"그 남자는... 그래."
"조금 가지고 노는 것 정도는 용서하시겠지."
지금의 그녀에게 제일 중요한 것...
그것은 바로 타인에게서 받아내는 사랑.
그 형태는 상관하지 않는다.
오직 받아내기만 하면 된다.
일리아드 헬레니아.
그녀는 분명...
다시 태어나고도 사랑에 진심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