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화 〉 278. 걱정되는.
* * *
278. 걱정되는.
거 참.
에코니아에도 저런 사람이 있구나.
고의성은 둘째치더라도 외모부터 대화, 몸짓까지 전부 이성을 홀리려는 듯한 사람.
자기애에 가득 찬 듯하지만, 결국 다른 사람이 없으면 말라 죽어버릴 것 같은 사람.
저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호의를 보이지 않는 순간 자존감이 나락으로 가버린다.
그러니 최소한의 예의라도 지킬까 싶었지만... 그랬다간 영 귀찮아질 것만 같았다.
... 솔직히 초면의 상대에게 모든 걸 대놓고 드러내는 여자는 오히려 너무 부담스럽잖아. 거기다 저런 스타일은 영 거부감만 드는 게 사실이다.
그나저나...
"으... 불쾌해."
변태 성녀의 공격을 막아낼 때 립스틱 비슷한 게 묻어서 손가락이 너무 찝찝한데...
필로네야 내 맞선 상대였고 며칠 동안 서로 본 사이였으니까 납득할 수 있는 인사였었는데, 생초면에 이런 건 좀 무례하잖아.
맞선 상대였던 필로네에게 이미 한 번 당해봤기에 방어할 수 있었지만, 정작 그 방어 수단은 닿은 부분만 빨갛게 물들어 있다.
내가 찌푸린 눈으로 두 손가락을 보고 있자, 아셰리아 공주가 손을 내밀었다.
"선생님. 여기 손수건이요."
"아. 감사합니다. 공주님."
"……."
"잘 안 지워지네..."
다행히 우리 공주님은 그 여자가 사라진 뒤로는 내 등 뒤에서 독립한 상황.
쫓아내길 잘 했구만.
무영창 마법으로 공주님께서 건네주신 손수건에 온수를 약간 적셔 닦아보아도 립스틱 자국이 조금은 남아있다. 조금 있다가 사아씨가 일어나면 리무버 비슷한 걸 빌려서 지워야 하려나.
정말이지. 다른 사람 심정은 1도 배려하지 않는 저런 사람은 민폐가 될 뿐이다. 나는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아셰리아 공주에게 말했다.
"손수건은 제가 빨아서 돌려드릴게요."
"네."
"공주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충분히 배려할 줄 아는 분이니까 걱정은 안 하지만. 공주님은 커서 저런 사람이 되면 안 돼요. 지킬 예의는 지켜야지. 저게 뭐야."
"... 알겠습니다."
푸념에 가까운 당부를 하는 도중, 뒤에서 기사들을 나무라던 레온이 다가왔다.
"교사님. 죄송합니다. 원래 저런 사람을 쫓아내는 건 저희가 할 일인데..."
"아니에요. 별일 없었으면 된 거죠."
"이 자식들. 근무 중에 눈이 돌아가다니..."
"갓 평기사가 된 사람들이라 하지 않았어요? 저 나이면 그럴 만도 하죠. 그래도 따끔히 혼은 내야겠지만."
왕실 기사단에 소속되어 있는 걸 보면 어느 정도 가문이 된다거나 어린 시절부터 실력이 뛰어난걸 테니까.
웬만해서는 10대 후반일 것이고, 많아 봐야 20살일 것이다.
다른 귀족들은 여자 꽁무니만 따라다닐 때 수련만 거듭하면 눈이 돌아갈 만 하지.
내 대답에 레온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메디아 호수에 도착하면 중징계를 내리겠습니다."
"중징계까지는..."
"그렇다면 가벼운 징계를 겸해 직접 수련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아침마다 호수 둘레를 50바퀴씩 돌면 번뇌도 줄어들겠죠."
"... 메디아 호수의 둘레가 어떻게 되죠?"
"아마 4킬로미터 정도 될 겁니다. 무릇 기사라면 그 정도는 산책이죠."
"……."
저 인간들...
체력은 확실히 늘겠구만.
* * *
이후 캠프로 돌아오자 공주님은 아샤에게 볼일이 있다며 자신의 천막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어제 타고 왔던 마차에서 헤르만 녀석이 찢어지게 하품을 하며 나왔다.
"으함... 잘 잤다."
"어떻게 마차가 출발한 직후부터 지금까지 늘어지도록 잘 수 있냐..."
"평소에 일이 많으니까... 그리고 시온 자작령에 도착하면 또 부려 먹을 거잖아. 그러니 지금 자두는 거라고."
"아. 그러셔."
참 속 편한 녀석이다.
그리 자고도 아직 졸린 기색이 남아있는 헤르만이 걱정스레 말했다.
"형님.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잘 가고 있을까?"
"뭐. 돈이나 물자도 넉넉히 전달해 두었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흠."
아모스와 아일라. 윤흠서를 비롯한 전직 혜세국 전군의 무인 스물 다섯 명. 클로에와 그 친구들까지 일곱.
나와 헤르만을 제외한 34명은 왕도에서 시온 자작령으로 직행하기로 했다.
출발 준비를 할 시간이 부족하기도 했고, 유나와 윤흠서 일행이 서로 만난다면 귀찮아지기 때문이다.
아마 지금쯤엔 출발했겠지.
나는 그에게 말했다.
"걱정되는 거라도 있는 거야? 아일라가 돈 관리는 철저히 할 테고, 돌발 상황에 익숙한 사람들도 많잖아."
"뭐... 그 두 사람이면 잘하겠지."
나도 똑같은 생각이지만, 헤르만이 말한 그 두 사람은 아일라와 윤흠서를 말하는 거겠지.
아일라는 그동안 헤르만에게 보좌관 일을 충실히 배웠고, 윤흠서는 야전 경험이 풍부한 무인. 그러니 굳이 저쪽 걱정은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불안 요소가 남은 듯한 헤르만이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내가 걱정하는 건 그 수인 꼬맹이들 말이야. 이번 일에 녀석들을 끼워도 되는 건가 싶어서."
"녀석들 그래도 D급 재앙 토벌까지는 참여해봤다고 했잖아."
"무력을 말하는 게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수인이니까 근력은 다들 기본적으로 좋겠지."
"그럼 뭐가 문젠데."
"이걸 뭐라 말해야 하나..."
헤르만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골똘히 고민하다가... 자기 머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짚으며 말했다.
"아직."
"머릿속이 꽃밭이라 해야 하나."
평소 별말이 없어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어느새 잠에서 깨어나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온 헤르만은 사뭇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내 생각에 그 녀석들, 형이 안 주워줬으면 다른 사람들한테 평생 속고만 살다가 울면서 수인국으로 돌아갔을걸?"
"하하... 말도 참."
"그것뿐이면 다행이지. 4년 전에는 수인 꼬맹이 스무 명에게 맹약 마법을 걸어서 성노예로 쓴 놈들도 있었단 말이야. 귀나 꼬리가 잡아 뜯기다시피 해서 죽은 애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
"그 변태 새끼들... 목에 칼이 들어오는 순간까지 손잡이니 뭐니 하는 꼴이란."
거...
그런 뒤틀린 성적 취향은 알고 싶지 않았는데, 말해줘서 고맙다.
헤르만은 말을 이었다.
"물론 그 새끼들은 전부 내 손에 죽었지만, 딱 클로에처럼 순진하고 애매하게 머리 좋은 애들이 더 팔리기 쉬워."
"수인국에서는 그 사건을 핑계로 군대까지 파견할 기세였다니까. 그나마 우리 외교권이 더 강해서 다행이었지."
... 너 새로 예지 마법이라도 개화했냐. 어쩜 그리 미래를 잘 알아.
녀석이 말하는 건 에코니아 아포칼립스의 일부 루트들과 비슷했다.
물론 내가 그 루트들은 미연에 방지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헤르만은 그림자로 일하던 시절 겪은 일 때문에 걱정이 되나 보다.
내가 조용히 있었더니, 괜히 지레짐작한 헤르만이 설명을 덧붙였다.
"뭐... 예시로 든 게 좀 심하긴 했는데. 저러다 언젠가 한 번 크게 데인다."
"헤르만. 그렇다고 우리가 녀석들을 감싸기만 한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잖아."
"... 그건 그렇지."
저런 걱정을 하는 게 정상이다.
아직 클로에와 다른 수인 녀석들이 순진한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인간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거름이 될 무언가가 필요한 법이다.
나는 헤르만에게 말했다.
"일단 그 사람에게 부탁은 해뒀어. 녀석들에게 세간의 상식이나 야전 수칙 정도는 가르쳐 달라고"
"이번 일은. 클로에와 다른 아이들이 장벽 밖의 세상으로 나온 뒤에 받는 첫 수업이기도 해."
그나마 내 밑에서 일을 하다 보니 다시금 밝아지긴 했지만... 녀석들에게 장벽 바깥의 세상은 아직도 위험하다.
이 세상은 기만투성이니까.
그나마 수인국은 울타리 안에서 살아갈 방법만은 공짜로 알려주지만, 바깥세상은 기초적인 상식조차 그 값을 치러야 한다.
이번 기회에 수인 녀석들이 조금이라도 더 세상을 알았으면 한다.
"부대 안에서 다른 사람을 많이 가르쳐본 사람도 있다고 하니까. 일단 믿어보자."
"흐음... 일단 알았어."
헤르만이 마지못해 답하자, 어느새 아셰리아 공주가 다시금 텐트에서 나왔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나를 발견한 공주는 내 앞으로 쪼르르 다가와 무언가를 내밀었다.
자그마한 유리병이었다.
"선생님. 여기."
"이건 뭔가요?"
"화장을 지울 때 쓰는 향유입니다."
아.
내가 조금 전 립스틱 자국을 지우면서 애먹고 있었기에 가져다준 건가.
"아... 감사합니다. "
"별말씀을요."
역시. 우리 공주님은 배려심이 깊다.
* * *
시하가 자기 손가락에 묻은 일리아드의 흔적을 지워내고 있을 무렵. 윤흠서는 시하가 남긴 문서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 문서의 정체는 시하가 피고용인들을 직접 면접한 뒤 정리해둔 기록지. 그 중 수인국을 갓 나온 아이들의 것이다.
"정말 세세하게도 정리해두었군. 대화를 통해 이 정도로 사람을 분석하다니."
그곳에는 이름, 연령, 가족 관계, 교육 수준은 기본이요. 그들이 수인국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부터 시작해 장벽 바깥에서 어떤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는지까지 모든 게 적혀있다. 윤흠서는 그 종이를 서서히 넘겨보다 클로에의 내용에 집중했다.
[ 수인국 생활은 아무런 문제 없이 잘해왔고, 종족 간 갈등조정 위원회라는 수왕부 직속 기관에서 일하며 실적 역시 우수했다고 한다. 종족 간 갈등조정 위원회 정보 필요. ]
[ 수인국을 나온 이유: 수인국 내 용병업에 지원했으나 묘인족의 신체적 한계를 이유로 부적합 판정을 받음. 또한 갈등조정 위원회 내에서 승진이 이루어지지 않음. 자신의 종을 어중간하다며 스스로를 낮잡아보는 경향을 발견. ]
[ `대신 묘인족은 유연하고 점프력이 좋지 않은가.` 라는 질문에는 전투에 도움이 안 된다며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음. ]
[ 지난 1년간의 행적은 시종일관 미간을 찌푸린 채 말했으며, 도중 힘들다고 호소하여 세 번의 휴식 시간을 가졌다. 휴식하기 전 대목을 통해 추론했을 때, 다른 일행에 대한 책임감이 과도하게 높은 경향이 있었다.]
[ 마땅한 검사 도구가 없기에 클로에가 보이는 비합리적 신념만을 간단하게 정리함: 인정의 욕구, 과대한 자기 기대감, 파국화 반응, 과잉 불안 염려... ]
다른 단어는 그 뜻을 겨우 이해할 수 있었으나... 에코니아에서는 쓰지 않는 단어 하나가 눈에 유독 밟혔다.
윤흠서는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 파국화라는 건... 여기 있군."
제일 아랫단에는 최근 덧대어 놓은 듯한 해석이 존재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파국화: 최악의 경우를 가정하는 버릇을 뜻함. ]
"흠. 믿을만한 전력으로 키울 필요성이 있다기에 맡긴 했는데..."
윤흠서는 고민에 빠졌다.
자신들은 1공주 윤, 지금의 유나를 지키기 위해 이시하의 밑으로 들어왔다. 분명 그는 힘을 키워야 미래에 찾아올 위협을 이겨낼 수 있다고 했지.
그렇기에 윤흠서는 수인들을 키워내야 한다는 것 자체에는 그리 큰 고민을 하지 않았으나... 다른 문제가 있었다.
이시하가 특별히 당부했던 아이는 셋... 바로 클로에와 루이, 그리고 라나.
그중 클로에라는 소녀가 문제였다.
이것은 경험 많은 군인으로서의 직감.
분명 이 아이가 집단의 장이라고 했었는데... 윤흠서로서는 의문이 먼저 떠오른다.
집단을 이끌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다. 윤흠서가 지나가면서 보기에도 머리는 꽤 잘 굴러가는 듯했으니까. 하지만 그녀가 대장 노릇을 계속하게 된다면 본인 스스로가 자멸할 것처럼 보였다.
조직이 아닌 대장 본인이.
그리고 그때.
똑똑.
방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왔다.
"대장. 출발 준비가 마쳤네."
"아. 인환. 자네인가."
윤흠서는 그를 반갑게 맞이한다.
동방인 특유의 짧은 콧수염을 기르고 있으며, 오른쪽 볼에는 가로로 그어진 흉터 자국이 남아있는 중년의 남성. 찌푸리듯 눈을 뜨고 있으나, 이는 타고난 눈매로 보인다.
왼쪽 허리춤에는 환도, 오른편 허벅지에는 시위를 걸지 않아 작고 둥글게 말려있는 각궁. 그 무기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에퀼리아 정복에 망토를 두른 모습이다.
인환이 말했다.
"뭘 그리 보고 있는 거요."
"우리 고용주가 아이들을 맡아달라더군."
"거 참. 별일을 다 시키는구만."
"... 자네. 와서 이것 좀 보게나."
인환은 윤흠서에게 받아낸 종이를 유심히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