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화 〉 283.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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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3.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1)
서준의 이야기에 문득 궁금증 하나가 생긴 클로에가 물었다.
"서준 아저씨. 그런데 인환 아저씨는 오늘 그... 환도...? 그 칼도 잘 쓰시던데요?"
"그 실력은 당시 노력의 결과야. 하지만 지금은 죽어버린 전투조장들에 비하면 모자란 게 사실이다."
"그게 모자란다고요?"
"뭐. 나 같은 일반병 나부랭이가 평하기도 뭣하다만, 전투조장들은 미친 수준이었어. 칼로 철제 방패를 든 적을 방패째 부숴버리는 인간들이었으니까. 인환이는 그 경지까진 아냐."
"칼로 베는 게 아니라... 부순다고요?"
"그래. 우리 대장도 오른팔이 온전했을 무렵에는 충분히 가능했었지."
수인국에서도 방패를 찌그러트리는 수준의 실력자는 꽤 많이 봐왔던 클로에였다. 하지만 오늘 낮에 보았던 그 칼로 방패를 부숴버린다니. 클로에로서는 그 모습이 잘 상상이 가질 않는다.
"방패를 부순다니... 잘 모르겠어요."
"그래. 그게 정상이지. 그런 광경은 직접 보지 않고서야 못 믿으니까."
"그런데... 방금 아저씨가 그랬잖아요. 인환 아저씨가 서씨 가문의 장남이라고. 그건 무슨 뜻이었어요?"
"허. 그 혼잣말을 들어버린 거냐?"
"그게... 제가 수인이니까요."
"그래. 그랬지. 네가 수인이었지."
수인. 그 단어 하나에 서준의 뇌리에 한 사람이 스치듯 지나간다.
그가 말했다.
"아... 그녀 때문일 수도 있겠군."
"그녀라뇨?"
"이건 당사자한테서 들어야겠지. 목적지에 도착하게 되면 인환에게 직접 묻거라."
"아니. 서준 아저씨! 궁금증을 유발해놓고 말을 안 해주시면 어떻게 해요!"
"어허. 다쳤다는 애가 정말 팔팔하구나."
"으..."
서씨 가문은 뭐고, 그 사람은 뭔지. 클로에의 마음속에는 그 궁금증만 커진 상황. 하지만 서준은 더 이야기할 게 없다는 듯 그녀에게서 등을 돌리고 누워버렸다.
"아저씨!"
"골 아파지니까 소리 지르지 마라. 난 잔다."
"진짜 너무하세요..."
"이 녀석아. 네가 정확히 뭘 잘못했는지 잘 생각이나 하고 있어. 반성해."
"히잉..."
"불쌍한 척해도 소용없다. 난 진짜 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준은 덜컹거리는 짐칸에서 정말로 코를 골며 잠들어버렸고. 클로에는 끝내 궁금증을 풀 수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오늘 일에 대한 반성뿐이었다.
* * *
그날 밤.
윤흠서의 지휘 아래. 그가 이끄는 서른세 명의 일행은 이틀을 꼬박 달려, 시온 자작령 내의 인적 없는 숲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름대로 일행의 첫 행군이긴 하지만, 의외로 사람들은 대부분 꽤 쌩쌩한 상태였다. 이런 장거리 이동을 자주 겪어온 동방의 군관들, 원래부터 체력이 좋은 수인들, 그리고 마차에서 편하게 마법 연습을 하며 온 아일라에게는 꽤 할만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 사실 이 임시 거점에서 단 한 명.
다른 사람들을 제외하고 남는 단 한 명에게는 이 행군이 지옥과도 같았다.
"누님. 나 죽어..."
"아모스. 아직도 그런 말이 나오는 걸 보면 살만한 것 같네. 윤 대장님 다시 불러올까?"
"제발 그만해...! 나, 나... 무서워!"
임시 숙소로 쓰는 천막의 침상에 누운 채, 허공에 팔을 휘적거리는 큰 덩치의 아모스. 그의 옆에는 물 한 잔과 약을 가져온 아일라가 서 있다.
아모스 역시 시하가 윤흠서에게 부탁했던 이들 중 하나였다.
시하로선 아모스의 심상 마법이 최대한 빨리 발현하길 바랐지만, 그 계기란 쉽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었기에 그의 기초부터 튼튼히 다져 두기를 바랐던 것.
시하는 정확히 '아모스의 기초 체력과 맷집, 마력 장막을 극한까지 단련시켜 두세요.'라는 방침을 윤흠서에게 전했다.
그 방침에 따라 아모스는 지난 이틀간 행군과 동시에 윤흠서의 공격을 끊임없이 막아내는 지옥 훈련을 거쳐 탈진한 상태. 덕분에 자연 마력의 사용이 서툰 그라도 마력 장막을 더욱 신속하게 쓸 수 있게 되었지만, 고통스러운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 그에게 아일라가 말했다.
"... 빨리 쉬기나 해. 내일부터 쉴 틈도 없이 빈민 구제에 나서야 한다고."
"누님. 나... 지금 엄청 자고 싶은데... 전신이 쑤셔서 잠을 깨버려어..."
"처음엔 시하 공작님께 엎어지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하지 않았어?"
"그건... 그것대로 아프고. 이건 이것대로 아픈 거요. 누님."
"빨리 약 먹고 잠이나 자."
아모스는 침상에서 일어나려 버둥거려보지만... 전신에 퍼진 근육통으로 반절 이상 일어날 수 없었다. 결국 보다 못한 아일라가 신체 강화 마법을 사용한 팔로 그를 일으켰다.
"으억!"
"엄살 그만 떨고. 이거 먹고 물로 삼켜."
꿀꺽꿀꺽. 약을 삼키는 아모스.
아일라는 그를 다시금 조심스레 눕힌다.
"자. 약 먹었으면 빨리 누워 자."
"어어어어..."
진통제를 먹고 조금이나마 나른해진 아모스. 그는 이내 죽은 듯 잠들어버렸다.
고향에서 납치되어 슬럼가로 끌려가고, 운 좋게도 이시하에게 고용되기까지.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아일라는 아모스가 여전하다는 생각이다.
아일라는 그가 잠드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그의 텐트에서 나와 여성용 텐트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라나 뿐이었다.
"라나. 클로에는 어디 갔나요?"
"그게. 어제 클로에가 잠을 안 잤잖아요. 그래서인지 임무 중에 졸아버렸데요. 고양이가 나무에서 떨어졌다나..."
"저런..."
"그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지금은 척후조장님께 불려 갔어요."
"... 크게 혼나진 않았으면 좋겠네요."
"그러게 말이에요."
* * *
임시 거점 근처의 숲.
클로에는 척후조장 서인환의 뒤를 졸졸 따라가고 있었다. 지금은 까마득한 밤이긴 하지만 클로에 본인이 묘인족이라 그런지, 발밑이 불안하다는 생각은 그다지 들지 않는다.
하지만 클로에를 불안하게 하는 요소는 따로 있었다. 텐트를 나서는 그 순간부터 클로에는 혼날 생각만 잔뜩 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인환은 묵묵히 숲을 걷고 있을 뿐, 별다른 말이 없다. 클로에는 오히려 이 침묵이 더 무서웠다.
그들 주변에는 풀벌레가 우는 소리뿐, 이 고요함을 깨기 위해 클로에가 물었다.
"... 조장님. 저희 어디로 가는 거예요?"
"식수원을 확인하러 가는 중이다. 이곳 시온 자작령의 명명은 시온 강에서 파생된 것이지. 이 방향으로 쭉 가면 그 강의 지류 격이 되는 개울이 하나 있다."
"그렇군요."
"...아마 너라면 귀나 코로 그 위치를 대강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거다."
"음..."
킁킁
귀로는 소리를 들으며, 코로도 냄새를 이리저리 맡아보는 클로에. 지금껏 의식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멀지 않은 곳에 물이 있는 것 같긴 하다.
"물 냄새가 조금 나긴 하네요."
"그래. 자기 능력을 잘 활용하거라."
"... 네."
인환의 무심한 듯한 대답. 클로에는 그 대답을 듣고, '아. 도착해서 혼내실 생각이시구나.' 라는 생각을 해버린다. 오늘 낮의 마차에서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이 이렇다 할 성과를 올린 기억이 없었기 때문.
그렇게. 마음속으로 혼날 각오를 마치고 인환을 따르는 클로에. '얼마나 대차게 혼내려고 이렇게까지 걷는 걸까.' 싶을 무렵에, 두 사람 주변의 나무들 사이로 개울이 나타났다.
"도착했군."
"와아..."
사실 개울이라 하기엔 조금 규모가 큰 물줄기였다. '시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릴 정도.
하지만 클로에는 그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은근히 넓은 수폭은 밝은 달빛을 반사하고 있으며, 주변의 나무들은 개울을 숨겨주는 듯한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기 때문.
물에 다가간 인환은 한 손으로 물을 떠보더니 말한다.
"개울치고는 폭이 넓고 수심도 깊은 편이군. 수질도 꽤 괜찮은 편이고."
인환의 모습을 보고 클로에는 '이제 일은 마치셨으니, 내가 혼날 차례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런 그녀의 생각이 맞아떨어지기라도 한 건지, 인환은 클로에에게 말했다.
"적당한 자리를 잡아 앉거라."
"네에..."
맥없이 대답한 클로에가 주변을 둘러보니, 그곳에는 마침 앉기 적당해 보이는 그루터기가 하나 있었다. 아마도 다른 여행객들이 나무를 베어 생긴 것이리라. 클로에는 그런 생각을 하며 그곳에 앉았다.
이제 자리까지 잡았으니 자신이 혼날 차례. 하지만 인환의 행동은 클로에의 예상을 전혀 벗어난 것이었다. 어제 놀이 습격했던 그 상황에 보았던 것처럼, 그는 각궁에 시위를 걸기 시작했다.
클로에가 물었다.
"그... 조장님?"
"왜 그러냐."
"저. 안 혼나요?"
"그래. 꾸중은 들어야지."
'역시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 고양이 소녀에게, 시위를 걸고 있는 인환이 묻는다.
"이번 임무에서 무엇을 잘못한 것 같으냐."
"그게..."
클로에의 머릿속에 '이 녀석아. 네가 정확히 뭘 잘못했는지 잘 생각이나 하고 있어. 반성해.' 낮의 마차에서 서준이 했던 말이 메아리친다.
이내 그녀는 피곤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잠들지 못했던 그 마차에서 생각한 결론을 말했다.
"체력 관리를 못 했어요."
"왜 체력 관리를 못 한 것이냐."
"제 마음이 너무 들떠버린 나머지..."
"그렇다면. 왜 마음이 들뜬 것이냐."
"그게."
이 질문은 크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지만, 이미 마차에서 서준과의 대화로 조금의 힌트는 얻었던 클로에였다. 그녀는 서준이 말해주었던 자신의 문제점을 입에 담았다.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열심히 하고 싶었어요."
그 대답을 들은 인환은 그저 말없이 활에 시위를 걸고만 있다. 두 사람의 사이를 개울물이 흘러가는 소리가 채우고, 이따금 인환이 시위의 줄을 팽팽하게 당기는 소리가 그 사이를 메울 뿐이다.
...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활시위를 모두 건 인환이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인정받고 싶다. 그 마음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보다 잘 생각해보거라."
다만, 클로에를 꾸짖는 어조는 아니었다.
그저 진지하게, 언젠가 자신이 들었던 물음을 길 잃은 고양이에게 전할 뿐이었다.
"너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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