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화 〉 284.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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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4.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2)
'너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냐.'
그 물음에 답하려고 클로에는 이리저리 생각해보았지만, 마땅한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껏 고민해본 적이 없었던 질문이었으니까. 그녀는 자신이 평소 생각해오던 것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조장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어떻게든 말씀드리자면, 저는 그냥 엄청나게 인정받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요."
그런 그녀의 대답을 듣고, 인환은 클로에를 무심한 듯 쳐다보다가... 절로 쓴웃음을 짓게 되었다. 사실 그로서는 클로에가 이런 대답을 할 것이라 예상하였으니까.
인환이 말했다.
"그렇지. 그리 말할 거로 생각했다."
"네?"
"너는 분명 다른 수인들과는 다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끊임없이 찾으려 하고, 찾아낸 모든 일을 해내려 하지."
"그건... 서준 아저씨도 그러셨어요."
"서준? 서준은 너에게 뭐라고 했나."
"... 다른 수인 용병들은 계약서에 적힌 일만 하려 하고, 무엇을 더 할 수 있는지는 절대로 찾으려 하지 않는다. 그런데 저는 오히려 일하려는 게 너무 심하다고 하셨어요. 거기다 몸을 망치면 일을 잘하는 것만도 못하다고..."
클로에가 서준에게 들었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인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정확히 말했구나."
"역시... 그런가요."
"그렇지. 원래 네 사람이 할 일을 너 혼자 다 하려 했으니까. 너는 모든 일을 조금이라도 더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아니냐."
"그건. 그렇네요. 아하하...."
멋쩍은 웃음소리를 내는 클로에. 사실 이런 말은 루이나 라나에게 지겹도록 듣던 말이었기에 어느 정도 자각은 있었다.
지금 당장에 자기 상관인 인환에게까지 이런 말을 듣게 된 것이니, 조금은 씁쓸한 감은 있지만 말이다.
인환이 말했다.
"그렇다면 이번엔 다르게 물어보마. 무엇이 널 그렇게 노력하도록 만들더냐."
"그건..."
조금 전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는 답하지 못했지만, 지금 이 질문에는 답할 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한 클로에가 말했다.
"그게... 수인국에 제가 근무하던 부서가 있었거든요. 종족 간 분쟁조정 위원회라고, 서로 다른 종족끼리 싸움이 붙으면 중재하는 곳이에요."
"흠. 수인국의 특성을 고려하자면 꼭 있어야 할 기관이었겠구나."
"네. 종족 간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도 많으니까요. 여하튼 제가 그곳에서 충분히 실적도 많이 쌓았고, 이제는 승진도 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4년 정도 해도 저는 계속 말단으로 남더라고요."
처음에는 자랑스레 말하던 그녀도 이쯤 되니 조금은 침울해져 버린다. 조금은 가라앉은 어조로 클로에는 말을 이어나간다.
"백호족이이라던가, 은랑족이라던가, 웅인족이라던가. 다른 종족들은 전부 승진해버렸는데, 저만 그렇게 남으니 회의감도 들고... 그래서 차라리 용병이나 해보자는 생각으로 기관을 나와버렸어요."
"호오..."
"그 이후로는 수인국에서 용병을 해봤는데요. 결국에 제 종족 때문에 인정받을 순 없겠더라고요. 묘인족같은 약한 종족에겐 높은 등급의 의뢰가 떨어지지 않으니까요."
옛 생각에 잠겨 든 클로에.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며 말한다.
"그래서 결심했어요. 종족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장벽 밖으로 나가서 인정받아 보자고. 비록 가장 약하다는 취급을 받는 묘인족이지만, 밖에서는 할 수 있을 거라고."
"... 그것참 당찬 포부였구나."
"헤헤..."
인환의 칭찬에 클로에는 잠시 쑥스러운 웃음을 보였으나, 문득 수인국을 떠난 후의 생활을 떠올리고 금방 다시 우울해진다.
"그래도 결국엔 망해버렸는데요 뭘. 친구들까지 끌고 나와서는 에퀼리아인에게 사기당하고, 에우데미아의 왕도에서는 수상한 임무도 떠맡아서는 실패하고."
"……."
"아마... 시하 공작님 눈에 안 들었으면 전 굶어 죽었을 거예요. 그게 아니더라도 멀쩡히 살진 못했겠죠."
"... 그렇군."
클로에의 이야기를 관심 있게 듣고 있던 인환. 그는 언젠가 어떤 수인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린다.
언젠가 자신에게도 도움이 되었던 말이었지만... 지금 이 아이에게도 큰 힘이 되어줄 말이라 생각한다.
어린 시절의 자신과 비교해서 조금 다른 욕심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길을 잃어버린 건 확실해 보이니까.
하지만 그 말을 이 아이에게 어떻게 전해줘야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이리저리 고민하던 인환이 말했다.
"윤 대장이 말했었지. 수인국과 장벽 바깥의 세상은 많이 다르다고."
"... 네."
"무엇이 다른 것 같으냐."
"음. 일을 자신이 모두 알아서 해야한다는 것... 정도요? 수인국에서는 시킨 일만 하면 되거든요. 일을 안 줘서 문제지만."
"그것도 다른 점이겠구나. 그렇다면 수인과 다른 인종의 차이는 뭐지?"
클로에는 곰곰이 생각해보지만, 달리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나마 윤흠서와의 대화를 되짚어 보며 떠올린 것은 단 하나...
"전투 방식이요?"
"그래. 그렇다면 그걸 예로 들어보자."
인환이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 땅의 여러 국가는 각자 다른 방식으로 재앙에 대응한다. 이 말을 알고 있느냐?"
"네. 다섯 나라의 정체성은 유명하잖아요."
"그렇지. 그중 내 고향인 혜세국과 너의 고향인 수인국의 차이는 무엇이냐."
"음... 수인국은 '타고난 신체로 극복한다'였어요. 하지만 동방인들은 '무공을 통해 도를 깨우친다'라고 하던데... 그건 잘 이해하지 못 하겠더라고요."
"그렇구나. 그럼 그 예를 보여주마."
활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난 인환은 근처의 나무 하나를 가리켰다. 근처이긴 하지만, 스무 걸음 정도는 떨어진 거리다.
이후 인환은 어딘가에서 두건 하나를 꺼내더니, 자기 눈에 감았다.
자세를 잡는 그가 천천히 말했다.
"동방에서는... 우리 주변을 감싸고 있는 무수한 마력을 '기'라고 부른단다."
숨을 죽인 채 그 모습을 지켜보는 클로에. 인환은 눈을 가린 채로 자신의 오른 허벅지에 덧대어 있는 화살집에 손을 가져간다.
"그리고 세상 만물을 이루는 마력을 움직이는 거대한 법칙. 그것을 "리", 쉽게 말해 이치라고도 하지."
마치 눈으로 보는 것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 긴 화살 하나를 꺼낸 그는 유려한 동작으로 시위를 내걸어 화살을 발사했다.
휘익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내며 나아간 푸른 화살은 그가 가리켰던 나무줄기에 정확히 박힌다.
"우와..."
클로에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인환은 전날 클로에가 보았던 통아를 꺼내 들며 읊조리듯 말한다.
"기를 다루기 위해 인간은 이치를 품어야 하나, 한 사람 인간이 품을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는 법."
"혜국의 무인들은 각자의 무공을 끊임없이 수련하며, 무공에 맞게 '기'를 움직일 '이치'를 몸에 품는다."
그가 말을 마친 그 순간. 통아를 화살집에 찌르듯 집어넣어 짧은 화살을 장착한 인환은 그대로 시위를 당긴다.
통아는 푸른 빛으로 빛났고, 인환이 시위를 해방하자 짧은 화살만이 푸른 빛을 머금은 채 나무로 나아갔다.
"비로소 익히게 된 '이치'는 곧 그 인간이 걸을 길, '도'가 된다."
모든 동작을 마친 인환은 그제야 자기 눈을 가렸던 두건을 벗고, 표적을 확인했다.
나무줄기에는 긴 화살과 짧은 화살이 있는데, 자로 잰 듯 좌우로 나란히 박혀 있었다.
"내 실력도 많이 녹슬었군."
"... 저게요?"
"소싯적에는 두 발을 한 곳에 맞췄었다."
그의 말에 클로에는 아직도 나무줄기를 멍하니 보고 할 말을 잃은 상태. 시연을 마친 인환은 클로에의 근처로 와 앉았다.
"혜국의 무인들은 어릴 적부터 가문에 전해 내려오는 무공을 수련한다. 나는 그 무기가 활이었을 뿐이다."
"활..."
그의 말에 클로에는... 낮에 서준이 끝내 말하려 하지 않았던 내용을 기억해냈다.
"그런데 아저씨는 환도도 잘 쓰시잖아요."
"... 잘 쓰는지는 모르겠구나."
"어제 놀들을 휙 휙 하고 죽이셨잖아요!"
"뭐... 그 정도 실력은 당연한 거지. 칼은 내게 있어 일탈과도 같았지만, 내 인생의 한 부분이기도 하니까."
"인환 조장님. 하나 물어봐도 돼요?"
"일단 들어보자꾸나."
"혹시... 혹시나 해서 그런 건데요. 환도랑 아저씨 집안일이랑 연관 같은 게 있나요?
"흠."
턱수염을 쓸며 생각에 잠긴 인환.
그는 물었다.
"서준이 말한 것이냐?"
"아! 그게...! 서준 아저씨가 혼잣말하시는 걸 제가 들어버렸는데! 절대로 말씀을 안 해주시겠다고 하셔서...!"
혹시나 해서는 안 될 말을 해버린 걸까. 괜히 입을 놀려서 서준 아저씨에게도 피해를 주는 건 아닐까. 그런 걱정 속에서 클로에는 공황 상태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인환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꾸짖으려는 게 아니다. 사실 막상 들어보면 별것도 아닌 이야기니까."
"그런...가요?"
"어차피 너에게 해줄 말이기도 했다."
"네?"
인환의 예상치 못한 말에 다시 한번 당황하게 된 클로에였다.
"정확히는. 어떤 수인이 내게 전해준 이야기를 대신 전해주려 했지. 그걸 알려주기 위해서는 어차피 말해줄 것이었어."
"어떤 수인...?"
"그래. 너는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용병 업계에선 꽤 유명해진 사람이지."
"그게 누군데요?"
"그 사람의 이름은... 케르티아. 지금은 떠돌이 용병들의 여왕이라 불린다."
인환이 한 용병의 이름을 말하자, 클로에는 다시 한번 인환에게 확인했다.
"설마. 에퀼리아 위쪽 바다에서 고래 재앙을 토벌했다던 백호족 용병이요?"
"알고 있느냐?"
"당연히 알죠! 세상 밖으로 나오는 수인들은 전부 그 사람의 명성 때문에 나오는걸요! 그분이랑 아저씨가 아는 사이라고요?"
"그렇지. 같이 작전도 함께 했으니까."
"빨리. 빨리 말해주세요! 그 사람이랑 무슨 작전을 한 건데요!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그녀의 닦달에 인환은 곤란하다는 듯 말한다.
"보채지 마라. 천천히 얘기해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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