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화 〉 285. 서인환과 어떤 수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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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5. 서인환과 어떤 수인 (1)
동방에 있는 혜세국의 군대는 오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그 밑으로 각 방위의 이름을 딴 다섯 부대가 존재한다.
전군, 중군, 후군, 좌군, 우군.
이들 중 좌군과 우군은 일반 백성들이 군역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모인 부대로, 후방 보급이나 지원이 주 임무다.
그렇기에 이 둘은 전투 부대로서의 성격은 그리 강하지 않으며, 주 전력으로 취급되는 경우도 매우 적은 편이다.
반면 남은 세 부대... 전군과 중군 그리고 후군은 직접 전투를 수행하는 부대로서, 그들은 모두 직업 군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중 후군은 원거리 무기와 마법 운용을 통한 저격과 폭격에 특화된 부대.
인환은 대대로 후군의 장군 혹은 부장직을 지낸 서씨 가문의 장남이었다.
인환은 자신 역시 장군이 될 것이라는 꿈을 품고 활을 수련하였으며, 그 활 솜씨만큼은 하늘이 내린 재능을 갖추었다는 평을 들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가 성인이 된 이후로 점점 세상을 알게 되니, 그저 맹목적으로 가문의 뜻을 따르기만은 할 수 없었다.
어느 날. 서씨 가문의 외당.
인환은 후군의 장군이자 자신의 아버지인 서평강?에게 말한다.
"아버지. 언제까지 잠자코 있으실 겁니까."
"... 무슨 소리냐."
"김원상 그자가 나라를 자기 손에 넣고 쥐락펴락하는 꼴을 언제까지 보고만 계실 겁니까."
"그런 소리를 삼가라. 대감 역시 이 나라를 위하는 분이야. 우리 가문의 장남인 네가 그런 소리를 함부로 해선 아니 된다."
젊은 인환은 참다못해 소리 지른다.
"아버지. 김원상 그자는 공주 윤의 모친을 죽인 자입니다. 나라를 섬기는 자로서 어찌 그를 좌시할 수 있겠습니까!"
"어허! 왜 네가 저자에 떠도는 헛소문을 믿는 것이더냐! 말을 똑바로 하지 못할까!"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진 않지요. 출신이 아무리 미천하다 한들, 명월주의 아이를 낳은 시점에서 그분은 왕후였습니다."
"인환이 이 놈...!"
이후 기나긴 설전이 벌어졌으나... 그들의 대화는 끝끝내 서로에게 닿지 않았다.
결국 포기한 인환이 말했다.
"아버지... 아니. 장군께서 뜻이 그러하시다면, 저는 후군의 길을 관두겠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차라리 어린 공주마마의 편에 서신 유정겸 장군의 밑으로 가겠습니다."
"우리 서씨 가문의 장남인 네가... 감히 그 칼쟁이 소굴에 들겠다는 것이더냐?"
"예."
원거리 무기의 입지가 좋지 않은 에코니아에서 활의 한계를 끌어올린 혜세국의 후군이라 해도, 중검술을 활용한 환도의 파괴력을 자랑하는 전군보다는 그 입지가 좋지는 못한 편이다.
그렇기에 몇몇 서씨 가문의 무인들은 전군의 무인들을 멀리하는 편이었고, 가주인 서평강 역시 그런 사람 중 하나. 결국 그는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나오는 대로 말을 내뱉었다.
"평생 활만 수련해온 놈이 전군을 가겠다니. 네 놈 마음대로 해라! 나는 말리지 않는다!"
"예. 어차피 그럴 작정이었습니다."
외당 건물 밖으로 나가버리는 인환.
그의 뒤에서는 동생이 아버지를 말리는 소리가 들려오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가문을 떠난 지 오래였다.
그렇게 그는 서씨 가문의 장남, 활의 천재라는 직함을 버리고 전군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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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환의 옛이야기를 듣던 클로에가 말한다.
"그럼. 조장님이 원래 장군님댁의 아드님이라는 거에요? 차기 장군이였고요?"
"다 옛이야기다. 그리고 내가 무조건 되는 것도 아니었어."
"아무리 아버지 되시는 분과 말이 안 통했어도 그렇지, 어쩜 그리 쉽게 나오신 거에요? 장군이잖아요. 장군!"
"허허. 세상엔 직함보다 중요한 게 많다."
"저는 모르겠네요..."
사실 정치적인 이야기는 쏙 빼놓고 설명했던 인환이었기에, 클로에가 이해한 것은 그저 '아버지와 싸워 집을 나왔다.'라는 것뿐.
고작 그런 이유로 명예와 인정을 포기한다니, 클로에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
그래도 대인관계 면에서 눈치가 빠른 클로에는 왠지 모를 위화감을 느꼈고, 지금의 이야기를 다른 주제로 돌리기로 했다.
"그럼. 용병 여왕님과는 어떻게 만나신 거에요?"
"그 전의 이야기부터 해야겠지. 집을 나선 나는 전군의 일원이 되었으나, 그리 평탄하진 않았단다."
"그... 쓰는 무기가 다르니까요?"
"그렇지. 결국 군은 실력과 기강이 중요하니까. 나는 말단 병졸부터 시작해야만 했고, 서준과도 그때 만났다."
"우와..."
"그 때는 정말 미쳐있었지. 온종일 시간만 나면 칼만을 휘둘렀으니까. 사실 활과 통아를 버릴 생각도 했었다."
"... 다행히 버리진 않으셨네요."
"... 그렇지."
인환은 잠시 옛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정한 길이 의로운 길이었음을 믿어 의심치 않으나, 부모에게 불효를 저질렀다는 자각도 있다.
정치적인 견해 차이를 배제한다면, 아버지로서의 서평강은 꽤 좋은 사람이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목을 가다듬은 인환이 말했다.
"아무리 집을 나왔어도 아버지는 아버지니까."
"그렇...죠."
"여하튼. 당시의 나는 활을 몸에 지니기만 했고 쓴 적은 없었다. 오직 칼의 수련만을 계속했지. 그렇게 5년의 세월이 흘렀을까. 어느 날 혜세국에 2급 재앙, 그러니까 B급 재앙이 나타났다."
"혹시. 그때 만나신 거에요?"
"그래. 정말이지 처음에는... 단순히 정신 나간 여자인 줄로만 알았다."
"정신 나간 여자..."
* * *
한 분야에서 경지에 도달한 자는 다른 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기 마련이다.
그래서일까. 5년의 세월 동안 인환이 해온 노력은 헛되지 않았고, 환도를 일정 수준 자유롭게 다룰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일반 병졸의 지위에서 자신을 받아준 유정겸 장군을 호위하는 직책까지 단숨에 오를 수 있었으나...
동시에 그는 딱 거기까지였다.
인환은 어디까지나 환도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수준까지 나아갔을 뿐, 중검술을 제대로 펼치는 경지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유는 인환의 몸이 활을 사용하는 데 적합하기 때문이었다.
활시위를 당기고, 화살에는 마력을 주입하며, 목표에 필중시키는 것에는 체내 마력의 효율적인 분배와 밸런스가 중요했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전군의 중검술은 체내 마력의 밸런스를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한 점에 집중된 강한 일격을 중시한다.
애초에 그 결부터가 다른 것이었다.
하지만 인환은 그걸 자각하고 있음에도 활을 들지 않았다. 자신이 선택한 길에서 벗어나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전군 장군부의 보초를 서고 있던 인환의 앞에 수상할 정도로 부담스러운 수인 여성이 나타났다.
백호의 귀와 꼬리. 어깨 아래까지 내려온 머리는 하얀색에 검은 브릿지가 포인트. 얼굴은 꽤 장난스러운 인상을 풍긴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저 평범한 백호족 여성이겠지만, 그녀의 의상이 문제였다.
짧은 핫팬츠에 배꼽을 다 드러낸 탱크 톱. 그 위에 흰 코트는 어깨에 걸쳤을 뿐, 그 팔은 맨살이 다 드러낸 상태.
그런 팔로 팔짱까지 껴 가슴의 존재감을 한 층 돋보이게 하고 있으니, 동방에서 나고 자란 인환으로선 더욱 부담스럽게 보인다.
그녀가 상체를 인환 쪽으로 굽히며, 쾌활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안녕. 안에 유정겸 장군 있어?"
"갑자기 무슨 일이오."
"나 용병이야. 불러서 왔는데?"
"... 잠시 기다리시오. 확인해보겠소."
인환의 경직된 대답에, 백호족 용병이 가슴을 쭉 펴며 한탄한다.
"아니이~ 이 늙다리는 날 급하게 불러놓고 보초한테 말도 안 해놨네."
"... 뭐요. 늙다리? 당신 지금 유정겸 장군님께 그런 말을 한 거요?"
"그래. 늙다리."
"장군께 그 무슨 무례요!"
"호오..."
용병의 무례에 인환이 소리치자, 여인은 오히려 인환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보았다.
그러더니 눈에 보이지 않을 속도로 양손을 뻗더니, 인환의 양 팔뚝을 만졌다.
"이 녀석. 팔이 다른 녀석들과는 다르게 아주 튼실한데..."
"이... 이게 무슨 짓이오!"
"아니. 거 가만 있어봐... 그런데 참 이상하네... 정말 이상해."
"그만 놓으시오!"
몸을 틀어 여인의 손을 뿌리친 인환은 환도의 손잡이로 손을 옮겼다.
"당신. 아침부터 이게 무슨 행패요!"
"아니... 미안. 나도 모르게."
"지금 와서 무슨 사과야!"
"아이고. 멋대로 만져서 죄송!"
"이 사람이!"
"하하하하!"
그렇게 실랑이 소리가 점점 커지자...
군부 안에서 누군가가 나왔다. 전군 병사 중 한 명이자 인환의 동기, 서준이였다.
"야. 인환아. 그 백호족 여자 한 명이 오면 네가 데리고 들어오... 아. 왔구먼."
"뭐?"
"장군께서 저분 데리고 들어오라신다. 네가 직접 모시고 오래."
"……."
인환이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백호족 여성을 흘겨보자, 그녀는 우쭐거리듯 가슴을 부풀리며 말했다.
"그거 봐. 내 말 맞지?"
인환의 표정은 한 층 썩어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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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도착한 장군의 집무실.
"허허! 인환아. 미안하다. 내가 미리 말했어야 했는데 말이다."
"... 아닙니다. 장군."
갑옷 차림인 백발의 노장, 유정겸이 인환에게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옆에서 백호족 여인이 말한다.
"늙다리. 이번엔 무슨 일을 시키려고?"
"아. 그래. 케르티아. 자네에게는 이번 작전에서 척후 부대의 엄호를 맡기겠네."
"뭐어. 할아범이면 돈은 제대로 줄 거니까. 이번에도 일은 맡겨 둬."
할아범. 그런 말을 듣고도 유정겸 장군은 다시 한번 크게 웃으며 말한다.
"허허허! 이 암고양이 년이 나한테 말하는 것 보소. 담력 하나는 끝내준다니까! 요즘 우리 젊은것들이랑은 달라!"
"하하! 할아범도 지금껏 내가 만나본 사람들이랑은 다른걸. 날 암고양이 년이라 부르는 건 할아범이 처음이야!"
"그거참 영광이군. 허허허!"
"아. 역시 이 미친 할아범은 뭣보다 말이 통하는 게 제일 좋다니까!"
"허허허허!"
"하하하하!"
이제는 둘이서 껄껄거리며 웃기 시작한 유정겸 장군과 케르티아. 인환은 자기 눈과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소탈한 척 행동해도 유정겸은 이 나라를 지탱하는 세 명의 장군 중 하나. 그런 사람이 이런 수상한 수인과 말을 터놓고 떠들고 있다니, 당장에 머리도 어지러워진다.
그렇게 둘의 웃음 타임이 지나가고...
부담스러운 수인 용병 케르티아가 인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아. 할아범. 나 얘 데려갈래."
"아... 인환이?"
"응."
'무슨 미친 소리지?' 인환은 생각했다.
자신은 혜세국 전군의 일원이니, 장군이 용병의 조에 쉽게 편입을 시키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방금 그 상황을 목도한 참이라... 마음속으론 불안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온다.
... 아니나 다를까. 장군은 종말을 고했다.
"그럼 데려가라."
"아니. 장군! 너무 갑작스럽게..."
"허허허!"
인환의 반응에 껄껄 웃는 유정겸.
그는 이내 웃음을 멈추고 말했다.
"케르티아. 잠깐만 나가 있어 주겠나. 이 친구와 할 이야기가 있어서 말일세."
"흐음... 듣고 싶은데. 그래도 나가줄게."
"고맙네."
케르티아가 자리를 비우자...
장군은 평소 인환이 알고 있는 진중한 모습으로 돌아와 말했다.
"인환아."
"예. 장군."
"네가 우리 군에 온 지 벌써 5년인가?"
"... 예."
잠깐 수심에 잠겨있던 노장은... 인환에게 의외의 말을 했다.
"나는 걱정이다. 이게 네 길이 맞는지."
"예?"
"널 전군에 받은 결정을 내 후회하진 않는다. 하지만 지금 이 길이 정녕 네 도에 부합하는 것이냐."
"... 무슨 말씀이신지."
"지금 이 전군에서의 삶이 네가 가려고 했던 길이 맞는가. 그걸 묻는 게다."
"그건... 저 역시 전군에서 지낸 나날을 한시라도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
활의 천재라는 소리를 듣던 인환이 돌연 후군에서 나와 전군으로 왔을 때, 유정겸은 흔쾌히 그를 받아주었다.
하지만 이 경험 많은 노장은 감히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인환의 재능이 썩고 있음을 지금껏 고민하고 있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인환의 대답에 잠깐 고민하던 장군이 말한다.
"그래. 네가 그렇다니 난 믿어주는 것 외에 해줄 것이 없다. 다만 이번에는 저 고양이를 따라가 머리를 좀 식히고 오거라."
"자... 장군?"
"이건 명령이다. 네가 매번 전투때마다 격정적으로 움직이는 걸 보면 내가 편히 쉴 수 없어서 그런다."
그렇게 인환은... 수상할 정도로 부담스러운 수인과 한동안 함께 움직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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