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왕실의 가정교사-124화 (124/215)

〈 124화 〉 2­88 각자의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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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8. 각자의 입장.

가만히 듣고 있던 윤흠서가 질문했다.

"시하 공. 그 누구도 믿지 말라니. 그게 무슨 뜻인지 물어도 되겠소?"

"말 그대로입니다. 시온 자작령에 들어서는 순간, 믿을 수 있는 자는 우리 외에 없습니다."

"그걸 말하는 게 아니오. 당신의 의도를 확실히 알아야만, 우리가 당신의 뜻에 탈 수 있겠지."

... 내가 너무 마음만 앞섰나 보다.

지금 이곳에 오기까지 별다른 설명도 안 했으니까, 이런 반응이 나와도 이상할 게 없다.

나는 한 사람을 불러냈다.

"클로에. 네가 처음 맡았던 임무에서 본 재앙을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다시 묘사해줘."

"... 다시요?"

"그래. 여기 모르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

내 채근에 클로에는 하는 수 없이 말을 시작했다.

금빛으로 빛나는 엄니. 칙칙한 금속 재질의 몸. 불타오르는 발굽. 내가 알고 B급 재앙과 똑같은 형태의 재앙을 묘사해내는 클로에.

재앙이 클로에의 짐마차를 덮치고 유유히 사라졌다는 그 말을 들은 순간, 윤흠서를 비롯한 여러 무인들의 표정은 심각해졌다.

윤흠서가 말했다.

"이건. 솔직히 잘 믿기지 않는군."

"윤 대장님으로서는 그게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클로에는 분명 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 저 아이들을 의심한다는 건 아니었소. 허나 시하 공께서는 따로 믿는 구석이 있는 듯하군."

"힐데스비니를 저렇게나 자세히 묘사하니까요. 수인국의 일반 용병들은 상급 재앙의 외형조차 쉽게 접할 수 없지 않습니까. 거기다 상급 재앙인 걸 알았다면 꼬리가 빠지라 도망쳤겠죠."

"흐음..."

잠시 생각에 잠긴 윤흠서. 그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충분히 일리가 있소. 그렇다면 이는 이곳의 영주라는 마크 테크니와 관련되어 있겠군."

"네. 정확하십니다."

"이 부분은 확실히 이해했소. 다음으로... 해방 교단은 도대체 뭣 하는 단체인 거요?"

…….

이 세상에 해방 교단이라는 단체의 민낯은 지금으로부터 4~5년 뒤에야 알려질 것이다. 그걸 알기에 나는 말하는 게 더욱 조심스러워진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윤 대장님. 저희가 처음 만났을 때. 취조실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하십니까."

윤흠서는 얼굴을 잠시 찌푸려졌다.

그의 동료였던 자의 배신을 알게 된 계기이자, 내 연기에 속아 넘어갔던 일이다. 그에게는 꽤나 아픈 구석이겠지.

그가 답했다.

"그리 좋은 기억은 아니네만. 물론이오."

"굳이 이 일을 꺼내 죄송합니다. 하지만 설명에 필요한 일이니까요."

"괜찮소. 계속하시오."

"이미 말씀드렸지만 인재 人災를 만들어내는 건 불가능합니다. 재앙 역시 마찬가지고요."

"... 그렇지."

"하지만. 지금부터 우리가 마주하게 될 해방 교단은... 적어도 재앙을 유도할 순 있습니다."

"그게 도대체 무슨 뜻이오?"

"말 그대로입니다. 판타스매터의 행동을 제어할 순 없어도, 풀어놓을 수는 있다는 것이죠."

"그런...!"

내 한 마디에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이것만큼은 헤르만에게도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보니, 헤르만을 포함한 모든 이들은 차마 믿기 힘들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들을 둘러본 나는 말을 이어갔다.

"해방 교단. 그들은 재앙을 숭배하는 집단입니다. 하지만 그 민낯은 밝혀지지 않았죠. 우리의 앞에서는 '순수한 의도로 타인을 돕는 척' 연기할 가능성이 큽니다."

"……."

"마크 테크니의 의심스러운 정황과 해방 교단의 출현. 이 두 가지는 절대 우연이 아닐 겁니다."

하나 남은 팔로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민에 빠진 윤흠서.

그와 교대하듯 헤르만이 내게 물었다.

"그러니까. 그 해방 교단이라는 곳의 실체를 파악하기 전까지는 마찰은 일으키지 말고, 충분히 의심만 하고 있으라는 거지?"

"그래. 정확해. 저쪽이 자선 사업을 명목으로 이곳에 온 이상, 우리가 적대할 명분이 없으니까."

"형이 왜 이런 중요한 걸 이제서야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머리를 긁적이며 고민하는 헤르만.

잠시 후 그는 속 편한 말을 내뱉었다.

"알았어. 따로 이유라도 있겠지."

... 내가 지금껏 너무 말도 안 되는 행동만 해왔는데도 그 결과는 항상 좋아서일까.

별다른 설명을 덧붙이지도 않았는데도 날 믿어준다니. 참 녀석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하지만 헤르만이 저렇게 말했어도, 나머지 사람들은 영 신뢰가 가질 않는 모양. 그들의 대표로 윤흠서가 내게 물었다.

"그 주장을 입증할 정황 증거는 있는 거요?"

"죄송합니다. 이번에는 없습니다."

"아니..."

너무 당당하게 증거가 없다고 말해버리니, 윤흠서는 되레 당황하여 말문이 막혔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말을 했다.

"제 말이 쉽게 믿기지 않는다는 것쯤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확신합니다. 저 쓰레기들은 언젠가 이 세상에 큰 혼란을 불러일으킬 겁니다."

"……."

"이번만큼은 절 믿어주세요. 만약 저를 믿지 못하시겠다면, 제가 저것들의 진의를 파악하는 동안만이라도 그들을 의심하고 있어 주세요."

내 말에 경험 많은 무장은 큰 고민에 빠졌다.

사실 재앙의 존재를 '유도'할 수 있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엄청나게 큰 의미가 있다. 현대의 생화학 테러나 핵무기를 발사하는 것과 충분히 맞먹는 일이니까.

이내 고개를 든 윤흠서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조심스레 말했다.

"... 그대에게 부탁 하나 하겠소."

"……."

"이 모든 것을 사실이라 가정했을 때. 우리가 이 일을 도울 이유라도 납득시켜주시오."

... 사실 나와 윤흠서 일행은 신뢰 관계가 아니다. 그보다는 이해가 일치하는 동맹에 가깝지.

그렇기에 그의 요구를 풀어내자면 다음과 같다.

'이 일을 돕는 것이, 자신들이 따르는 혜윤... 즉 유나를 지키는 결과로 이어지는 것인가.'

내 설명을 진실이라 가정했을 때, 이 작전은 뒤가 구린데다 위험하기까지 하다. 모든 개개인이 위험해질 수 있는 데다, 최악의 경우에는 상급 재앙과 맞닥뜨릴 가능성도 있으니까.

내가 이들의 사소한 복수를 돕고, 새로운 삶의 방향을 제시해줬다는 은혜만으론 감히 메울 수 없는 부탁인 셈이다.

하지만 나는 결국 이들의 힘을 빌려야 한다. 나를 부모처럼 따르는 아셰리아 공주를 비롯한 내 학생들, 그리고 그 주변을 지켜야 하니까.

... 결국 나는 이 질문에 잘 답해야 한다.

…….

나는 게임 속 지식과 이곳에서 온 이후로 아이들을 가르치며 배워온 것을 통해 답하기로 했다.

"역사 속에서 에우데미아는 언제나 재앙의 첫 표적이 되어왔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 위협에 맞서 살아남았고, 이들을 중심으로 세계는 살아남았죠."

"... 그렇지."

"그리고 지금. 그와 비슷한 일이 저희 눈앞에서 반복되려 하고 있습니다."

"허나 이건 왕국이 나설 일이 아닌가."

"네. 맞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저라 해도. 이번 일만큼은 왕국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이는 윤 대장님께서 선뜻 저를 믿지 못하시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

"윤 대장님. 만약 에우데미아 왕국이 이들로 인해 쇠퇴한다면, 훗날 '그 사람'의 요구를 쳐낼 외교력을 상실합니다. 왕국의 국력이야말로 그 아이를 지키는 첫 번째 방패입니다."

윤흠서는 내 말을 제대로 알아들었을 것이다.

김원상. 언젠가 충돌하게 될 혜세국의 실세.

내가 알렉산더와 유나의 행복을 지키기로 한 이상, 유나의 존재는 언젠가 들킬 수밖에 없다.

그 순간이 왔을 때 에우데미아가 재앙 극복에 힘을 쏟는 중이라 외교력이 약화되고, 만약 내가 충분한 힘을 기르지 못한다면... 나와 유나는 무사할 수 없다.

반면, 내가 내놓은 답에 윤흠서는 계속해서 내 눈을 뚫어져라 보고 있다. 나는 굳이 그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시선을 피하는 건 신뢰를 주지 못하는 행동이니까.

몇 초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가 마당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시하 공의 언변에는 역시 못 당해내겠군."

"... 감사합니다."

"됐소. 오히려 내가 미안하지. 신세를 지는 건 우리인데, 과한 설명을 부탁한 셈이니까."

"……."

"직속 부대원들에게만 묻겠다. 나는 이번 작전에 따를 것인데... 따로 이의는 있는가?"

윤흠서가 휘하의 다른 무인들에게 물었지만, 그들 역시 별다른 이견은 없는 듯했다.

... 다른 아이들에게도 물어봐야겠지.

"아모스, 아일라. 클로에. 너희는 어떻게 할래."

이름을 불린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물어볼 줄은 몰랐다는 듯, 조금은 당황한 눈치. 클로에와 다른 수인 아이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그리고 아모스부터 차례대로 말했다.

"아는 건 없지만, 할 수 있는 것까지 돕겠소. 어차피 기근이 생긴 건 사실이지 않소."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희들은... 공작님과 계약했으니까요. 말씀해주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거부하면 왕도로 돌려보낼 생각이었는데, 수락해주니 조금은 고마웠다.

나는 준비한 내용을 말하기로 했다.

"그럼 다음 내용으로 넘어가자."

시온 자작령은 영주가 기거하는 중심 소도시 하나와 주변 촌락 네 개로 이루어져 있다.

헤르만이 왕실 그림자들을 통해 알아낸 바로는 그 모든 곳에 해방 교단이 나뉘어 구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상황. 우리 역시 사람을 쪼갤 필요가 있다.

"지금부터 우리는 여섯 조로 나뉘어 행동할 예정이다. 첫 번째 조는 나, 헤르만, 아일라. 우리 셋은 직접 마크 테크니와 접촉하며 중심 소도시를 담당한다."

"알았어~"

"알겠습니다."

다음으로 나는 윤흠서를 보며 말했다.

"그리고 두 번째 윤 대장님이 맡아주세요. 사령부 역할로 모든 촌락의 정보를 취합하고 전달해 주시길 바랍니다. 비상시에는 각 촌락에 지원을 하러 가는 방식으로."

"맡겨두시오."

"나머지 네 조는 수인 두 명에 다른 이들이 세 명씩 붙는다. 수인들은 빠른 발을 이용해 연락책 역할을 수행해. 수인이 하나뿐인 조는 클로에가 직접 맡아."

"알겠습니다!"

이번 시온 자작령에서의 일정은 왕실이나 사대 가문의 조력도 기대할 수 없는 나만의 일이다.

그렇다 보니 조금 걱정도 되고, 긴장도 된다.

"그럼 윤 대장님. 각 촌락으로 향할 조는 대장님께서 짜서 파견해주세요. 정보가 들어올 때마다 저에게 연락해주시고요."

"알겠소."

"헤르만, 아일라. 우리는 오늘 바로 영주관으로 향한다."

"그래."

"알겠습니다."

하지만 내가 걱정한다고 해서 되는 건 없다.

그저 최악의 상황을 피하고자 노력할 뿐.

윤흠서에게 부대 파견을 맡긴 나는 그대로 마크 테크니가 기다리는 영주관으로 향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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