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왕실의 가정교사-126화 (126/215)

〈 126화 〉 2­90. 시온 자작령 ­ 1일 차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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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0. 시온 자작령 ­ 1일 차 (2)

응접실로 들어서자, 마크 테크니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나를 맞이했다.

"안녕하십니까. 시온 자작령의 영주, 마크 테크니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시하라고 합니다."

듣기로 마크 테크니는 내 맞선 상대인 필로네와 비슷한 나이인 20대 초로 알고 있는데, 그녀보다는 상대적으로 조금 더 약간 나이가 들어 보인다.

그가 노안이라기보다는, 필로네가 젊어 보이는 게 더 맞을 것 같다.

미간 사이의 주름과 매부리코는 그의 인상을 꽤 날카롭게 보이도록 하고, 짧게 친 머리는 뒤로 쓸어 넘긴 모양새. 중세 느낌이 다분한 에우데미아 사람치고는 그 스타일이 시원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가 말했다.

"임시 공작님. 이곳은 왕도 바깥이기에 왕실 가정교사의 직위는 지양하려 하는데, 괜찮으십니까?"

"어떻게 부르시든 상관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자리에 앉으시죠."

그래도 나름 고위 귀족으로 살아온 세월이 있어서일까. 그는 능숙하게 나를 손님용 소파로 인도했고, 아일라는 나를 보좌하듯 내 옆에 섰다.

내 맞은편에 앉은 마크 테크니는 난처한 기색을 표하며 말했다.

"먼저... 이걸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영지의 사정이 그리 좋지는 않은데, 이렇게 임시 공작님을 모시게 되어 송구스럽습니다."

"아뇨. 전혀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제가 급작스럽게 드린 연락이지 않습니까. 오히려 방문을 허가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하.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정말이지 귀족다운 체면치레가 끝나고, 마크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제가 조금 실례가 될 수도 있는 질문을 올려도 되겠습니까?"

"이곳의 영주는 마크 테크니, 당신입니다.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그럼... 명성이 자자하신 공작님께서는 어떤 일로 찾아오셨는지요?"

"아.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앉은 자리에서 몸을 뒤로 쭉 기대며 팔짱을 낀 나는 최대한 곤란한 표정을 만들었다. 다리를 꼬고 한 손으로 입을 가리는 건 덤이다.

"제 세계에는 상부상조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서로 어려울 때는 도와라. 뭐 그런 소리죠."

"그것참 좋은 단어군요."

"그리고. 사실 마크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이 에코니아라는 세계에 떨어진 지 겨우 여섯 달밖에 되지 않은 표류자에 불과합니다."

"공작님께서 그리 겸손하셔서야..."

"아뇨. 저는 제 입장 정도는 명확히 알고 있습니다. 한낱 표류자로서, 이곳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는 증명을 해야 하는 입장이죠."

"흐음."

내 의중을 짐작하는 듯한 마크 테크니에게, 나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마침 이 근처에 휴가를 나오는데, 시온 자작령에 심한 기근이 돌고 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접했지 뭡니까. 저로서는 마땅히 도와야죠."

그는 한순간에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다.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 물론 내 세계에서는 웃으면서 돕겠다는 사람에게 침을 뱉기도 하지만, 여기 귀족들은 그 정도까지로 미치진 않았다.

아니. 그러고 싶어도 차마 하지 못한다는 게 더 올바른 표현이다. 최소한의 사리 분별은 귀족으로서 살기 위한 최소 조건이니까.

멍해져 있던 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공작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는 잘 알겠습니다. 서로 어려운 상황에 놓였으니, 저희 영지를 돕고 평판을 얻으시겠다. 그런 의미이십니까."

"그렇게 생각해주시면 고마울 따름이죠."

"그 뜻은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런데?"

"제가 맡긴 의뢰를 실패한 수인 놈들을 거두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역시나 이렇게 나오는구나.

그가 나를 경계하고 있던, 하지 않던, 이 질문만큼은 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이조차 예상하지 못했다면, 그 쓰레기 게임의 루트를 99개나 공략하며 버렸던 시간만 아까워진다.

나는 태연하게 준비해둔 답을 내놓았다.

"네. 그렇습니다."

"... 예?"

"어쩌다 보니 그 수인들을 거두긴 했습니다만... 문제라도 되는건지요?"

"그건..."

나는 그에게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뭐... 그 아이들이 B급 재앙 힐데스비니를 보았다고는 하는데, 영 신뢰가 가질 않는 말이었죠. 재앙 경보조차 없지 않았습니까."

"……."

"사실 마크님의 의뢰에 실패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이미 계약서 작성이 끝난 상황이었답니다. 귀족이 땅에 떨어진 말을 주워서야 안 될 노릇이죠."

"하하... 그것도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용병 길드로부터 그 녀석들이 영 이상한 소문을 내고 다닌다고 전해 들어 걱정이 앞섰습니다. 죄송합니다."

…….

애써 노력한 건 가상하다만,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는 애써 표정을 감추려 하는 게 더 큰 독이 된다. 감정과 표정이 따로 놀게 되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거짓말은 꼬리가 길면 안 되지. 그 의뢰를 평생의 치부로 알고 있는 그 어린 것들이, 그 일을 함부로 입에 담고 다녔을 리 없다.

마크 테크니가 왜 그 일을 감추려 하는지 모르겠지만, 조사를 진행하다 보면 무언가 나올 것 같다.

나는 표정을 바꾸지 않고 말했다.

"뭐. 한 마디 헛소문을 부정하는 데는 꽤 힘이 드니까요. 이해합니다."

"하하. 넓으신 아량에 감사드립니다."

"제가 질문에 답해드렸으니, 저도 질문 하나를 해도 괜찮겠습니까?"

"... 아. 그러십시오."

"자작령에 해방 교단이라는 단체가 와서 구제를 돕고 있다던데요."

"아. 그렇습니다."

사실 마크 테크니와 해방 교단의 유착은 의심만 하고 있을 뿐, 확신은 없다. 그 역시 해방 교단에 이용만 당하고 있을 가능성도 열어둬야 한다.

나는 물었다.

"그 단체는 뭣 하는 단체입니까?"

"어느 날 갑자기 식량을 들고 찾아와서는 구제 활동을 돕겠다더군요. 저도 이 이상은 모릅니다. 그런데 이건 갑자기 왜 물어보시는 건지..."

"오는 길에 수상한 자들이 와있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제가 그 단체에 대해 하는 것이 없어서요."

"그렇군요."

"혹시. 총책임자는 만나 보셨습니까?"

"자신이 교단의 주교라고 하더군요. 이상한 낌새는 없었습니다."

주교라... 상당히 높은 직책이다.

게임 내 능력치로 따지자면 팔이 온전한 윤흠서나 헤르만과 동격. 사람으로 따지면 기사 한둘 정도는 손쉽게 해치우는 정도다.

그래도 결국 이곳에 주교는 하나일 테니, 나머지를 정리하고 붙으면 승산은 있겠지.

…….

하지만 여기서 변수가 있다.

해방 교단의 개개인은 그 출신이 너무 다양한 편이라, 그들의 전투 스타일 역시 천차만별이다.

누군가는 검과 칼을 휘두르고.

누군가는 방패 날로 내려찍고.

누군가는 수인의 힘을 내뿜고.

누군가는 뒤에서 암살 시도를.

누군가는 온갖 해괴한 마법을.

심지어 누군가는 치유 마법을.

그 게임에서는 전부 칙칙한 망토에 똑같은 네임 태그를 달고 있었던지라, 개개인과 맞서기 전까지 그 전투 방식을 파악할 수 없었다.

물론 교단원 중에는 비전투원도 존재하지만, 만약 우리 일행과 상성이 안 좋은 놈들이 이곳에 잔뜩 깔려 있다면 희생이 커질 우려가 있다.

교단의 의도를 파헤치는 게 목적이라 몰래 죽여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일단 저쪽의 전력과 의도를 파악할 때까지 조금은 사려야겠다.

나는 마크에게 말했다.

"마크님. 그럼 제가 그와 접촉해보고, 구제 계획을 상의해도 될까요?"

"주교와 만나보시겠다는 겁니까?"

"네. 이왕이면 만나서 서로의 사정을 털어놓고 조율하는 게 낫겠지요."

"흐음... 말씀드리긴 부끄럽지만, 어디까지나 저는 교단의 도움을 받는 처지입니다. 제가 판단할 일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그 정도 대답이면 충분합니다. 대신 영지의 상황 정도만 알려주세요."

"아... 지금 당장 타운의 식량 사정은 괜찮습니다. 그런데 주변 촌락들의 상황이 영 좋지 않습니다."

"그렇군요."

"그 이외에는..."

이후 마크 테크니로부터 전반적인 영지의 식량 상황을 공유받았지만, 이미 헤르만에게 들은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 이 정도면 오늘 해야 할 대화는 끝인가.

마크 테크니는 나름대로 변경백 가문의 자제라 기본적인 행동거지는 갖춘 인간이다. 여기서 더 캐물어 봐야 얻어낼 건 없을 것 같다.

일정이 촉박하니 거리나 둘러봐야겠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저녁 만찬이라도 대접해드려야 할 텐데. 벌써 가시는 겁니까?"

"사실 학생들과 약속해서요. 저녁 식사만큼은 메디아 호수의 별장에서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

"아..."

예상치 못한 답변이었는지, 마크 테크니는 적잖이 당황한 모양.

자작령 내에서는 들고 온 물 말고는 입에도 대지 않을 생각이지만, 그렇다고 이게 거짓말인 것도 아니다. 공주님이 어찌나 부루퉁해 있던지, 이런 약속을 걸고서야 가라앉았기 때문.

... 사실 무섭다는 느낌보다는 어린애가 귀엽단 느낌이 훨씬 강했지만.

마크 테크니는 말했다.

"학생분들을 아끼시는 분이시군요."

"아낄 수밖에 없지요. 다들 하나같이 귀엽고 착하신 분들이니까요."

"... 그렇군요. 혹시나 부탁하실 일이 생기면 언제나 찾아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 * *

이후 우리는 마차를 타고 영주관을 나와 시온 타운을 둘러보게 되었다.

영지에 처음 진입했을 때처럼, 다니는 사람은 그다지 없는 편이다. 고스트 타운이라는 말이 떠오르는 수준.

이걸 다시 보니 의문 하나가 떠오른다.

"음..."

"왜. 무슨 일 있었어?"

"마크 테크니는 이곳 시온 타운은 식량 사정이 괜찮다고 했었거든. 그런데 왜 상점들은 전부 문을 닫은 거지?"

"물어보지, 그랬어."

"... 근거가 확실하지 않은 걸 캐물으면 의심을 사버리게 되잖아."

"그건... 확실히 그렇네."

"사실 이상한 건 이거뿐만이 아니야."

내가 고민에 빠져있자, 아일라가 말했다.

"여기는 공작님께서 경계하시는 해방 교단이라는 자들이 전혀 없네요."

"내가 생각하는 것도 그거야. 왜 그 검은 후드 놈들이 하나도 없는 거지?"

"혹시나 식량 사정이 괜찮아서 그런 걸까요."

우리 대화에 헤르만이 끼어들었다.

"그럼 다른 촌락들에 교단이 파견된 게 아닐까. 너무 조급해하지 말라고. 별걸 다 의심하다 보면 진실은 더 멀어지는 법이야."

"... 죄송합니다만, 헤르만 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조금 안 어울리십니다."

"내가 왜?"

"그런 말씀은 시하 공작님께서 말씀하시는 게 훨씬 어울리는..."

"... 야. 그럼 난 뭐라 해야 하는데."

"평소의 헤르만 님이었다면 조급해하지 말라는 선에서 끊으셨겠죠."

"진짜. 말은 또박또박 잘하네."

"감사합니다."

"칭찬 아니야."

…….

지금은 헤르만의 말이 옳다.

내가 해방 교단의 실체를 아는 유일한 사람이긴 해도, 지금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으면 그것 역시 진실을 가리는 일이다.

특정 관점에 생각이 먹혀버리면 세상을 보는 눈이 가려지니까. 너무 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나는 헤르만에게 물었다.

"헤르만. 지금 몇 시야?"

"음... 지금 네 시야."

"의외로 시간이 오래 걸렸네."

"어쩔 수 없지. 아침에는 임시 거점에서 갔어야 했고 면담에도 시간을 꽤 투자했잖아?"

"그렇지. 일단 우린 메디아 호수로 돌아가자. 해방 교단 소식은 내일 윤흠서 대장이 취합한 정보로 확인하자고."

"알았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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