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화 〉 292. 시온 자작령 2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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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2. 시온 자작령 2일차
"제가 직접 이 마을을 비롯한 시온 자작령의 실태를 전부 조사하고, 백성들이 자기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 정도로 원조하겠습니다."
내 말에 사제의 표정이 일그러진 그 순간.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큼은 확신했다.
이 쓰레기들은 내가 시온 자작령에 관여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내가 이곳에 있는 것도, 원조를 하는 것도, 백성들의 삶을 원상태로 되돌리는 것도. 그 무엇도 원치 않는다.
하지만 그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이 역시 당연한 일이다.
이 쓰레기는 지금 머릿속으로 모든 상황을 가정해가며 치열하게 셈하고 있을 테지만, 그 어떤 명목으로도 내 제안을 물리칠 수 없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왕국의 공작이 그들의 선행에 감격해 직접 돕겠다고 한 셈이니까.
... 나는 그를 조금 더 몰아붙이기로 했다.
"흠. 제가 실언이라도 했나요? 주민들을 위해 애써 이곳을 찾으신 분들이라면 제 제안에 마땅히 기뻐하실 줄 알았는데요."
"아. 아닙니다. 마침 저희도 힘에 부치던 차였습니다. 공작님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그거 다행이군요. 혹여 교단 분들께도 필요한 물품이 있다면, 지체 없이 말씀해주시길 바랍니다."
"... 알겠습니다."
모든 상황을 가정한다. 그런 사고는 점점 자신을 갉아먹으며 몰아붙이기 마련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가정적 사고를 하는 사람에게 가장 좆같은 일이 뭔지 알고 있다.
왜냐하면. 어릴 적부터 그런 사고에 익숙했던 나도 그 게임에서 많이 당했으니까.
이런 때는 불안을 한 숟가락만 더하면 된다.
"그나저나 참 이상하네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보고에는 촌락민들이 문을 걸어 잠갔다는 정보는 없었는데 말이죠. 지금 이 시기는 농사가 한창 바쁠 때가 아닙니까."
"……."
"정말 이상하군요. 사제님. 사제님께서는 혹시 알고 계신 게 있으십니까."
잠깐 고민에 빠져있던 사제가 다시 한번 웃는 얼굴을 만들어내며 말했다.
"사실 마을에 돌림병이 돌아 임시로 통행을 제한했습니다. 이대로 조사를 진행하시면 공작님의 수하들마저 감염될 우려가..."
"그럼 더더욱 확인해봐야겠네요."
"예?"
"기근 탓으로 몸이 허약해진 주민들이 병에 걸렸겠지요. 촌장님과 교단 분들께선 꽤 멀쩡하시지 않습니까. 제 수하들 역시 건강하니, 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림도 없는 일이다.
지금 이 사제는 정보가 부족한 순간에서 나름 합리적인 답을 끌어내려 했겠지만... 사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가 택해야 한 답은 침묵이었다.
내가 지금 이 멍청이들보다 훨씬 정보력 면에서는 앞서고 있으니까.
너희는 언제나 타인의 머리 꼭대기에 있는 듯 행동하며 행동을 유도했었지. 하지만 난 이미 이 쓰레기들이 인두겁 안에 어떤 모습을 숨겨뒀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거기다 헤르만이 그림자들을 철수시킨 지 닷새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 사이 전염병이 돌아 격리 조치를 취했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이번에는 사제의 얼굴이 무너지진 않았으나, 그 미소가 아예 굳어버린 상태. 여기서 더 몰아붙이면 해방 교단의 경계심을 사게 될 것만 같다.
오늘은 여기까지.
"사제께서는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 없습니다."
"그럼 저는 이틀 뒤 약재와 식량를 구비해 다시 방문하겠습니다. 그동안 제 수하들과 잘 지내주시길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공작님."
"아. 따로 필요한 것은 없으신지요? 다른 교인분들과 조율해서 제게 알려주시지요."
"괜찮습니다. 배려 감사드립니다."
나는 근처에서 기다리던 헤르만을 불렀다.
"헤르만! 다른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돌아가자!"
"알았어. 마차 끌고 올게."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을 잊으면 안 된다.
교단이 저지르는 행동들의 궁극적인 목적을 알아내는 것.
그걸 위해 나는 이 쓰레기들과 겉보기에만 우호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동시에, 적절히 심기를 건드려 주교를 끌어내야 한다.
* * *
나는 윤흠서가 관리하는 중앙 본부로 돌아가 각 촌락의 실태 조사를 부탁했고, 그 길로 곧장 메디아 호수로 돌아왔다.
이후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이번 호위 단장을 맡은 레온을 찾는 것.
아무래도 식량을 근처 도시에서 공급해와야 할 듯한데, 자작령에 나가 있는 인력들을 빼 오기엔 위험부담이 컸기 때문이다. 해방 교단 사이에 그들을 둔 것만 해도 내가 불안해지는데, 그들의 전력을 줄여서는 안 될 일이다.
나는 별장의 경계를 서고 있는 기사에게 물었다.
"레온은 어디 있나요?"
"대장님께서는 지금 왕자님 일행의 호위를 바로 옆에서 직접 서고 계십니다."
"음... 다들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호수 옆 잔디밭으로 가보시면 큰 나무가 있을 겁니다.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아뇨. 경계를 서는 중 아닙니까. 굳이 그러시지 않아도 됩니다."
나는 헤르만을 돌아보았다.
"헤르만, 너 혹시 잔디밭 위치 알아?"
"그래. 내가 안내해줄게."
그렇게 헤르만의 안내를 받으며 향한 곳은 잔잔한 호수 옆에 넓게 펼쳐진 잔디밭. 그 한편에는 커다란 나무 하나가 세워져 있는데, 그 아래에 내 학생들이 있었다.
워낙 나무가 크다 보니 그늘도 꽤 넓다. 그 그늘 위에는 돗자리 역할을 하는 고급스러운 천 하나가 깔려 있고, 그 근처에는 아담한 티 테이블 하나와 이젤이 놓여있다.
티 테이블 근처에는 알렉산더와 기디언 그리고 레온이 앉아 있었고, 이젤 쪽에는 풍경화를 그리고 있는 아셰리아 공주와 유나가 있다. 아샤는 언제나처럼 공주의 곁이다.
그나저나 저 나무는... 꼭 어디선가 본 것만 같은 기분이 드네. 줄기가 엄청나게 커다란 게, 참 웅장하다고 느끼게 하는 나무다.
그런 생각을 하며 티 테이블 근처에 다가갔더니, 알렉산더가 날 발견했다.
"아. 스승님. 오늘은 일찍 돌아오셨네요. 시온 자작령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 그리 나쁘지는 않아요. 오늘은 간단하게 실태 조사만 부탁해둔 상태입니다. 내일은 식량을 사러 근처 도시로 나가보려 해요."
"스승님께서 수고가 많으십니다."
"다들 오늘은 뭐 하고 있었어요?"
"저는 기디언과 레온에게 부탁해 검술 수련을 하며 몸을 풀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휴식 중이고요. 유나와 여동생은 그림을 그리며 함께 대화하더군요."
"여기까지 와서도 수련이라뇨. 조금은 쉬어도 되요 알렉산더."
"막상 몸을 갑자기 안 쓰니 뻐근하더군요."
알렉산더가 그리 말하자, 아셰리아 공주의 사이에 앉아 있던 유나가 우리 쪽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의부님. 제가 여기서는 조금 쉬라고 해도 전혀 말을 듣지 않습니다."
"유나가 알렉산더를 말렸었나 보네요."
"이왕 의부님의 휴가에 따라 나온 셈이니, 호수 근처에서 얌전히 쉬자고 해도 듣지를 않았습니다."
"뭐... 그거야. 알렉산더니까요."
"그건... 그렇네요. 알렉산더니까요."
"도대체 제 이름에는 무슨 뜻이 담겨 있는 겁니까. 스승님..."
오자마자 시온 자작령 걱정에, 별장에서 기디언과 함께 검술 수련하고 있었다니. 참 열심히 사는 왕자님이다.
"일단 엄청 열심히 한다는 뜻이 담겨 있죠."
"사실 거기에 한 곳에 꽂히면 말은 지지리도 안 듣는다는 의미도 담겨 있어."
"둘 다 너무합니다...
"... 알렉산더. 저는 칭찬만 한 것 같은데요."
"그래도 너무 하십니다."
평소에 알렉산더와 유나가 함께 대화하는 모습을 본 적은 적은데, 유나가 알렉산더를 꽤 대차게 대하는구나.
그래. 그거다 유나.
네가 알렉산더의 고삐를 쥐는 거다! 그래야 저 녀석이 나중에 사고를 안 칠 거야!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더니 레온이 말했다.
"그래도 왕자님의 검술이 훨씬 날카로워지셨습니다. 예전에는 불필요한 움직임도 꽤 많았는데, 그런 부분이 사라지셨거든요. 어떻게 수련하신 겁니까?"
"감사합니다. 레온. 그래도 아직은 부족한걸요."
"왕자님 나이에 그 정도면 대단하죠. 저는 아버지께 엄청나게 굴러서 이 정도인걸요."
왕국에서 강함으로는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기사단장의 아들인 레온이다. 그런 레온이 저 정도로 말하는 거면 알렉산더가 정말로 강해진 거겠지.
상급자에게 입에 발린 칭찬을 하는 것이라 볼 수도 있지만, 지금껏 내가 지켜본 레온은 그 신분에 걸맞지 않게 많이 투박한 편이었다. 레온이 겉치레로 남의 칭찬을 할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그러고 보니 나 레온한테 부탁이 있어서 온 거였지. 그걸 떠올린 나는 그에게 말했다.
"레온. 지금 기사 중에 남는 인원이 있을까요?"
"음... 지금 3교대로 근무를 서고 있어서, 남는 인원은 딱히 없네요. 무슨 일이십니까?"
"이거 곤란하게 됐네요. 필로네 영애가 시온 자작령에 원조할 식량을 보내주기로 약속했는데, 그걸 기다리기엔 당장 쓸 식량이 없어서요."
"그거 큰 일이네요..."
이걸 어찌한다...
해방 교단의 주교 한 명 아래에 움직이는 전투조는 평균 사십 명 정도. 사제 다섯 명에 일반 교인이 나머지를 차지한다. 전력 자체만 생각하면 사제 한 사람이 혜세국 출신의 무인들에게 겨우 맞먹는 수준이라 그리 걱정할 건 아니지만, 너무 변수가 많다.
우리는 각 마을에 인원이 다섯 명씩 나뉘어 있는 상황인데다, 제일 중요한 교단 주교의 실력이 아직 미지수니까.
이런 상황에서 시온 자작령에 상주하는 인원을 빼돌렸다가 전략적으로 얕보이는 건 좋은 판단이 아닌 것 같다. 그건 무력이 맞붙을만 하다는 것과 후방 대기조가 없다는 걸 적에게 알리는 꼴이다.
아무래도 내가 게임을 플레이한 지식이 있다 보니, 내가 모르는 사람은 잘 뽑고 싶지 않았던 게 너무 크게 돌아와 버렸다. 웬만하면 믿을만한 사람을 내가 직접 키워 쓰는 게 낫다는 생각이었는데, 이게 오히려 독으로 작용하다니.
'보급조 정도는 일반 용병을 쓸 걸 그랬나...'
…….
... 아니다. 용병 길드와 마크 테크니가 서로 유착 관계일 것이 확실하다 보니, 이것도 정답은 아니었을 듯하다.
그렇게 마음속으로 고민하고 있는데... 아셰리아 공주님이 내게로 다가오며 말했다.
"선생님."
"아. 공주님."
"제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오오...
역시 똑 부러진 우리 공주님. 없는 인력마저 뚝딱하고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건가.
"묘안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나는 기대감을 품고 물었다.
내 물음에 공주님은 내 눈을 빤히 바라보더니...
"호위 대상이 식량을 사러 가면 되죠. 그럼 호위 인원도 전부 같이 가야 하니까요."
…….
예?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