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화 〉 293. 시온 자작령 3 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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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3. 시온 자작령 3일차.
어제의 결론부터 말하자면. 시하는 결국 아셰리아 공주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사실 시하와 호위단장 레온은 아셰리아 공주의 제안을 거절할 셈이었다. 다섯 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데리고 근처의 도시로 가서 식량을 사 와야 한다니. 이는 호위 난이도를 한없이 끌어올리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꺼냈던 만류의 말들은 아셰리아 공주의 논리에 전부 논파 당했다.
기사들과 보급대원들에게 식량을 사도록 부탁하면 호위 인원이 줄어든다는 말에는...
'애초에 저희는 식량을 사러 나가는 게 아닙니다. 왕실 가정교사와 그 학생들이 도시로 시찰을 나가는 거죠. 값만 치르면 도시의 영주가 식량은 전부 준비해줄 것입니다.'
아셰리아는 아예 대놓고 지방 영주에게 식량 조달을 맡겨버리겠다고 선언해버렸다.
거기다 시찰이 되면 거리 행진을 해야만 하고 자연스레 호위가 힘들어진다는 말에는...
'왕도에서 길을 나서면서 왕도민들의 배웅을 받을 때와 같은 진영으로 호위하시면 될 일입니다. 혹시 레온님과 기사들에게 버거운 일인가요? 그렇다면 가지 않겠습니다.'
어린아이의 아주 뻔하디뻔한 도발에 자존심이 긁힌 레온이 반발. 그 순간 시하의 편은 아무도 남지 않게 되었다.
알렉산더는 자신이 간접적으로나마 도움이 될 수 있다며 들떴고, 다른 아이들도 시골에 내려와 이틀을 보낸 탓에 무료했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시하는 아셰리아 공주와 함께 마차에 타서 시민들에게 이따금 손을 흔들게 되었고, 창문 밖을 의식하는 웃음을 애써 유지하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왠지 모르겠지만 구경꾼들이 왕도보다 많은 것 같은데... 진짜 부담스럽네."
이 도시의 면적이나 규모는 왕도와 비교할 수 없지만, 지금 이 행진에 모여든 사람들의 머릿수만큼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작은 도시에 살아가는 평민들이 왕족을 볼 기회는 흔치 않으니까. 어찌 보면 이들이 왕자와 공주의 행진을 보는 것은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일이 될 수도 있는 법이다.
아셰리아가 시하에게 말했다.
"왕도에서는 왕족의 행진이 흔한 일이니까요. 당장에 아바마마께서 재앙 토벌을 위해 자리를 비우실 때마다 왕도민들은 그 행진을 봐야 하지 않습니까."
"... 그렇긴 하죠."
"선대 왕께서는 왕도민들에게 행진에 일일이 대응하지 말라는 명령까지 내렸답니다. 민생에 도움이 되지 않고, 빠른 출격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에서요."
"그건 참 좋은 선택이네요. 어쩐지 국왕님께서 왕도 거리를 지나시는 걸 구경할 땐, 왜 이렇게 배웅이 적나 싶었어요."
시하는 그렇게 말하면서 마차에 난 창문을 가림막으로 가렸다. 장시간 표정을 유지하고 있던 탓에 피곤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거기다 시온 자작령의 걱정이 마음을 무겁게 하기도 한다. 그가 밀리아 마을에서 교단의 의중을 찌른 게 사실이긴 해도, 아직 그들이 꾸미는 일 자체는 모르니까.
'게임에서 비슷한 루트가 있었나...'
여러 방면으로 생각해보지만, 지금 상황과 딱 맞아떨어지는 내용은 떠오르지 않는다.
"선생님."
"아. 네."
"고민이라도 있으신가요?"
"그냥 생각할 게 조금 있어서요. 구제에 쓰일 식량 배분이나, 구제 우선순위, 질병도 돌고 있다 하니 약재는 뭐가 필요한지... 이런 거요"
"……."
고민에 잠긴 시하를 보는 아셰리아는 조금 답답한 마음이 앞선다. 사실 이 소녀가 휴가를 서둘러 오자고 제시했던 것은 시하와 필로네의 사이를 떨어뜨리고 '자신만이 가진 추억'을 만들고 싶은 마음이 컸으니까.
이를 한 단어로 말하자면... 추월. 아세리아 공주는 필로네 소피아를 추월하고 싶었다.
왕성 동관의 정원에서 휴가를 제안하는 순간. 아셰리아는 휴가지에서 여러 대화를 나누고, 시온 자작령에도 따라가고, 왕도보다 북쪽에 있는 이곳의 꽃밭을 거닐고, 메디아 호수에 비치는 잔잔한 달빛을 볼 계산까지 마쳤다.
하지만 그녀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시하는 메디아 호수에 도착하기도 전에 '시온 자작령에 왕족이 따라오면 큰 혼란이 일어날 수 있다.'는 이유로 동행에 선을 그어버렸다. 그 말이 자기 오라버니를 향한 것임을 알고 있어도, 공주인 자신 역시 '왕족'이라는 테두리에 들어가 있다는 사실에 내심 불편해진다.
그뿐만 아니라 시하의 일정에도 약간의 불만은 있다. 아셰리아가 한껏 볼을 부풀린 덕에 저녁 식사 시간은 사수했지만... 시하는 항상 식사만을 마치고 '내일도 일찍 나가봐서요. 저는 이만 자러 들어가겠습니다.'라는 말만을 남긴 채 자기 방으로 가버린다.
"구제 일정은 언제쯤 끝나는 건가요?"
"글쎄요. 이 일에 갈피가 안 보여서요. 저도 명확하게 답을 드릴 수는 없네요."
"……."
"그래도 꽃 구경은 갈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해볼게요.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 네."
진전 없이 흐르는 시간은 불안을 키우고, 그 불안은 아셰리아를 초조하게만 만든다.
* * *
같은 시각.
시온 자작령 밀리아 마을.
"이거 이상한데..."
시하의 분부에 따라 마을의 실태 조사를 진행하고 있던 인환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그런 그에게 클로에가 물었다.
"왜 그러세요. 조장님?"
"그게... 아니다."
"공작님이 조금 이상한 일을 시키긴 했어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으시니까 그랬겠죠."
"그 문제가 아니란다."
"그럼 뭐예요?"
"……."
단순히 자신의 억측이진 않을까 싶어 클로에와 상의를 하려 했으나, 당장 이곳에는 너무나 눈이 많았다. 지금만 해도 해방 교단과 몇몇 촌락민들이 그들을 주시하는 중이다.
인환은 황급히 말을 돌렸다.
"일단 가택 조사를 진행하자꾸나. 숲 근처에 있는 저 집만 들르면 이제 마지막이겠군."
"네. 제가 먼저 문을 두드려볼게요."
"그래."
그렇게 두 사람은 마을에 인접한 숲에 딱 붙어있는 통나무집을 향해 걸어갔고, 문 앞에 선 클로에는 문을 두드렸다.
"계세요? 공작님 명으로 조사하러 나왔습니다. 계십니까아아. 안 계시나요오오!"
"사람이 없는 건가?"
"... 잠시만요."
문 앞에서 크게 소리를 지르던 클로에는 두 귀를 쫑긋 세우고 문에 대었다.
…….
천을 들썩이는 소리.
미세하게 삐걱거리는 소리.
이건 확실히 사람이 있는 것 같다.
"... 있는데요?"
"하아. 이 짓도 더 하긴 싫은데..."
혼잣말을 내뱉으며 등에 챙겨온 도끼 한 자루를 꺼내 드는 인환.
어제부터 마을의 집들을 하나하나 돌아다니며 조사하러 다녔지만, 그 어느 집도 자발적으로 여는 경우가 없었다. 최상위 귀족인 공작의 명이 있었음에도 이러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인환이 도끼에 조금씩 마력을 불어넣고 준비 자세를 취한 순간, 클로에가 외쳤다.
"지금부터 문을 부술 테니. 안에 계신 분은 혹시라도 문 쪽으로 오지 마세요오오!"
"자. 잠깐! 기다려주세요! 제가 열게요!"
그때야 들려오는 다급한 외침. 목소리를 들어보면 10세 근처의 어린 소녀 같았다.
인환은 마력을 거두며 중얼거렸다.
"진작에 열 것이지."
"그래도 열어주는 게 어디에요. 다른 집들은 죄다 문이 쪼개질 때까지 버텼잖아요."
"... 그건 그렇구나."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통나무집의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한 소녀가 나왔다.
연갈색 머리칼을 지닌 그녀는 며칠간 제대로 먹지도, 씻지도 못해 수척하고 꾀죄죄한 모습이었다.
"죄송해요... 제가 자다가 못 들었어요."
"뭐. 그럴 수도 있지. 나도 자다 보면 가끔 못 들으니까. 들어가 봐도 돼?"
"... 네에."
사실 클로에는 이 소녀가 진즉에 잠에서 깨어난 걸 알고 있었으나, 거짓말을 굳이 밝혀내진 않았다. 그러지 않아도 한껏 움츠러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두막에 들어서게 된 인환과 클로에.
클로에는 시하의 명에 맞게 식량 상황을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지만, 현재 인환의 눈길을 끄는 부분은 다른 부분이었다.
인환은 나무판자로 얼기설기 엮은 듯한 침대 아래와 각 방에 비치된 의류함, 마지막으로 주방에 있는 식기들의 종류와 개수를 확인했다.
'여기도 마찬가지군.'
조사의 마지막 차례인 이 집에 오기 전까지. 인환의 마음속을 계속해서 어지럽히던 한 요소가 있었다.
인환은 소녀에게 물었다.
"이름이 무엇이냐."
"에이네...라고 합니다."
"이 집에서 너 혼자 사는 거니."
"... 네."
"혼자 살게 된 지는 얼마나 되었니."
"이... 일 년. 일 년은 넘었어요."
이건 분명 거짓말이다.
목소리의 떨림이야 인환이 무기를 들고 있기에 겁을 먹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 집에는 다른 이유가 너무나도 많이 존재한다.
아무리 봐도 한 사람이 쓰기엔 너무나 넓은 침대. 최근까지 입은 듯한 어른들의 옷가지. 며칠 전까지는 쓰인 듯한 수많은 식기.
이 모든 것들은 이 소녀가 혼자 살고 있지 않거나, 비교적 최근까지 동거인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인환의 머릿속에는 두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이 아이를 비롯한 모든 아이는 왜 자신들이 고아라는 거짓말을 하는 거지?'
'이런 촌락들은 공동 경제를 형성하기 마련이고, 이 마을 역시 공동 창고가 존재한다. 이런 환경에서 기근이 들었는데, 왜 이 정도로 빈부의 차가 일어나는 거지?'
지금껏 인환이 봐온 가정은 크게 두 부류였다. 비교적 여유가 있는 집과 그렇지 못한 집.
비교적 넓고 좋은 집에 사는 자들은 가족이 사라진 흔적이 없었고, 비축된 식량이 어느 정도 남아있었다.
하지만 이런 허름한 집에 사는 자들의 경우 아이들만 남아있는 경우가 대다수. 어떤 집은 아예 빈집인 경우도 있었다.
'이건 내가 직접 보고해야...'
그렇게 생각한 인환이 말했다.
"클로에. 오늘은 이만하고 철수하자꾸나."
"그럼 임시 캠프로 가는 거예요?"
"아니. 오늘은 본대로 향한다."
"네? 본대는 여기서 거리가 좀 있잖아요."
"... 최종 보고는 직접 해야지."
그렇게 말하며 오두막을 나서려는 순간...
"히이익! 꼬리!"
소녀 에이네가 클로에의 꼬리를 잡아버렸다.
그에 클로에는 화들짝 놀라 그 자리에서 펄쩍 뛰었고, 놀란 소녀는 다급히 잡았었던 꼬리를 손에서 놓았다.
꼬리를 품에 안은 클로에가 다그친다.
"얘! 수인 꼬리는 함부로 잡는 거 아냐!"
"죄... 죄송해요!"
"갑자기 꼬리는 왜 잡은 거야..."
"그게..."
꾀죄죄한 소녀는...
한참을 머뭇거리다 말했다.
"여... 여기 같이 있어 주시면 안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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