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왕실의 가정교사-132화 (132/215)

〈 132화 〉 2­96. 시온 자작령 ­ 4일차 (2)

* * *

2­96. 시온 자작령 ­ 4일차 (2)

예상치 못한 주교의 행동으로 인해 내가 준비해온 대본은 이미 깨져버린 상황.

나는 혹시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주교는 단순히 미행 자체를 문제 삼은 걸까. 아니면 숨은 의도가 있는 걸까...'

사실 사제가 죽든 말든, 그건 내 알 바 아니다. 애초에 시온 자작령에서 교단의 전모를 밝힌 뒤엔 어떤 수를 써서라도 이 쓰레기들을 전부 몰아내야 했으니까.

하지만 주교가 내 답변을 기다리지도 않고 행동할만한 이유는...

…….

지금 당장에 떠오른 건 하나뿐이다.

'마을 주민의 행방불명...'

자신들의 치부를 숨기려는 블러핑. 그 외의 가능성은 지금 당장에 보이지 않는다.

... 그렇다면 난 더 본질에 집중해야지. 이건 내 목적과도 부합하는 방향이기도 하다.

내가 그저 말없이 가만히 있자. 해방 교단의 주교, 절제자 뵈브가 말했다.

"제 처사에 불만족하셨나 보군요."

"흐음..."

"그렇다면 이 사제의 멍청한 명령에 복종한 자들 역시 제 손으로..."

"주교. 하나 물어보지."

"... 말씀하십시오."

"누가 당신 멋대로 손을 쓰라 했었지?"

저 곰탱이 주교는 왜 자기 멋대로 쓰레기들의 목숨을 내 저울 위에 올려놓는 걸까.

자기 손으로 제 전력을 줄여주는 건 고마운 일이지만, 저딴 식으로 내게 무가치한 교인들을 선심 써서 죽여주듯이 행동하는 건 아니꼽기만 하다.

나는 말했다.

"사실 나는 당신이 밀리아 마을을 관리하던 사제와 교인들을 전부 죽인다 해도 신경 쓰지 않아. 왜냐하면 그건 당장에 내 알 바가 아니거든."

"……."

"지금 내 관심사는 일개 종교 단체의 말단이 말을 타고 내 부대를 추격했다는 사실이지."

"... 그렇군요."

"조장. 당신 분대를 미행했다던 놈들의 인상착의와 무장 상태를 말하라."

내 명에 뒤에 있던 척후조장 인환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답한다.

"예. 아군 분대를 미행했던 자는 말을 탄 교인 4명. 어둠이 깊게 깔려있어 전부 확인하지는 못하였으나, 그중 하나는 분명 견인족 수인이었습니다."

인환은 지금 필요한 내용들만을 전해주었다.

방금 그 기분 나쁘게 웃는 사제를 거침없이 날린 것만 봐도... 곰에 가까운 그 모습과는 다르게 머리는 충분히 돌아가는 자일 것이다.

'공작의 수하를 미행하는 데 말을 타고 수인까지 동원했다.'라는 말의 의미 정도는 깨달았겠지.

나는 나른한 느낌으로 주교에게 고했다.

"주교. 나는 해방 교단이 시온 자작령을 돕고 있다는 점은 높게 평가하고 있었어."

"하지만 이딴 헛짓거리로 진정 논해야 할 것을 감추려는 걸 보니, 당신들의 정체성이 매우 의심스러워지려 해. 설명할 수 있겠나."

여기까지.

딱 여기까지 자극하는 것이 해방 교단이 날뛰지 않는 한계선이다. 이 이상 나아가면 이것들은 바로 본모습을 드러낼 게 분명하다.

잠시 후. 마치 거대한 석상이 묵묵히 서 있는 듯한 존재감을 내뿜던 주교가 입을 열었다.

"모든 교인은 공작 앞에 예를 갖추라."

그의 말 한마디에 뒤에 있던 해방 교단의 교인들은 그 자리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주교 역시 마찬가지다.

"죄송합니다. 불경을 저지른 자를 단죄함을 우선한 나머지, 공작께 큰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그 전에. 네 놈 밑의 사제가 내 부하들에게 미행을 붙인 이유부터 알아야겠다."

"... 각 사제들이 마을 주민들을 책임지고 관리하는 것이 원칙입니다만, 공작 휘하의 조장께서 이 마을의 아이를 데려갔다고 하더군요."

"조장. 저 말이 사실이냐."

"예. 질병 감염이 의심되는 여아가 있어, 조속히 본부로 옮겨 진단받도록 하려 했습니다."

"계속 말해보십시오."

내가 인환에게 말을 확인하자, 주교가 말을 이었다.

"그쪽의 조장과 사제의 의견이 충돌하였는데, 분을 삭이지 못한 사제가 단독으로 행동한 결과입니다. 허나 제가 역시 수하의 관리를 소홀히 한 결과니, 이는 제 책임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당신네 교단의 무장 상태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 땅에 살아가기 위해서, 자기 몸 정도는 지킬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 마치 대본이라도 미리 적어둔 것처럼 자연스럽게 말하는 곰 수인. 조금은 꺼림칙할 정도다.

하지만 그가 저렇게까지 말하면 더 이상 다그칠 수만은 없다. 지금은 나도 물러나야 한다.

"그렇군. 자리에서 일어나도 좋습니다."

"... 그 전에 공작께 청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죠."

"제가 밀리아를 찾아온 것은 공작님과 만나게 위함이었습니다. 부디 안을 드셔서 이야기를 나누지 않으시겠습니까."

나를 만나기 위해 찾아왔다라... 꼭 내가 밀리아 마을에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하다.

무슨 꿍꿍이라도 있는 걸까.

나를 헤치려는 의도가 있나 고민해봐도, 지금 상황에서 그가 나를 헤치는 건 손해일 것이다.

그렇다면...

…….

오히려 이건 기회일 수 있다.

애초에 나는 시온 자작령을 관리하는 최고 지도자인 주교를 만나려 하지 않았나.

정보를 얻기 위해서 나는 범의 아가리... 아니, 곰의 아가리에 들어갈 필요성이 있다.

"좋습니다. 그럼 이야기를 나눠보죠."

"감사합니다. 그럼 신속히 자리를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 * *

주교가 자리를 준비한다고는 했지만, 시골 마을에서 그럴듯한 장소를 꾸리기엔 무리가 있었다.

결국 우리는 이 마을에서 그나마 좋은 방이 있는 촌장의 집에서 대화를 나누기로 했다.

아무래도 헤르만이 듣기에도 불편한 대화가 나올 수 있기에, 주교와 나를 제외한 그 누구도 집 안에는 없는 상황.

'촌장 없는 촌장 집'에서 내가 말했다.

"방금 주교께서는 나를 만나러 밀리아로 왔다고 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공작께서는 표류자라고 들었습니다. 이 땅에 표류자가 당도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기에, 한 번쯤 만나 뵙고 싶다고 생각하던 차였습니다."

"그렇군요."

표류자라 해도 내가 그리 대단한 존재인가 하면 그건 또 아닌 것 같은데 말이지.

솔직히 내가 이 세상에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운 때문이었다.

우연히 어릴 적 플레이했던 게임 속에 떨어지고, 우연히 재앙에게서 도망치다 공주님 앞에 쓰러졌고, 우연히 왕실의 가정사에 휩쓸려 가정교사가 되었다.

비록 지난 20년 조금 넘는 세월 동안 온갖 불운을 맛보았지만, 이 세상에서 그 운이 전부 터진 덕분에 살아남은 셈이다.

나는 대화를 이어 나갈 수단으로, 조금만 나 자신을 낮춰 주교를 떠보기로 했다.

"허나 제가 아무리 표류자라 해도 보잘것없는 인간일 뿐이니, 실망이 크시겠습니다."

"아닙니다. 감히 제가 공작님을 평해서야 안 되겠지만, 오히려 제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그런가요?"

"제가 징벌을 행하는 동안에 눈 하나 깜빡하지 않으신 분이 그렇게 자기 자신을 낮추시다니요. 표류자의 세계에는 보기 힘든 일이셨을 텐데 말입니다."

내가 너무 무덤덤했나.

내가 얕잡아 보이는 순간 일행이 위험할 수도 있다 생각했기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었다.

거기다... 어차피 적이 될 예정인 해방 교단의 사제를 왜 걱정해야 하나. 나랑은 생판 남인걸.

솔직히 일일이 반응하기 귀찮았던 게 크다.

그나저나 주교는 표류자에 대해 잘 아는 느낌인데... 그의 발언을 이상하게 생각한 내가 물었다.

"주교께서 말하는 것만 들어보면 마치 표류자의 세계를 잘 아는 듯하군요."

"저희 교단 내에 표류자를 정리한 기록이 꽤 있어서 관심 있게 보았습니다."

"기회가 되면 저도 한번 보고 싶네요."

"하하하. 공작께서 에우데미아 왕실 서고에서 볼 수 있는 것과 크게 다를 바는 없을 겁니다."

오늘 처음으로 곰 다운 모습으로 웃는 주교.

그가 말했다.

"뭐. 교단과 왕국에 남아있는 서적에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아마 역사에 대한 인식이겠지요."

"역사에 대한 인식..."

"그렇습니다."

마음 한편으론 이 사이비 집단에 역사관이 있다는 게 신기하긴 하지만... 지금 내 눈앞의 주교 뵈브를 보면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사람은 내가 아는 그 미친 정신병자 소굴의 주교가 맞나 싶을 정도로 정중하니까.

물론 그렇다고 이들이 미친놈들이라는 생각을 버린 건 아니다. 이 마을에서 일어나는 일만 해도 구린내가 풀풀 나지 않는가.

결국 나는 이들의 실체를 알아내야만 한다.

…….

그나저나 별다른 소득이 없는 느낌인데.

나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질문을 던졌다.

"혹시 그 인식의 차이라는 건... 해방과 관련이 있는 겁니까?"

"호오. 공작께서는 이곳에 오신 뒤로 많은 공부를 하신 듯하군요. 그런 견해를 내비치시다니."

"당장에 교단에서 내걸고 있는 이름부터가 해방이지 않습니까. 당연한 의문이었죠."

"그렇군요..."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긴 주교.

내게 진지한 답변이라도 하려나 보다.

... 내가 이곳을 찾아온 계기 중 하나가 지금에서야 밝혀지는 건가.

그는 잠시 후 말했다.

"공작께서는 해방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해방의 뜻이야 이곳이나 저곳이나 똑같지 않겠습니까. 억압된 것을 풀어내는 거죠."

"그렇죠."

"그나마 제가 알고 있는 건... 200년 전 어떤 표류자가 세상을 해방했다는 것뿐입니다."

"……."

순간 대답이 끊어져 버린 주교.

얼핏 보기에는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미세하게 근육들이 떨리고 있다.

씰룩거리는 입꼬리, 절로 찌푸려지는 미간... 갑자기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거지.

고민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

"그게 세간의 일반적인 인식입니다."

"교단은 다른 견해라도 가지고 있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당당하게 답한 그는...

잠깐 뜸을 들이다 말했다.

"... 분명 정의선 님께서 대단한 표류자임을 부정하는 자는 저희 교단에도 없습니다."

돌연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한 사람의 이름. 정의선. 그것은 해방자의 이름이었다.

나로서는 조금 의외의 발언이다.

애초에 그의 이름 자체가 왕실이나 사대 가문을 제외하면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도 적고, 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이도 적으니까.

지난 반년 동안 '해방자님'이라는 말은 수없이 들었지만, 정의선이라는 이름은 나를 제외하면 쓰는 사람을 본 적이 없을 정도다.

... 그런데 하필 해방 교단이 그를 이름으로 부른다니. 조금은 의아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다.

갑자기 대화 주제에 몰입한 주교가 연극이라도 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공작님. 정의선께서는 도대체 무엇을 해방한 걸까요? 아니, 해방을 시킨 건 맞을까요?"

"글쎄요. 해방을 시켰으니 해방자라는 이름을 붙인 게 아니겠습니까."

"공작께서는 그리 생각하시는군요. 하지만 공작께서는 표류자이시니 알려드리겠습니다. 사실 저희 해방 교단에서는 그리 생각하지 않습니다."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놓는 절제자 뵈브.

마치 신내림을 받은 무당처럼, 신탁을 전하는 계시자처럼.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손짓과 발짓을 곁들이며 말을 이어갔다.

"해방! 에우데미아의 시조 아레트는 근원으로 향해 모든 것을 해방하였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딴 해석을 내어놓는 역사가들의 말은 틀렸습니다!"

"아레트 에우데미아. 그리고 정의선... 그들은 무언가를 해방한 적 따위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봉인자에 가깝죠!"

"저희 해방 교단이야말로! 해방 교단만이! 모든 것의 해방을 위해 달려 나가고 있습니다!"

해방 교단의 주교. 절제자 뵈브. 그는 어느새 양팔을 하늘 높이 벌리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게 신앙에 미친 사람이라는 걸까.

그의 말을 애써 이해하려 하지만, 그 모습이 너무 충격적이라 제대로 머리가 굴러가질 않는다.

"표류자 이시하. 저는 당신에게 묻겠습니다..."

울먹이는 뵈브는...

책상에 양 손을 내려놓으며, 내게 고했다.

"다시 한번. 사도가 되어주실 수 없으십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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