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화 〉 297. 시온 자작령 4일차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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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7. 시온 자작령 4일차 (3)
해방 교단의 주교, 절제자 뵈브의 말을 전부 들은 나는 생각했다.
'이 무슨 개소리야.'
다른 말이야 다 그러려니 하고 넘길 수 있다. 역사는 어차피 승자의 관점에서 정리되는 것일 뿐, 다른 관점이 없는 건 아니니까.
물론 승자의 땅이라 할 수 있는 에우데미아에서 영웅들을 깎아내리는 언행은 이해할 수 없지만, 지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는데 어쩌겠나.
그런데...
'나보고 해방 교단의 사도가 되라고?'
내가 왜 저 미친 사이비 소굴의 사도가 되어달라 하는지, 그 의도를 모르겠다.
애초에 나는 사도라는 직책을 모른다. 정확히는 성서 속에 나오는 십이사도 정도는 알고 있지만, 게임 속 해방 교단의 사도는 본 적이 없다.
그도 그럴게, 내가 플레이했던 게임 본편에서는 주교가 최고 티어의 몹이었으니까. 그 위에 대주교나 교주 정도는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뜬금없이 사도라니.
나는 물었다.
"주교.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시니 그 의도를 모르겠군요. 사도가 도대체 뭡니까?"
"사도... 그들은 진정한 해방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자들이지요."
"제가 그런 사람이라도 된다는 겁니까?"
"예. 미천한 제가 알기로, 공작께서는 언젠가 그곳에 발을 들이신 적이 있습니다."
"……."
... 뭔 개소리야.
내 목표는 어디까지나 교단의 숨은 목적을 찾고, 나아가 그걸 통해 저들의 동향을 예측하는 것.
그것만을 위해 마음속의 답답함을 참아가며 주교의 말을 듣고 있는데,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
조금 전만 해도 역사 속 시조와 해방자는 진정한 해방을 이뤄내지 못했다고 했다. 그런데 내가 그 영역에 도달한 적이 있고, 거기다 그게 해방 교단의 사도가 될 자격이라니.
... 솔직히 미친 소리는 작작 했으면 좋겠다. 나는 사이비 집단의 사도 따위 될 생각은 없으니까.
나는 말했다.
"미안하지만. 저는 지금 이 자리에 만족합니다."
"……."
"제 아래의 학생들을 가르치고, 그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제 삶의 낙이라서요."
"그렇군요."
조금 전까지 울음을 터뜨리며 연설을 토해내던 뵈브는 온데간데없고, 오늘 처음 보았을 때의 주교만이 내 앞에 있었다.
감정 기복이 심한 건지, 자기 관리를 잘 하는 건지. 어찌 보면 절제자라는 이름에 딱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다.
옷을 갈무리한 그가 말했다.
"사람마다 더 중요한 것은 있는 법이지요. 이거 아쉽게 되었습니다. 공작께서 우리 교단에 와주신다면 큰 힘이 되어주셨을 텐데..."
"하하. 과대평가이십니다."
"그러고 보니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군요. 공작께서는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신지요."
... 오늘은 좀 피곤해졌다.
눈앞에서 2미터가 넘는 곰 수인이 울며불며 감정을 토해내는 모습을 보니, 정신이 아득해졌기 때문이다.
교단의 중요한 정보를 캐내지 못했다는 점이 마음에 걸리지만, 당장에 내게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나마 할 말이 있다고 하면 구제 계획 정도인가.
"사실 원래대로라면 이곳의 사제와 구제 계획을 논하려고 했습니다."
"흐음... 구제 계획이야 공작께서 마음 가는 대로 처리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도 논의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닙니다. 공작께서는 현명하신 분이니, 굳이 저희 교단과 상의하실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이것저것 잡다한 조정이라도 해야 하나 싶었는데, 막상 주교는 별 고민도 하지 않고 내게 답했다.
이어서 그는 말했다.
"그럼. 제가 지금 일정이 바쁜지라. 지금 자리를 비워도 되겠습니까?"
"아. 괜찮습니다. 그럼 저도 가져온 식량의 분배도 해야 하니, 자리에서 일어나봐야겠군요."
"그럽시다. 촌장의 집도 비워줘야겠지요. 공작께서는 언제까지 시온에 계실 생각이십니까."
"휴가가 닷새밖에 남지 않아서요. 그중에 문제가 해결되었으면 좋겠네요."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향하는데...
내 앞에서 걷던 주교가 돌연 자리에서 멈추었다.
"아... 마지막으로 감히 제가 공작님께 한 말씀을 올려도 되겠습니까."
갑자기 또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나는 별 생각하지 않고 답했다.
"말씀하셔도 됩니다."
"공작께서는 이 세계에 도달하신 지 반년이 지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그렇다면..."
잠시 생각에 잠긴 채.
머릿속으로 할 말을 고르는듯한 뵈브.
이내 그가 말했다.
"이 세상의 밝은 면에 속지 마시길 바랍니다."
"... 예?"
"저는 표류자가 아니기에 다른 세상은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지요."
"……."
"당신께서 지금 도달하신 이 땅, 에코니아만큼. 겉과 속이 다른 세계는 따로 없을 겁니다."
마치 내 대답을 기다리는 것처럼. 주교는 나를 지그시 돌아보고 있었다.
그의 말은 이전 세상에서도 꽤 많이 들어본 말 중 하나다. 사실 나이 좀 있다는 어른들이 달고 사는 말이 아닌가.
나는 그때와 같은 대답을 하기로 했다.
"굳이 세상까지 걱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당장 제 주변만 보기에도 벅차니까요."
사실 이것뿐이라면 상당히 무른 대답이다.
이게 현실은 전혀 보지 못한 이상론이라는 사실은 이미 이전 세상에서 충분히 깨달았다.
사회 경제적인 힘을 등한시한 탓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지 않았나.
그러니 이곳에서는 내 주변 사람들은 지켜낼 수 있도록 충분한 힘을 갖출 생각이다. 주변이란 범위가 조금 넓어지긴 했어도, 그 정도는 지킬 수 있겠지.
예전 세상에서 입에 담은 말과 지금 주교에게 건넨 말의 내용은 같으나, 지금 내가 마음속에 품은 각오만큼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내 말에 잠시 동안 생각에 잠긴 뵈브.
이내 그는 말했다.
"절제자라는 이름이 부끄러워지는군요."
"……."
"그 마음을 끝까지 간직하길 빌겠습니다."
"뭐. 격려 정도로 듣겠습니다."
"그럼 가시죠."
이후...
촌장의 집을 나선 주교는 그 길로 마을을 떠났고, 나는 마차에 실어 온 식량을 마을 주민들에게 분배하기 시작했다.
* * *
밀리아 마을을 나선 해방 교단의 마차.
그 목적지는 시온 자작령의 영주관이었다.
언젠가 시하가 들렸던 응접실에서, 마크 테크니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주교 뵈브.
허리를 등받이 뒤로 쭉 기대 앉은 그는 시하와의 대면을 하나하나 곱씹는 중이다.
"역시나. 교주님의 안목은 대단하군."
사실 밀리아 마을에서의 촌극은 대부분 뵈브가 계획한 일이었다.
그가 이 뒤틀린 세계의 범인들과 비슷한 면모를 보인다면, 그 자리에서 죽일 생각이었다.
교주께서 점찍으신 그 표류자라면 다른 범인들과는 다른 면모를 보여야만 하니까.
하지만 공작의 대응은 꽤 만족스러웠다.
사제와 교인들을 즉결 심판한 것은 공작의 반응을 보기 위함이었으나, 오히려 그는 한 층 더 나아가 교단의 아픈 부분을 찔렀다.
역사를 대하는 태도 역시 기대 이상이었다. 세상을 유지하기 위한 틀에 갇혀 있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은... 자신을 앞에 두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는 것.
그 표류자는 자기 눈앞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이입할 필요조차 없다는 듯 관망하고 있었다.
주교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중, 응접실 문이 열리면서 마크 테크니가 들어왔다.
"왔는가."
"주교. 기다리게 했군."
마크 테크니는 그대로 주교의 앞에 앉으며 말했다.
"그래. 밀리아에서 임시 공작과 만났다고?"
"그렇지."
"어떤 사람으로 보이던가."
"내가 네놈에게 그걸 알려줄 필요가 있나."
"……."
무심하게 마크를 무시하는 발언을 내뱉은 주교.
마크는 그 자리에서 주교를 쏘아보지만, 절제자 뵈브는 그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말했다.
"그래도 기분이 좋으니 알려주지. 그분의 말씀대로. 진정한 해방을 한 차례 겪은 자 답더군."
"그렇다면..."
"사도가 되기에 충분하다는 뜻이지."
뵈브의 말에 마크 테크니의 얼굴이 흐려진다.
그런 그의 표정을 보고, 뵈브는 등받이에서 허리를 떼고 몸을 앞으로 숙이며 말했다.
"네 놈은 그래서 안 돼."
"그게 무슨 뜻이냐."
"네 놈은 결국 사도에게 속박되어 있을 뿐, 진정한 해방에선 한참 먼 놈이거든."
"……."
말문을 잃은 마크에게 주교가 고했다.
"애초에 네놈은 진정한 해방을 원하진 않아. 네놈이 원하는 건 새로운 속박일 뿐이야."
"결국 테크니라는 작은 굴레에 속박되어 있으며, 한 사도의 온기에 속박되길 바라고 있지."
"그녀에게 자신이 굴러다니는 돌멩이보다도 못한 존재라는 사실은 인식하고 있..."
그 순간.
마크 테크니가 마력을 부여한 팔로 다탁을 내려찍자,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다탁이 쪼개졌다.
"그딴 이야기나 하려고 온 건 아닐 텐데."
"꽤 열이 받으셨나 보군. 그럼, 일 이야기나 해보자고."
다시금 허리를 뒤로 기댄 뵈브가 말했다.
"사흘 뒤 흑옥을 발동시킨다."
"원래 일정은 반년 후였을 텐데."
"나름대로 쓰임새가 있어서 말이야."
"... 그 공작 때문인가?"
"따지고 보면 그렇지."
"……."
"지금도 그는 사도로서 손색은 없지만. 지금은 해방에서 몇 발자국 멀어진 상태여서 말이야."
사실 교단의 주교, 뵈브가 영주관을 찾은 이유는... 공작과의 마지막 대화 때문이다.
'굳이 세상까지 걱정하지 않는다.'
그 한마디 말만큼은 교단의 진정한 해방을 완벽하게 설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다음 말은 주교 뵈브의 심기를 건들이기에 충분한 말이었다.
"다시금 그가 해방에 가까워질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이, 주교의 존재 이유겠지."
"하지만 일리아드님께서는 자신이 돌아오기 전까지 준비만 해두라고..."
뵈브의 말에 반대하는 마크 테크니.
하지만 그는 한 가지 실수를 저질렀다.
한껏 무거워진 목소리로 주교가 말했다.
"잠깐."
"……."
"그녀를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마라. 그녀에게는 교주께서 주신 이름이 따로 있다."
"크흠."
"그리고 지금 내가 명한 것은 교주님의 뜻과 마찬가지다. 그녀라도 거역할 수 없어."
"... 알겠다."
응접실에는 잠시 동안 정적이 감돌고...
"이 선택으로 그가..."
뵈브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해방에 조금이나마 더 가까워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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