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화 〉 298. 시온 자작령 5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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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8. 시온 자작령 5일차.
밀리아 마을 출신의 소녀, 에이네가 본부에 도착한 지 사흘째가 되는 날.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 찾아왔다.
"에이네. 오늘도 자기 전에 깨끗이 씻자."
"응. 클로에 언니."
"자. 가자."
에이네는 오늘도 역시 친절한 수인 언니 클로에를 따라 부대 내 자그마한 욕탕으로 향한다.
욕탕이라고 해봐야 통나무 욕조 하나가 고작이지만, 이 정도만 해도 에이네에게 큰 사치다.
그도 그럴 것이, 올해로 열 살인 그녀는 한적한 촌락에서 평생을 살아온 평민이었으니까.
평소에는 물수건으로 몸을 닦는 게 고작이었고, 특별한 날에나 찬물에 몸을 담글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마을을 찾아온 공작님의 휘하 부대의 본부에서는, 매일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근 채 멍하니 하늘을 볼 수 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있는 경험조차 처음 해본 그녀로서는 지금의 나날들이 너무 행복하다.
그렇게 들뜬 마음으로 욕탕으로 가는 도중, 몇몇 혜세국 무인들이 에이네를 불렀다.
"에이네. 저녁은 잘 먹었냐."
"네에."
"이제야 대답이 좀 마음에 드는구먼.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며칠 굶은 듯이 대답하더니."
"이 사람이. 애한테 무슨 소리야. 그래. 지금은 클로에를 따라 목욕하러 가는 거구나?"
"네에."
"그래. 목욕하고 일찍 자거라."
"네에. 아저씨들도 안녕히 주무세요."
"허허. 거참 귀여운 녀석일세. 그래. 너도 잘 자라. 클로에도 수고하고."
"네. 들어가세요. 아저씨들."
정겹게 인사를 주고받고 갈 길을 간 무인들.
그들과의 거리가 조금은 멀어진 뒤에야, 고양이 수인 클로에는 에이네에게 말을 걸었다.
"봐. 아저씨들 안 무섭지?"
"응."
"첫날에는 그렇게 무서워서 얼어있더니."
"그때는 옆에 차고 계신 칼이 무서워서."
"뭐어... 확실히 여기 아저씨들 인상이나 무기만 보면 조금 무섭긴 하지."
클로에의 맞장구에...
에이네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말했다.
"근데 클로에 언니. 인상이 무섭다는 게 아저씨들한텐 더 심한 욕 아냐?"
"쳇. 이래서 눈치 빠른 꼬맹이는..."
"클로에 언니. 나 맘에 안 들어?"
"... 이게. 언니 놀리는거야?"
"히히."
콩. 하고 클로에에게 쥐어박히는 에이네.
그 강도는 쥐어박았다기보다는 손을 살짝 댔다는 표현이 올바른 정도다.
그리고 어느새 도착한 욕탕.
사용 중 팻말을 입구에 붙여두고 천막에 입장한 클로에는 평소처럼 목욕 준비를 시작했다.
욕조에 온수를 받고, 수건을 챙겨두고.
그러던 중 에이네가 무언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거 내가 해보면 안 돼?"
"응? 뭐를?"
"그거."
"아. 온수용 마도구?"
"응..."
"흐음..."
고민에 빠진 클로에.
에코니아의 마도구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마력석이 내장된 마도구와 그렇지 않은 마도구.
아쉽게도 이 온수용 마도구는 후자에 속했다.
"에이네. 마력을 사용법은 알아?"
"... 몰라."
"그럼 나중에 배우고 써보자. 이건 사용자의 마력을 직접 넣어야 하는 종류거든."
"그냥 언니가 가르쳐주면 안 돼?"
"……."
사실 수인국의 모든 소년 소녀들은 나이가 차면 학교에 가서 기초 수업을 이수하게 된다.
이런 기초 교육제도는 수인국이 다른 나라들보다 우월하기 때문에 가능한 게 아니다.
암흑기를 거쳤기에 수인의 인구 자체가 적고, 상위종만 교육받는다고 하면 형평성 논란에 휩싸이니까. 이런 사회 정치적인 면모가 크게 반영된 결과다.
클로에 역시 마력 사용법을 배우긴 했지만...
남에게 가르칠 능력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가르쳤다간 이 마도구가 부서질 걸."
"히잉..."
"그렇게 풀 죽은 척해도 소용없어. 나중에 아일라 언니를 만나면 가르쳐달라 해."
"아일라 언니?"
"공작님 직속 비서인 언니야. 나중에 만날 수 있을걸."
"그 언니는 마법을 가르쳐주는 거야?"
"아마도? 물 다 받았으니까 들어와."
"... 응."
에이네는 포기하고 욕조에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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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을 마치고 나온 두 사람은 여성용 천막으로 다시금 돌아왔다.
사실 여성용 천막이라 해봐야 사용자는 클로에와 에이네 둘뿐이다.
아일라는 시하를 수행해야만 하고, 라나는 다른 마을에 파견을 나가 있으니까.
클로에가 말했다.
"밥도 먹었고. 목욕도 했고. 이제 자자."
"응."
원래라면 아일라가 써야 할 침상에 몸을 누인 에이네. 그 옆자리 침상에는 클로에가 눕는다.
그렇게 잠시간의 시간이 지나고...
클로에는 새근새근 잠이 든 상황.
'오늘따라 잠이 안 오네...'
하지만 에이네는 오늘따라 잠들 수 없었다.
잠자리가 문제인가 하면, 그건 아니었다.
비록 이 침상은 야전용이라 그 촉감이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딱딱한 나무 침대에서 생활하던 에이네에겐 꽤 사치스러운 잠자리다.
이 장소가 불안한가 하면, 그것 또한 아니다.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는 상당히 겁에 질렸던 게 사실이다. 난생처음 본 동방인인 인환보다 훨씬 험상궂게 생긴 이들이 허리에 칼을 찬 채 돌아다니고 있었으니까.
차라리 그 마을에 남아있어야 했나, 그런 후회가 들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상냥한 수인 언니인 클로에가 항상 옆을 지켜주고 있으며, 부대 내의 동방인 아저씨들도 꽤 친절한 사람들인 것 같다.
그녀에게 이곳은 이제 편안한 곳이다.
그렇다면 에이네를 잠들지 못하게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 이유는 단 하나뿐이다.
"아빠..."
에이네의 어머니는 그녀를 출산하던 중 사망. 에이네는 밀리아 마을의 나무꾼인 아버지와 단둘이서 살아왔다.
아버지와 함께한 마지막 기억은 일주일 전.
'... 직접 촌장님 댁으로 가서 따져봐야겠어.'
'아빠. 그건...'
'에이네. 이대로 있다간 우린 굶어 죽는다.'
'…….'
'우리에겐 먹지도 못할 것만 잔뜩 주고선 나무조차 못 캐오게 하지 않니.'
'말한다고 해서 먹을 걸 줄까...'
'다른 방법이 없잖니. 그래도 해방이란 이름을 내건 사람들이니, 나를 모질게 대하진 못할 거다. 너는 집에 얌전히 있거라'
'... 응. 빨리 갔다 와.'
그 대화를 끝으로 아버지는 돌아오지 못했다.
오히려 해방 교단의 사제가 집으로 찾아와서는...
'에이네. 당신에겐 이제부터 빵과 수프를 드리죠. 아침마다 촌장의 집 앞으로 나오세요.'
'저기... 사제님. 제 아버지는요?
'당신의 아버지는 일을 하기 위해. 근처의 광산으로 향했습니다.'
'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선 일을 해야죠.'
'저희 아버지는 나뭇꾼인데...'
'닥치세요.'
'…….'
'당신의 아버지는 보다 숭고한 일을 하기 위해 이곳을 잠시 떠나신 거에요. 당신이 말만 잘 듣고 있는다면 다시 돌아올 겁니다.'
'... 네.'
그 후로 촌장의 집 앞에서 음식을 배급받을 수 있었던 에이네였으나. 평소 친하게 지내던 마을 친구들의 상황도 비슷했다.
부모님이 해방 교단에게 '부탁'을 하러 간 뒤로 돌아오지 않았고, 해방 교단이 시키는 대로 하면 언젠가 부모들이 돌아올 것이다.
그 말을 믿고 얌전히 있었지만... 에이네가 이상함을 감지한 건 시하 일행이 도착한 후였다.
'당신의 아버지는 1년 전에 돌아가신 겁니다. 공작의 수하들이 오면 그리 말하세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의도를 알 수 없는 사제의 말. 그 말을 들은 에이네는 불안에 휩싸였다.
자신이 말만 잘 들으면 돌아온다고 했던 아버지를 이미 죽은 사람 취급하라니.
거기다 공작이란 지위는 귀족 중 엄청나게 높으신 분이라고 아버지에게 배웠다. 그런 사람의 부하들에게 거짓말을 하라는 건 정말이지 이상한 일이었다.
이후 교단을 믿지 못하게 된 에이네는 공작의 수하라는 인환과 클로에를 따라오게 되었지만...
막상 이런 편한 생활 속에 있게 되니 또 다른 불안감이 샘솟는다.
내가 이렇게 편한 곳에 있어도 되는 걸까.
나 때문에 아버지가 해를 입는 건 아닐까.
아니. 애초에 아버지가 무사하시긴 할까.
나는.
…….
이미 아버지를 팔아넘겨 버린 게 아닐까.
거기까지 생각이 도달하자...
지금껏 참아왔던 눈물이 터진다.
혹여 클로에가 깰까 싶어 이불 속에 얼굴을 파묻고 훌쩍이는 에이네.
그때.
누군가가 에이네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에이네."
자는 줄 알았던 클로에였다.
"언니."
"왜 우는 거야?"
"... 안 울었어."
"거짓말."
"안 울었다니까."
"훌쩍이는 소리랑 천으로 눈물 닦는 소리 다 들었어. 거기다 눈물에도 냄새가 있는 건 알아?"
"……."
꾹 입을 닫아버린 에이네.
며칠 전, 마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는 클로에에게 입을 꾹 닫았던 그녀였다.
'지금 물어봐도 비슷할 것 같은데...'
잠깐 고민하던 클로에는...
이번엔 빙빙 돌려 말해보기로 했다.
"에이네. 표류자라고 알아?"
"표류자?"
"응.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들을 표류자라 하거든. 그리고 우리 공작님도 표류자야."
"진짜? 다른 세상이 있어?"
"당연히 진짜지."
"……."
"공작님이 그러던데. 공작님 세계에서 뭐든지 전부 처리해주는 사람을 너굴맨이라고 한데."
"뭐든지... 전부?"
"응. 맡은 일을 전부 끝내버리면 '안심하라고!' 라는 말을 하나 봐."
"너굴맨..."
언젠가 클로에와 라나는 고용주인 시하에게 너굴맨의 의미를 물었던 적이 있었다.
가끔 시하가 심심하다는 이유로 라나에게 너굴맨 짤방의 포즈와 대사를 시킬 때가 있었기 때문.
지금 클로에가 말하는 것은 시하가 반쯤 장난삼아 이야기해준 것이다.
클로에가 말을 이었다.
"근데 우리 공작님은 엄청 믿음직하고, 여기 아저씨들도 엄청나게 강하거든. 전부 너굴맨일거야."
"……."
"그러니까. 지금 에이네를 괴롭히는 고민이 있으면 너굴맨들이 전부 해결해줄 거야."
그 말을 들은 에이네는 잠시간 고민하다...
클로에의 방향으로 돌아누웠다.
자연스레 에이네는 클로에의 가슴에 안긴 형태가 되었고, 조심스레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습기가 가득 차 있다.
"진짜. 너굴맨들이 다 해줘?"
"응."
클로에의 대답에 에이네는 고민을 시작했다.
분명 해방 교단의 사제는 아버지가 1년 전에 죽었다고 이야기하라 지시했다.
만약 여기서 자신이 소원을 빈다면 해방 교단이 지시를 전면적으로 부정해버리는 셈이고...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을 수 있다.
"그럼..."
하지만.
에이네는 교단이 믿기지 않는다.
차라리 눈앞의 클로에를 믿고 싶었다.
"그럼. 우리 아빠도 찾아줄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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